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같이 광주에 가야 한다. 대안학교 중3-고2 학생들에게 '광주'와 현대사를 이야기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저녁에 노동자교육센터 '노동조합 전략과 전술' 강의를 들어야 하니까, 보고 싶은 광주의 벗들 얼굴도 못보고 올라와야 한다. 올 5.18 민중항쟁 기간에는 다른 때보다 더 정향자 선배를 뵙고 싶다.

1988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실린 홍희담의 소설 <깃발>에서 형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가를… 그것은 곧 너희들의 힘이 될 거야"

방송대 <현장증언, 이 땅의 노동운동> 촬영 때, 소설 속 형자의 본보기였던 정향자 당시 전남제사노동조합 지부장과 인터뷰를 했다. 그 뒤 역사기행 때 경험담을 부탁드리기도 했다. 정향자 선배는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어간 사람들이 바로 노동자들, 기층들, 넝마주이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닥에서부터 빡빡 기는 어려운 일을 다 한 여성들, 노동자들의 구실을 조미료, 부속품 같은 것으로 취급해버리는 세상이 안타깝다고도 했다.

1980년 5월 노동자들이 항쟁의 전면에 나섰던 20일,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본다.

27일 새벽을 가르며 들려오던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하며 외치던 젊은 여성의 애끓는 호소를 오래 동안 잊지 못하던 광주 사람들.

5.18 민중항쟁 기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싸우고 죽어갈 때, 전두환 신군부가 저지른 피의 학살을 침묵으로 거들었다고 느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오래동안 '광주'에 빚을 지고 살았다. 그때 그곳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 숨져간 사람들의 투쟁은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빚이었지만, 전두환의 방조자 공범자였다는 부끄러움과 부채의식을 씻고 1980년대 민중운동, 노동자운동에 나설 수 있게 만든 힘의 근원, 빛이기도 했다.

5월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민주화 시위가 침묵 속에 잠겨갈 때 광주에서는 시민 학생들이 계엄군에 맞서 계속 시위를 벌였다. 계엄군의 잔학한 학살만행이 이어졌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이끌던 지도부가 광주를 빠져나간 뒤 광주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던 이들은 노동자, 농민, 기층민중이었다.

5월20일 오후 6시쯤 택시노동자들이 택시 200여대를 몰고 무등경기장에 모였다. 그들은 18, 19일 광주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공수부대의 만행을 누구보다 생생히 눈으로 보고, 학생들과 부상자를 나르다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7시쯤 버스와 대형트럭을 앞세운 차량 200여대가 금남로에 나타났다. 거리를 가득 메운 채 불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도청 쪽으로 나아갔다. 운수노동자들의 투쟁과 희생은 시위 군중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로케트전기, 전남방직, 일신방직, 아시아자동차, 금호고속, 전일섬유, 광주어망, 남해어망 노동자들이 투쟁의 대열로 모였다.

<투사회보>를 만들던 들불야학팀도 노동자들이었고, <투사회보>를 돌리다 들키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일을 했던 이들은 회보를 하나라도 더 감춰 나르려고 ‘몸빼’같은 옷을 입고 나온 21살, 22살, 23살 여성노동자들이었다.

ⓒ박준성

맨 앞에서 총을 들고 싸웠던 시민군 기동타격대원들을 보더라도 항쟁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5.18민중항쟁에 적극 참여했다가 군법회의에 넘겨진 기동타격대원 30명은 이렇다. 윤석루(20)-자개공, 이재호(33)-회사원, 이재춘(20)-방위병, 양기남(19)-삿슈공, 임성택(17)-양복공, 구성회(16)-양화공, 오정호(33)-식당종업원, 박승렬(20)-레코드사, 박명국(18)-양화공, 김상규(19)-전파사, 박영수(18)-도자기공, 안성옥(19)-목공, 김두전(19)-재수생, 정광호(20)-타일공, 염동유(23)-다방, 이성주(18)-차량조수, 김공휴(19)-나전칠기공, 남승우(19)-삿슈공, 도준식(23)-식당종업원, 남영관(18)-농업, 박홍식(21)-목공, 김기광(18)-고3, 박인수(21)-노동, 김여수(20)-용접공, 나일성(18)-가구공, 김태찬(19)-석공, 김행남(16)-노동, 김재귀(16)-고2, 영용섭(19)-나전칠기공, 장승희(19)-양화공.

2001년에 조사된 희생자 162명의 직업분포를 보면 노동자가 가장 많은 35명, 학생이 31명, 무직이 23명, 불명 17명, 사무직 13명, 자영업 12명, 운수업 및 운전기사가 12명, 서비스직 11명, 농업 4명, 공무원과 방위병 각 2명이다. 학생사망자에는 대학생보다 초중고생과 재수생이 더 많다.

도망치지 않고,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1980년 광주는 80년대 변혁운동의 끊이지 않고 마르지 않는 샘물, 저수지 노릇을 하였다. 6월항쟁과 7.8.9노동자 투쟁을 밀어주는 힘이었다.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에 가두는 수갑이 되었다.

광주는 지금도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또 노동조합을 디딤돌 삼아 노동운동, 변혁운동으로 나갈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박준성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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