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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이루는 방식(사사기 21:13-1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이성훈 | 승인 2018.05.27 23:27

오늘 본문은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WCC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로 작년 대림절 첫째 주일은 지정하고, 전세계 교회가 함께 나누기를 바라며 선정한 본문입니다. 에큐메니안에서도 이 설교문을 작년 11월 29일에 ‘폭력을 넘어 평화의 촛불을!’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하였습니다.

13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14 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 중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에게 주었으나 아직도 부족하므로
15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당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예배였기 때문에 성경 본문에서도 지파간의 갈등과 전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사사기를 선택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제가 사사기의 마지막을 통해서 읽고 있는 말씀은 당시의 설교문과 조금 차이가 있었기에 동일한 본문으로 약간은 다른 말씀을 전했습니다. 북미 대화가 성사되느냐 안 되느냐, 우리는 북미의 중재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로 시끄러운 이때에 오늘의 말씀을 한 번 더 생각하며 나눠보려고 합니다.

베냐민 지파 몰살 사건

사사기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에 왕정이 세워지기 전까지 사사들이 활동하던 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사사기의 대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과 사사들의 활약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사기의 마지막 이야기는 사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사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사사기 19장에서 21장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사사기 중에서 드보라, 기드온, 삼손 등 사사들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기에 정리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보면 볼수록 어이가 없고, 어쩌면 화가 나기도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레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첩이 있었는데, 이 첩이 바람을 핀 후, 남편을 떠나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남편으로부터 도망을 친 것인지, 더 이상 남편이 싫어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녀는 친정으로 가버립니다. 레위 사람은 이 첩을 많이 좋아했는지, 그녀가 바람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 자신과 함께 돌아가자고 권합니다. 장인과 여인은 남편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함께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레위인과 여인은 베냐민 지파 땅인 기브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 나그네가 자신의 집에서 묶을 수 있게 해주어야 했지만, 기브아 사람들은 레위인과 여인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이들을 발견한 한 노인, 에브라임 산지 출신인 노인이 이들을 자신의 집에 영접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이 노인의 집에서 묵으려고 하는데,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와서는 레위 사람을 자신들에게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그러면서 그 레위인과 관계해야겠다고 말합니다. 이 상황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이 겪었던 일과 동일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브아의 남성 불량배들은 여성이 아닌 남성을 성폭행 하려고 하니까 어서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 자신의 딸들을 내어주겠다고 말했던 것처럼 레위인과 여인을 묵게 해준 노인도 자신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데려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불량배들은 노인의 말은 듣지 않고 계속 행패를 부립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잘못 읽을 여지가 있는데, 24절에서 노인이 말한 후에 25절에서 ‘그 사람이’라고 주어가 되어 있어서 ‘그 사람’을 노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 ‘그 사람’은 레위인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도 ‘자기 첩’이라고 잘 번역해 놓았지만, 얼핏 읽으면 노인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레위인은 불량배들이 돌아가지 않고 완고하게 집을 에워싸고 있자, 자신의 첩을 데리고 나갑니다. 원어를 직역해보면 ‘그 남자가 그의 첩을 밖에 그들에게 데려갔다. 그리고 그들이 그녀와 관계했다.’로 되어 있는데, 약간 이상한 점은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나갔다면 애초에 레위인을 목표로 삼았던 불량배들이 그를 겁탈했을 텐데, 그의 첩만을 밤새도록 겁탈합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과 뒤 이어지는 내용을 생각해 보았을 때,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불량배들에게 던져주고 자신은 집 안에 숨어서 문을 걸어잠궜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밤새 성폭행을 당한 이 여인이 자신의 남편이 머물고 있는 집 문 앞까지 간신히 기어와서 문지방에 손을 올려놓고 죽었다는 그 후의 이야기는 그녀가 문 앞에까지 왔지만 문이 잠겨서 들어갈 수 없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만듭니다.

