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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마태복음 15:21-28)옳고 그름에 집중하기를
이성훈 | 승인 2018.05.20 21:42

지방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런 때에 제목이 ‘진보와 보수’라고 해서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천명하려는 것은 아니고, 진보나 보수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목회자가 어떤 하나의 이념을 지지한다고 말한다면, 성도님들 중에 반대편을 지지하시는 분들이 뭔가 잘못된 생각을 가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에 하나의 이념이나 성향만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또 진보나 보수라는 개념 정의에 대해서는 저보다 여러분께서 더 정확하게 아실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성경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먼저 진보와 보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떠한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저만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진보와 보수의 개념을 나눌 때면 항상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운 내용이 떠오릅니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명성황후의 개화정책의 대립은 보수와 진보를 명확히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배웠습니다.

해외의 모든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나라의 문을 굳게 잠궜던 흥선대원군은 보수의 전형이고, 러시아와 친선을 맺으며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명성황후를 비롯한 개화파들은 진보의 전형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결론은 언제나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은 지키고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한다’로 끝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내용이 지금 시대에 있어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명확한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진보인사인가?

어떻게 생각하면 오늘의 본문과 제목이 잘 연결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저희가 너무도 잘 아는 가나안 여인(마가복음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으로 전할 수 있는 말씀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말씀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희는 역사적 예수, 2000년 전 실제로 살아 숨 쉬고 계셨던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생각해보며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가끔 말씀을 전할 때, 예수님의 이념적 성향은 보수인가 진보인가를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예수님은 진보적이셨다고 말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진보 성향을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목사님들 대부분이 예수님은 진보적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보수적인 교회들에서는 이런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않는 듯 합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은 진보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이념적 성향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선민사상에 가진 분이셨고, 그 사상에 따라 행동하신 분입니다. 지금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은 시오니즘(Zionism) 사상가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7장에도 나타납니다만, 마태복음이 그러한 모습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이방인 여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여성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보이신 태도는 냉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23절에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다’고 말합니다. 대꾸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던 모습과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찾을 것도 없이 마태복음에서만 보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병과 악한 것들로 인해 고통 받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9:35-36).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당신 앞에 모여있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병을 치유하셨습니다(14:14).

오늘 본문 바로 이어지는 내용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느라 배고픈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십니다(15:32-38).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이 아이를 고치지 못했음을 고하며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쳤을 때, 예수님은 귀신을 쫓지 못한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아이의 귀신을 쫓아주셨습니다(17:14-18).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고치셨습니다(20:29-34).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은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은 상당히 냉혹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우리가 아는 예수님이 맞으신 건가요? 딸이 귀신 들어서 고통받기에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려 간구한 여인이건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향해 쌀쌀맞은 태도만을 보이셨습니다. 24절의 이 말씀도 여인에게 직접 하신 말씀도 아니고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라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여인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막고 엎드려 간청합니다. 이제야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만, 이 말씀 역시도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향해서 ‘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만, 실제 로마 병사를 눈앞에 두고 ‘개’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복음서를 읽을 때,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다들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이 여인도 남편 이야기가 안 나오니까 과부이고 딸과 함께 사는 어려운 여인이라고 생각하며 말씀을 읽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그녀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가나안 사람, 혹은 수로보니게 족속이라는 말만 있습니다. 그녀가 부유했는지 가난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상당히 과격한 말씀이 됩니다. 이 여인의 신분,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예수님은 당당하게 여인에게 ‘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극단적 선민의식을 가지신 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간혹 이 ‘개’라는 표현에 대해서 여인을 시험하기 위한 예수님의 표현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본문에 예수님은 여인을 시험하려는 태도가 전혀 아니십니다. 그냥 모른척 하고 지나가려던 것이 맞아 보입니다. 또한 ‘개’의 헬라어가 본래 ‘퀴온(κυων)’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향해 ‘퀴온’의 축소형태인 ‘퀴나리온(κυναριον)’을 사용하고 계신 점을 들어서 이 말은 일반적인 ‘개’가 아니라 ‘작은 개’, ‘애완견’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 이 본문을 설교할 때 많은 분들이 ‘dog’가 아닌 ‘puppy’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즉 여인을 모욕하는 말이 아니라 어여쁘게 보시고 하신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개보다도 더 작은 존재로 여인을 치부하셨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로부터 구원이 시작된다는 사상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이사야 60장 1-3절은 그러한 선민의식을 잘 보여줍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 본문에서 ‘너’는 결코 우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의식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그럴까요? 다른 본문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기 전에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백부장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시는게 아니라 이스라엘에 이런 믿음이 없음을 한탄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만 그런 성향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사실 앞선 백부장의 이야기는 누가복음 7장에도 동일하게 나옵니다. 이방인에게 우호적이라는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에 없는 이야기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을 설득하는 장면입니다(눅7:2-6).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따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설득에 의해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러 가십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볼까요?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보며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도 선한 존재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핵심은 유대인들이 전반적으로 미워하는 사마리아인이 행한 행동 자체에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착하냐 나쁘냐는 이야기의 핵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비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사마리아인에 대한 미움, 편견이 예수님 안에도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지금식으로 이 비유를 바꿔보자면, 어떤 사람이 돈이 급한 상황입니다. 천만원만 있으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지만, 천만원이 없으면 모든 것을 날릴 상황입니다. 은행은 그를 외면합니다. 친구들도 그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MB라는 사람이 그의 상황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무이자 무기한 상환을 조건으로 천만원이 아니라 1억을 빌려주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 이야기에서 가공의 인물 MB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일은 실제 벌어진 일도 아니고 저는 가공의 인물 MB가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를 조건 없이 도울 수 있는 행동 자체와 이를 행하는 일이 이웃이 되는 일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한 마디를 위해서 상당히 길게 왔습니다. “역사적인 예수님은 보수적 유대 선민사상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측면에서 보수주의자입니다. 더 많은 본문을 살펴볼 수도 있겠지만, 분량이 너무 길어지다보니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들라크루아의 혁명

