‘평화’를 히브리어로 <샬롬 שָׁלוֹם>이라고 한다. 성서에는 흔히 ‘화평’, ‘평강’ 따위로 다르게 번역하기도 한다.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상태의 회복까지 포함한다. 창조의 원판으로 세계를 복귀시키는 일이 <샬롬>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는 <샬롬>의 염원을 담고 작성되었다. 전쟁과 살육으로 얼룩진 세계가 온통 망가져 있는 고대 지중해 문명권 세계에 대해서 성경의 창조기사는 <샬롬> 곧 ‘평화’를 외치고 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원판으로의 회귀 운동이며 ‘평화’는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을 때까지 끊임없이 갈구해야 할 지난한 과제이다.  

1. 말씀창조의 역사 해석: 평화<샬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세계가 창조되었다. 창조의 사역은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히브리어 <와요메르 엘로힘 וַיֹּאמֶר אֱלֹהִים>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란 뜻인데 이 어구는 창세기 1장에 9차례 반복되고 동사 <아마르 אָמַר>는 무려 11회나 반복된다(창1:3, 6, 9, 11, 14, 20, 22*, 24, 26, 28*, 29). 이 동사가 이처럼 자주 반복되는 모양새는 하나님의 창조가 말씀으로 이루어졌음을 강하게 선포하는 수사법이다.

고대의 모든 창조이야기들에서 성서가 천명하는 말씀창조와 같은 모티프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오로지 창세기만이 말씀창조를 가르치고 있다. 말씀창조는 신들의 투쟁을 통해서 세계가 생겨났다는 고대노예제사회의 폭력창조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강력한 평화선언이다.

▲ 인간의 창조를 그린 것으로 해석되는 인장그림. 수메르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모두 고깔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다. 오른쪽 여인 역시 고깔 형태의 모자를 쓴 것으로 보아 인간이 아닌 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여신의 손에 어린 아이가 들려 있는데 들려 있는 자세가 이상하다. 아이를 어르거나 품에 안은 모습이 아니라 뭔가 검사를 하고 있는 듯한 자세이다. 왼쪽에는 도공이 등장한다. 도공이 하는 일은 점토로 그릇을 빚는 일이다. 마치 어린 아이도 점토로 만들어진 인간임을 상징하는 것 같다. The Queen of Heaven P159 Gavin White저, Solaria Publication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말씀’은 그리스어로 <로고스>인데 만물을 운행하는 이치나 힘을 가리키는 헬레니즘의 용어이다. 헬라사상에서는 로고스를 천상의 한 세력으로 간주했다. 요한복음서는 이 용어를 차용하여 천지창조의 원리와 운행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선포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인생에 성공할 수 없다. 동양의 고전에도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말씀이 있다. 성경의 말씀이 없이는 인생과 역사의 이치를 깨달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체득할 길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계시의 통로이다. 오직 말씀으로 살아가려고 날마다 결심하는 자들이 곧 그리스도교의 신자들이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성경은 독자들에게 창조의 <샬롬>을 요청한다. 대결과 투쟁을 멈추고 전쟁을 종식할 것을 말씀창조는 요구한다. 오늘날 문명이 자행하는 인간성 말살과 환경파괴를 중지하고 하나님의 평화로 돌아설 것을 성경의 말씀창조는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은 인류를 ‘평화’에로 초대하는 애절한 부르짖음이다.

2. 무한긍정의 평화 창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그대로 되니라’는 히브리어는 <와여히-켄 וַיְהִי־כֵן>인데, 이 어구는 창세기 1장에 6차례 되풀이 언급된다(창1:7, 9, 11, 15, 24, 30). 빛을 창조한 첫째 날에는 없고, 궁창 창조의 둘째 날에 한 차례, 셋째 날에는 두 차례, 넷째 날에는 한 차례, 다섯째 날에는 없고, 여섯째 날에는 두 차례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이 세계는 오로지 말씀으로써만 창조된 것이다.

