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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사랑의 종교인가악에 대항하는 법(마태복음 5:38-42)
이성훈 | 승인 2018.06.03 23:05

기독교라는 종교를 한마디로 정의해보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마5:44; 눅6:27,35).’ 라는 말씀은 기독교인의 행동지침 중에서 첫 번째에 놓아도 당연하다고 여겨질 말씀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했을 때에,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찾을 수 있는 가치는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정의, 공의, 평화, 등등 수많은 가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사랑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을 통해서 드러납니까? 가장 쉬운 방식은 베푸는 일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거나 먼저 다가가서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일, 남의 아픔을 돌봐주는 일,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 주는 일, 등등 여러 가지를 한 마디로 베품이라고 말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까지 베풀어야 할까요? 성경은 마치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베품, 끊임없는 베품을 요구하는 것만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기독교인이 사랑을 행하며, 남을 돕는 일을 행할 때에 어디까지 그 일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만약에 사기꾼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사기를 칠 때에, 우리가 그 사람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 사기에 당해줘야 하는가? 상대방이 분명히 악을 행하고 있는데, 우리는 사랑해야만 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 악에 당해주고 오히려 더 많은 것으로 그에게 주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데에는 오늘의 본문이 우리 앞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우리가 알고 있는 해석

오늘의 본문 말씀은 여러분께서 너무도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누군가가 내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고,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같이 가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예수님의 명제-반명제 중의 하나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명제-반명제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제시하시면서 그 율법을 수정, 강화하시는 말씀들을 뜻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 속에서 나타나는 관계, 나의 뺨을 때리고, 옷을 달라하고, 오리를 가자고 하는 대상은 내 주변 인물, 가족, 친구라기보다는 나의 적대자, 대적자, 원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연히 적대적 행위이고, 옷을 달라는 것도 그저 옷을 빌려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옷을 빼앗기 위해 법정에 고발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성경에도 40절에 ‘고발하여(헬라어 κρίνω 크리노)’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5리를 가달라는 것도 41절에 ‘억지로(헬라어 ἀγγαρεύω 앙갈류오)’라는 말이 써 있듯이, 가고 싶지 않음에도 억지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상대방은 나에게 명백한 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출애굽기 21장의 말씀을 이야기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다.’ 출애굽기의 법에 따르자면, 내 오른뺨을 때린 사람이 있으면 나도 그의 오른뺨을 때려야 합니다. 내 옷을 빼앗은 사람이 있으면 나도 그의 옷을 빼앗아야 합니다. 내게 억지로 길을 동행하게 한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를 억지로 끌고 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법과 반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대적하다’의 헬라어는 ‘안티스테미(ἀνθίστεμι)’로 ‘히스테미(ἵστεμι)’에 ‘안티’가 붙은 형태입니다. ‘히스테미’는 ‘서다’, ‘서 있게 하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에 반대인 안티가 붙어서 ‘서 있지 못하게 하다’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대적하다’라고 번역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성경 중 하나인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앙갚음하지 말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앙갚음이라는 단어가 상대방이 나에게 한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라는 뜻을 담기 때문에 앙갚음하지 말라는 번역이 이 본문에서 우리말 번역으로는 더 그럴 듯 해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원문 그대로의 의미도 그렇고 이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악에 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인들을 참으로 힘들게 만듭니다. 우리는 바보처럼 당하고만 살아야 하게 만듭니다. 초대교회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금의 우리와 동일하게 받아들인 듯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악을 행하는 이에게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그를 위해 복을 빌라.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많은 교회들에서 하는 이야기와 동일합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따른 해석

일전에도 명제-반명제 본문에서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따라서 말씀을 드린 듯 한데, 역사적인 예수님을 연구한 학자들, 특히 당시의 사회를 연구하며 그 사회의 상황을 성경에 적용시켜서 해석한 사회과학적 연구 방법을 사용하는 학자들은 조금 다른 해석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전해 들었던 그 당시 사람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를 생각하면서 말씀을 해석해놓은 것입니다.

당시 상황 속에서 선포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저 바보처럼 당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시로 들어주신 세 가지 이야기, 뺨을 돌려대는 일, 겉옷까지 내어주는 일, 10리를 가는 일 전부 그렇습니다.

먼저 오른뺨을 맞는다는 것은 상대가 왼손으로 따귀를 때렸거나 오른손등으로 따귀를 때렸음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보통은 왼손으로 따귀를 때리는 일은 없고, 오른손으로 따귀를 때리는데, 미천한 사람, 노예를 대할 때는 오른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뺨을 때렸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뺨을 맞고 있는 사람은 노예 혹은 사회적 약자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당시에 만약 누군가가 내 오른뺨을 자신의 오른손등으로 때렸다면, 그는 나를 미천하고 미개하다고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나의 왼뺨을 돌려대는 행위는 단순히 ‘한 대 더 때려주세요’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 뺨을 당신의 오른손등으로 때리지 말라는 표현이며, 나를 미천하게 대하지 말라는 표현입니다. 상대방의 경우에 자신의 오른손등으로 내 뺨을 때려야 나를 미천하게 대한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데, 왼뺨을 오른손등으로 때리려면 뭔가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뺨을 때려야 합니다. 즉 행동으로 취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은 나를 미천하게 여기는 상대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지 말라는 일종의 항의 행동입니다.

둘째로 나의 속옷을 빼앗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 옷을 빼앗기 위해 나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이 본문은 원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원어에서는 우리 성경에 번역된 식으로 속옷과 겉옷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빼앗고자 하는 것은 ‘키톤(χιτών)’이고 예수님께서 주라고 하신 것은 ‘히마티온(ἱμάτιον)’입니다.