아침이 밝고 자신이 기껏 수고해서 데려온 여인을 불량배들에게 던져줘서 여인이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알았을 수도 있겠지만, 레위인은 잘 자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왔다가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첩을 보게 됩니다. 어이없게 이 레위인은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첩을 보면서 걱정을 하기보다는 ‘일어나서 가자’고 말합니다. 그의 말에도 여인이 일어나지 않자 그녀가 죽었음을 알고 시체를 싣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더 큰 문제로 이어집니다. 여인의 시체를 집으로 가져온 레위인은 그녀의 시체를 열 두 조각으로 나눈 후,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냅니다. 그러면서 베냐민 지파의 악행을 온 이스라엘에 고발합니다. 그의 고발로 인해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총회를 소집하고 모이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레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브아에서 유숙하려고 하는데,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기 위해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고 하다가 내 첩을 욕보여 죽게 했다’ 고 말합니다. 큰 틀에서는 맞는 이야기지만 약간은 각색이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건에 대한 조사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고 분개하여서 베냐민 지파를 공격하러 갑니다. 처음에는 베냐민 지파를 향해 불량배들만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스라엘 연합(베냐민을 제외한 나머지 지파 연합을 줄여서 이스라엘 연합이라고 하겠습니다.)을 향해 베냐민 지파는 오히려 공격을 하였고 초반에는 베냐민 지파가 유리하게 싸움이 진행되었습니다. 처음 두 번의 전장에서는 베냐민 지파의 승리로 싸움이 끝났는데, 세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 연합은 베냐민 지파에 기습을 강행하였고 광야로 도망친 베냐민 남성 600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베냐민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이스라엘에서 베냐민 지파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전쟁을 마친 이스라엘 연합은 다시 미스바에 모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자신들의 딸을 절대로 남아있는 베냐민 지파 남성들, 광야로 도망친 600명의 남성들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리라고 맹세합니다. 결국 베냐민 지파를 완전히 소멸시키겠다는 맹세까지 하게 됩니다. 이후 이스라엘 연합은 미스바를 떠나 벧엘에 이르렀을 때에 자신들의 행위를 후회합니다. 자신들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 한 지파, 즉 자신들의 동족을 쳐서 몰살시켰고, 조금 남아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아내를 갖지 못하게 함으로 베냐민이라는 이름을 이스라엘에서 지우게 되었음을 후회합니다.

여기에서 잠깐 지리적인 위치를 살펴본다면, 기브아는 예루살렘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스바는 그보다 더 북쪽이고 벧엘은 조금 더 북쪽에 있습니다. 여호수아에 따라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지역을 구분해보자면, 기브아, 미스바, 벧엘은 모두 베냐민 지파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연합이 굳이 베냐민 지파의 지역인 미스바에서 모인 이유는 아마도 베냐민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었다면 여호수아 18장에서 이미 회막을 세웠던 실로에서 총회를 열었을 것입니다. 지역 위치를 굳이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들이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를 간 후에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했다는 이야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 구약시대 이스라엘

잔뜩 후회하며 눈물을 흘린 이스라엘 연합은 이제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은 베냐민 지파에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했기에 살아남은 600명에게 아내를 만들어 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베냐민 지파를 다시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자신들이 미스바에 모여 총회를 열었을 때에 했던 맹세,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자손은 죽일 것이라고 했던 맹세를 떠올립니다. 그래서 급하게 누가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는지 참가자 명단을 확인합니다. 이들의 맹세는 율법과는 전혀 상관없는 맹세입니다. 율법에는 총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법이 없습니다.

참가자 명단을 살펴본 이스라엘 연합은 야베스 길르앗 주민이 참석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야베스 길르앗의 처녀들만 남기고 그 주민을 몰살시켜버립니다. 왜 이런 맹세를 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처녀를 남겼다는 시점에서 이들이 맹세를 지켰는지도 의문을 갖게 합니다. 아무튼 이들은 그런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런 후에 이들은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베냐민과 이스라엘 연합 사이의 평화를 선포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광야로 도망친 600명의 베냐민 남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고 그들에게 야베스 길르앗의 쳐녀들을 줍니다. 그래도 베냐민 지파에 여성, 아내가 될 사람의 수가 부족하자 이번에는 실로에서 명절에 춤추러 나오는 여성들이 있는데, 그 여성들을 보쌈해서 아내로 삼으라고 베냐민 지파에게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끝으로 사사기는 25절에 한 문장을 남기고 끝맺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폭력의 연쇄