이쯤에서 빠지면 서운한 서양화 한 점을 보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입니다.

ⓒGetty Image

1830년 7월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혁명을 그린 그림입니다. 우리가 흔히 프랑스 시민혁명이라고 부르는 사건은 1789년의 혁명이고 그 이후 나폴레옹 황제기를 거쳐 다시 왕정이 시작된 후에 발생한 혁명입니다. 흔히 바리케이트 혁명이라고 부르며,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된 시기의 바로 직전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드리자면, 화면의 가운데에는 한 명의 여인이 프랑스기와 소총을 들고 사람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실제 인물이 아닌 프랑스의 자유를 상징하는 ‘마리안느’입니다.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여신’도 마리안느입니다. 1794년 시민혁명 후 공화정이 시작되면서 마리안느를 자유의 상징, 자유의 여신으로 공인했다고 합니다. 마리안느의 그림이나 조각은 지금도 프랑스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자유’가 민중을 이끌어 혁명을 돕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고, 이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약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사실이 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일기에도 남겼지만, 보수주의자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말하는 보수의 개념은 우리의 개념과 완전히 다르겠지만, 그런 개념정의는 뒤로 하고, 우리의 인식에서 보수주의자가 혁명, 시민혁명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뭔가 이상해 보입니다. 하지만 들라크루아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와 함께 총을 들고 나섭니다. 그림에 그려진 사람들은 부르주아, 노동자, 소년도 있습니다. 모든 민중이 함께 혁명을 위해 일어났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 있어서, 또한 이 그림을 그린 들라크루아에게 있어서 진보와 보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구분조차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시민들이 일어났던 이유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의 무능함과 부패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옳지 않음에 옳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유대교 선민사상을 가진 보수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잘못된 것에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보수 또는 진보, 어느 한쪽의 이념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잘못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수냐 진보냐를 따지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옳고 그름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옳고 그름

사실 우리는 진보가 무엇인지 보수가 무엇인지 혼란한 상황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진행 중인 성주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아도 그렇습니다. 처음 사드 배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사드 배치를 찬성하면 보수, 반대하면 진보라는 구분이 생겼습니다. 물론 성주 시민들에게 있어서 사드 배치는 생존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이념 성향과는 무관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한 걸음만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미국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들여놓아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보수이고, 들여놓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진보입니다. 보수가 외세에 의한 국방체계를 주장하고, 진보가 자주국방 체계를 주장합니다. 북의 핵미사일을 막을 수 있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명확하지 않은 시험적인 미사일 시스템을 들여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보수이고, 불명확한 시스템이니까 들여놓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쪽이 진보였습니다. 뭔가 둘이 바뀐 듯한 느낌이 드는건 제 착각일까요?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으로 나뉘어서 정치가 진영싸움으로 바뀌어있는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겠지만, 진영싸움만 하다보니까 보수적 가치나 진보적 가치, 그 근본적인 가치는 이미 사라져있고, 결국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만 무엇인가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보수 진영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은 보수적 이념이라고 말하고 진보 진영에서는 반대로 자신들은 진보적 이념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보수건 진보건 다 자신의 정당에 이익이 되는 이야기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몇몇 정당은 예외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옳은지 그른지를 봐야 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선택할 사람이 어느 진영의 사람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자신이 한 이야기를 지킬 사람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의 시대에 더 이상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진보나 보수의 가치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올바름과 그름으로 나눌 수 있는 가치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이념적 가치 체계 안에 고정시켜 버릴 때, 우리는 옳고 그름을 바르게 살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진보적인 사람이지만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이지만 옳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자들을 보면서 예언자들의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흥선대원군과 마찬가지로 외세와의 교류를 단절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입니다.

이념이라는 테두리에 갇히지 마시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하시며, 이 땅에서 올바른 외침을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외침이 선거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옳은 길만을 따라 살아갈 때에, 서로의 성향이 진보적일 수도 보수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바른 지향점을 향해 나아갈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모두에게 평화가 허락되는 하나님 나라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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