여기서 <켄 כֵן>이란 히브리어는 긍정을 표현하는 용어로서 영어로는 yes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말씀창조는 무한긍정의 힘으로 이행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긍정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는 말씀창조의 사상은 여느 다른 창조이야기들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평화를 반드시 이루어가신다. 주께서 말씀하시면 성령께서 일하셔서 폭행을 당하여 망가진 피조물을 <샬롬>의 상태로 재창조해 주신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도이며 율령이다. 그러므로 평화는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는 강한 긍정의 신앙이 성서를 통해 온 세계에 쟁쟁하게 울리고 있다.

3. 선한 창조로서의 평화

“좋았다”는 어구도 창세기 1장에 자주 반복된다. 주께서 창조한 것을 보시니 모두가 “좋았더라”는 평주가 매번 표현된다. 히브리어로 <키-토브 כִּי־טוֹב>이다. <토브>란 단어는 창세기 1장에만 7차례 반복된다(Gen. 1:4, 10, 12, 18, 21, 25, 31*).

7이란 숫자는 거룩한 숫자로서 저자의 의도를 보여준다. 천지창조는 7일이라는 리듬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천지운행의 원리도 7이란 리듬을 타고 이루어진다. <키-토브כִּי־טוֹב >란 어구는 궁창을 창조하신 둘째 날에만 생략되었다. 궁창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선’(善)<토브 טוֹב>는 ‘악’(惡)<라 רַע>의 반대말이다. 창세기 1장에는 <토브 טוֹב>란 단어만 나오는데 창세기 2장에 비로소 <라 רַע>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에덴동산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이는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의도적인 수사법이다.

창세기 1장의 ‘선’은 2장의 ‘선과 악’의 대조법을 향한 해석으로 주어져 있다. 말씀으로 창조된 세계는 애초부터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오로지 선하게만 창조되었다는 선포이다. 말씀창조에는 ‘악’이 없다는 선언이다.

이와는 달리 고대 지중해 문명권을 주도한 사상계에서는 이 세게는 선신과 악신의 대결과 투쟁에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이원론의 교설이 편만하였다. 선과 악의 투쟁은 창조세계의 운행 원리이므로 사람들 사이의 투쟁과 전쟁은 숙명이라고 보았다. 수메르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 회자되던 창조신화들의 관점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평화의 창조’를 선호하는 사상이 성서의 창조기사인 것이다. 본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는 오직 선한 것밖에 없었다. ‘악’은 사람이 지어낸 것이라는 일원론을 가르치는 것이 성서의 말씀이다.

맺음말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세계에서 평화를 깨뜨리고 폭력을 조장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근본주의자’가 그들이다. 이들은 ‘창조과학’이라는 억지교설을 신봉하며 ‘오랜 지구론’ 내지 ‘젊은 지구론’을 퍼뜨리고 성서를 ‘축자기계영감설’, 내지 ‘성서문자무오설’로 왜곡한다.

자기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사탄으로 규정한다. 세계를 사탄과 하나님의 대결 구도로 파악하기에 이들의 세계관은 이원론의 경향을 보인다. 성경의 말씀창조관과는 정면 배치되는 잘못된 신앙이다.

이들은 북한의 정권을 사탄이 지배하는 정권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북한의 정권과 체제는 멸망시켜야 하지 일체의 대화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한다. 대화는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게 하는 음모이기 때문에 대화에 일체 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기도로 북한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외친다. 그러나 이들의 세계관과 주장은 고대 폭력숭배자들의 세계관을 현대에 복제한 잘못된 신앙으로 경계해야 하는 오류이다.

창세기 1장은 전쟁의 세계관에 반대하는 평화의 세계관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고대 제국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지배자들의 투쟁 이데올로기를 전면 부정하였다. 세계는 폭력의 산물이 아니라 말씀의 산물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세계관은 그 밑바탕에 반폭력 평화의 사상을 깔고 있다. 말씀은 반폭력 평화의 기치를 들고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무한긍정의 사랑을 전한다. 말씀의 창조사역은 절대선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천지운행은 절대선의 사랑으로 인하여 진행되며 이윽고 평화 <샬롬>의 사랑으로 완성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 실현된 평화의 성육신(化身)이며 교회는 평화를 세상 속에서 일구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영재  rheeyjae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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