사실 사사기 마지막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사무엘로 넘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지파들에 대한 복선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베냐민 출신이자 기브아 사람인 사울과 베들레헴 출신에 유다 지파인 다윗, 에브라임 산지 태생인 사무엘의 관계가 에브라임 사람인 레위인과 베들레헴 출신의 첩, 기브아의 불량배들 이야기 속에 복선처럼 녹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희가 보고자 하는 점은 신명기 역사가의 복선이 아니라, 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이 어떻게 결정되고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한신대학교 박경철 교수님은 이 이야기 속에서 계속해서 ‘남성’, 히브리어로 ‘이쉬(אִישׁ)’를 강조되고 있음을 보시고 남성들에 대한 고발이라고 해석하시지만(실제로 원어에서는 ‘그 남성이’라던가 ‘그 남성들이’라는 식으로 ‘남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꼭 남성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성별을 넘어 사람들이 평화를 얻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이 레위인은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첩을 불량배들에게 내놓습니다. 노인은 자신의 딸을 지켰다는 생각에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레위인의 행동에 대해 침묵합니다. 아무튼 노인의 침묵은 가정의 평화를 지켜냈습니다. 첩의 죽음을 알게 된 레위인은 불량배들을 없애기 위해서 이스라엘 전체에 자신의 첩의 시체를 조각내서 보내고 총회를 소집합니다. 이스라엘 연합은 이스라엘 내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베냐민을 공격합니다. 반대로 베냐민도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베냐민이 사라짐에 대해 후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베스 길르앗을 멸망시킴으로 인해 베냐민 족속을 살려내고, 오늘 본문에서 읽은 바와 마찬가지로 ‘평화’, ‘샬롬(שָׁלוֹם)’을 선포합니다.

▲ Matthaeus Merian I(1593-1650), Wives for the Benjamites, 1626. ⓒGetty Image

이들이 선택하고 결정한 내용들 중에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선한 내용들이 있습니까? 전부 싸워서 죽이는 결정밖에는 없습니다. 노인의 선택은 남의 싸움에 대해 침묵하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 뒤에는 또 다른 싸움을 향한 선택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평화를 위해서 싸움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폭력을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우리가 잘 아는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를 떠올리게 합니다.

2000년 초반에 나왔던 ‘영웅’이라는 중국영화가 있습니다. 진시황이 처음 중국을 통일하던 때에 그를 암살하려던 자객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진시황은 자신을 죽이려는 자객들 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자객 세 명을 경계하며, 그 누구도 자신의 백 걸음 앞까지 오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자객 세 명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한 명을 잡아오면 자신 앞으로 30걸음 다가올 수 있도록 포상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인 네 번째 자객은 10걸음 거리에서 무조건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필살기를 개발하였고, 진시황에게 10걸음 앞까지 가기 위해서 현상금이 걸려 있는 세 명의 자객을 설득합니다. 세 명을 모두 죽인다면 진시황과 10걸음 떨어진 90걸음을 다가갈 사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세 명을 모두 설득하여 진시황 10걸음 앞까지 가게 되지만 주인공은 결국 진시황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세 명의 자객 중 암살을 포기한 한 명의 자객에게 들었던 이야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시황을 죽이려다가 세상을 바라보고 암살을 포기했다고 말합니다. 진시황의 통일 방식이 폭력적이지만, 중국이 통일된다면, 오히려 수많은 나라들의 잦은 전쟁으로 인해 피해당하던 수많은 백성들에게는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에서 진시황은 이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세상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그 자객 밖에 없다며 웃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힘에 의한 평화를 이룩한 진시황의 노력은 완전한 평화로 이어지지 못했고 통일 왕국은 15년 만에 멸망하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로마에 의한 평화도 그리 길게 가지는 못하고 로마의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폭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평화는 결국 폭력에 의해서 무너지게 되고,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가는 말

사사기의 마지막 말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씀은 왕정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참된 평화를 가져다주는 왕,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따르지 않았음을 이야기합니다.

요즘 국제 정세가 상당히 복잡하고 소란스럽습니다. 그 중심에는 아마도 북한과 미국이 있을 것입니다. 회담을 한다고 했다가 안 한다고 했다가, 안 한다고 하면서도 또 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두 사람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나 봅니다.

북미간의 회담은 분명 전 세계적인 평화를 위한 회담임은 분명합니다. 이는 분명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평화의 소식일 것입니다. 이 회담에 있어서 우리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이 회담이 좋은 방향으로 평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일에서라도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결국 세상을 참된 평화로 이끄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확산되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은 ‘남혐’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변질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남성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지고 있는 폭력적인 생각들은 남성 스스로가 고민하고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폭력성을 띈 ‘남혐’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서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운동으로 변화시켜 갈 필요가 있습니다. ‘남혐’은 결국 ‘여혐’이라는 또 다른 폭력을 낳고 있을 뿐입니다.

더 작은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 상사가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진행해야 일이 잘 풀린다면서 강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도 평화를 위해 폭력을 쓰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의 일상적인 반복은 결국 이 사회에 갑질문화라는 형태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너도 나도 ‘갑’이 되기 위해서 혈안이 된 사회를 만들어냈습니다. 폭력의 연쇄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 안에서 폭력의 연쇄가 아닌 참된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이를 위해 일하시는 평화의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작은 일에서 평화를 위해 힘쓰실 때에, 이 땅에 참된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질 줄 확신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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