인터넷에 ‘키톤 히마티온’이라고 찾아보시면 그림까지 잘 나와있습니다만,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키톤’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몸에 두르고 있는 직사각형의 천 옷을 의미합니다. ‘키톤’은 모양과 무늬가 다양하게 존재하는 그리스 당시의 표준적인 옷입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은 ‘키톤’을 입고 그 위에 ‘히마티온’이라는 천을 더 두르고 다녔습니다.

▲ 키톤 하마티온 ⓒGetty Image

그렇다고 해서 ‘히마티온’이 ‘키톤’의 장식품이라던가 옷 위에 걸치는 ‘숄’ 같은 것은 아닙니다. ‘히마티온’은 우리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을 생각하면 입고 있는 바로 그 옷입니다. 당시의 철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키톤’을 입지 않고 ‘히마티온’만을 입었다고 합니다. 복식에 대한 이해가 짧아서 명확하게 설명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키톤’은 발까지 오는 긴 옷이고 ‘히마티온’은 무릎까지 오는 짧은 천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실제적인 속옷은 따로 입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를 법정에 세운 이 사람은 나의 ‘키톤’을 가져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히마티온’만 남기려 합니다. 즉 제대로 된 옷은 가져가고 최소한의 옷만을 남겨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히마티온’도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는 만약 속옷을 입고 있다면 중요 부위를 간신히 가리는 속옷만 입고 있을 것이고, 속옷을 입지 않았다면 알몸이 됩니다.

이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출애굽기의 법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6-27절에 따르면 누군가의 옷을 전당 잡았는데, 그가 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옷을 빼앗아야 하거든 해가 지기 전에는 그 옷을 돌려주라고 말합니다. 그가 알몸으로 밤을 보내지 않도록 옷은 빼앗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나의 적대자는 내 옷을 빼앗으면서 제대로 된 옷도 아닌 ‘히마티온’은 남겨두는 것입니다. 그것만 남겨둔다면 자신은 법을 어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히마티온’까지 줘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는 나를 알몸으로 잠들게 만드는 공의롭지 못한 사람, 악한 사람이 됩니다. 또 당시의 유대인들이 출애굽기의 법을 잘 지켰다면, 그는 오히려 빼앗았던 옷을 돌려줘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본래 ‘키톤’과 ‘히마티온’이 평민들에게 있어서 옷 한 세트로 여겨지기 때문에 둘 다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셋째로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는 일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일입니다. 로마법에 따라 로마 군인들은 자신의 짐을 민간인에게 들게 하고 약 1마일, 대략 1.6Km 정도를 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5리가 1.2마일이기 때문에 우리 성경에는 5리로 표현된 것인데, 원어에는 명확하게 마일의 뿌리가 되는 단어인 ‘밀리온(μίλιον)’으로 되어 있습니다(밀리온이 라틴어 ‘밀레’가 되고 영어 ‘마일’이 됩니다).

여기에서 원어를 굳이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 말씀을 들은 당시의 사람들은 ‘같이 가자고 말한 사람’이 ‘로마 군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1마일을 함께 가자고 하는 사람은 분명 로마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인이 자신에게 짐을 지우고 1마일을 가도록 명령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1마일을 더 가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들을 속국으로 삼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부려먹는 로마 군인을 적극적으로 도우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로마법적으로 1마일을 동행시킬 수 있다는 말은 역으로 1마일 이상은 짐을 지울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만약 1마일을 간 상황에서 짐을 지고 가던 사람이 그 이상을 같이 가겠다고 말한다면 그 순간에 당황하고 불안한 사람은 짐을 지는 쪽이 아니라 법을 어기게 되는 그 로마 군인 쪽입니다.

이 세 가지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고도의 디스 방법을 가르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악을 대적하지 말하는 말씀이 단순하게 ‘악에게 당해줘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이 아닌 선행으로 그들을 대적하라는 말씀이 됩니다. 상대가 악을 가지고 나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에, 나는 선한 행동으로 그에게 반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선행은 오히려 상대방을 부끄럽게 만들고 치욕스럽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이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2장 19-21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선행을 통해 악을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표현은 더 과격합니다. ‘그리함으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응은 또한 하나님께서 하시리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출애굽기 말씀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그 행위가 악이라면 우리는 행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선행으로 그 악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수정, 보완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역할

이제 여러분께서는 조금 안심하셔도 될 듯합니다. 기독교는 무조건 당하기만 해야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선행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악에 대항하는 종교입니다. 상대방의 악에 대해서 용인하고 묵인하고 그저 받아들이기만 해야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들의 악을 세상에 드러내고, 악을 휘두르는 자들에게 오히려 부끄러움을 알게 해야 하는 종교입니다.

선행으로 악을 이긴다는 일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간디의 비폭력이야말로 영국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폭력이었다고. 또한 우리는 분명히 경험했습니다. 촛불이 물대포를 이기고, 비폭력이 폭력을 이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분명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일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우리가 선행을 무기로 사용하는 일이 악인을 무찌르고 쓰러뜨리기 위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 뒤에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함은 악한 자가 악을 깨닫게 하고, 그가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끝내 돌이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악을 휘둘렀음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게 만들고, 그렇기에 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당하고 사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고, 악인을 회개하게 만드는, 참된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선으로 무장해나갈 때에 세상 곳곳에 숨겨진 악이 드러나게 되고, 그 악을 행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세상이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일 줄 믿습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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