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나는 서남동 스승님의 마지막 제자였다내가 만난 서남동 목사 ⑲
한기양 | 승인 2018.06.10 23:37

죽재 서남동 스승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83년 2월말 즈음이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이란 곳을 물어물어 찾아가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풍문을 듣고 입학을 문의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입학할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고 있던 활동과 일을 그만 두거나 조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1982년 12월 초순이었는지, 11월 말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학교 후배들이 꼭 함께 보자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약속장소로 나갔다. 그 즈음 나는 경기도 부천에서 1회용 주사기를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일 하고 있었다. 학생운동하다 제적된 ‘빵잽이’들이 노동운동으로 이전하기 위해 이른바 ‘위장취업’ 하던 흐름에 동참하고 있던 터여서 친구들이나 후배들과 어울릴 수 있는 여유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감옥에 갇혀있을 때 ‘옥바라지’ 해준 고마운 후배들이 특별한 만남을 준비해두고 만나자는 데 거절할 수 없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정상시 목사(안민교회)였다. 서울구치소에서 함께 감옥생활을 했던 사이였다. 하지만 서로 얼굴을 맞대고 만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옥바라지 하던 후배들끼리 잘 알게 돼서 건너건너 서로의 존재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역시 제적생이었지만 계속 남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한신대에서 제적된 학생들로 하여금 비록 학교에서는 제적돼 공부를 계속 할 수 없었지만, 기장 교단에서는 [선교교육원]에서 남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타 대학에서 제적된 학생이라도 뜻이 있다면, 거기서 함께 신학을 공부할 수도 있다는 뜻밖의 사실을 듣게 되었다.

매우 보수적인 신앙(예장 고신)을 가진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당시 신앙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이른바 ‘낙심자’였다. 1980년 광주항쟁을 바라보면서 이 땅의 교회가 그 참혹한 현실 앞에서 ‘최소한’ 조종(弔鐘)마저 울리지 않고 학살자를 찬양하는 모습에 ‘단호히’ 출석을 거부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금까지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 아버지가 장로로 시무하는 교회에 도저히 함께 예배할 수가 없었다.

▲ 1983년1학기 퇴수회 일정표 1. ⓒ한기양 목사 제공

1981년 가을 즈음으로 기억되는데, 이미 그때부터 『기독교사상』, 『신학사상』 등을 서점에서 찾아 구독하면서 신앙적인 정체성을 찾으려고 혼자 학습하고 있었다.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신학생들(김광훈, 이춘섭, 정상시 등)에 대한 의문과 함께 [한국신학대학]과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나를 이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그때부터 김재준, 문익환, 안병무, 서남동, 박형규 등의 존함들로 연상되는 또 다른 한국교회가 나의 신앙적 좌표를 설정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책 속이나 지면을 통해서나마 접했던 막연한 ‘신학’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서게 만든 계기가 바로 그 만남이었다. 이때 많은 도움을 준 후배가 최윤하 준목(주님의교회), 정현진 목사(수도교회) 등이다. 괜히 마음이 바빠지면서 공장 활동을 서둘러 정리하고 [선교교육원]에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신의 한 수

실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엄혹한 시기여서 혹시 정보기관에서 ‘프락치’를 심지는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염려 때문에 신분이 확실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보증은 확실한 인후보증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한신대 제적생은 이미 분명한 입학자격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타 대학‧타 교단 출신이었던 나는 분명한 보증이 필요했다. 마침 장영달(전주 우석대 총장) 선배와 박종원(김광훈 목사 사모) 선배의 보증으로 당시 위촉생 회장을 맡고 있던 서철용 선배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서남동 원장님을 찾아뵙고 입학 지원의 뜻을 확인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선교교육원에서 당초 정원으로 5명 정도 선발할 예정이었는데, 무려 10명이 지원한 것이었다. 스승님께서 난색을 표하시며 “이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발할 것인가?”, “학생자치회에서 자체적으로 선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나아가 학생자치회에서도 “우리가 어떻게 이들을 판단하여 합격, 불합격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지원자 10명을 조그만 사무실에 가두다시피 하고, “스스로 5명을 뽑으라”는 것이었다.

잠시 동안 황당해 하면서 초면인 우리 지원자 10명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침묵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정해동(명지병원 원목)이 자진해서 “내가 포기할 테니 나에게 선발권을 달라”고 말해서 모두 동의했다. 그가 사회를 보면서 각자 자기소개와 지원동기를 말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먼저 조직에서 추천받아 온 사람들에게 우선권을 주자고 했다. 그때는 언제나 ‘조직’이 중요하게 여기던 때라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로 선발기준을 택한 것이었다. 마침 기청의 추천으로 온 사람이 대구 박종덕, 전주 김명희, 서울 김형기 이렇게 5명 중 3명이 선발되었다. 이제 단 2명을 뽑아야 할 상황에서 학번순으로 뽑게 됨으로써 나와 유종일(KAIST 교수), 이렇게 1시간 여에 걸쳐 5명을 선발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스승님께서 고맙고, 미안하고, 기특해서 우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총회 총무님과 상의하시고 한 달 뒤 나머지 5명에게도 입학을 허가하여 결국 지원자 모두 합격하게 되었다. 이렇게 자율적이고 서로 존중하는 결정과정을 통해 함께하는 이 에피소드로 인해 우리 스스로도 자긍심이 크게 고양되기도 했다.

배움을 만드는 사람들

그렇게 시작된 선교교육원 신학수업은 또 다른 결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촉생과정의 커리큘럼은 이러했다. 한신대 제적생의 경우는 남은 학기를 채우면 되지만, 일반대학 제적생의 경우는 제적 이전에 일반학과에서 이수한 학점은 교양과정으로 인정하고 5학기를 이수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위촉생마다 제각각 이수해야 할 필수과목이 달라서 졸업을 앞둔 학생의 경우를 우선 수강신청을 하면서 결정해야 함은 물론이고, 교수님들에게도 강의청탁을 직접 해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강의해 주실 교수님도 일일이 찾아다녀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해직되신 교수님들께서 기꺼이 재능기부 하시듯 기쁜 마음으로 가르쳐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짐작하건대 원장님 입장에서는 빠듯한 예산, 혹은 쥐꼬리만한 예산에 강의청탁을 하시기가 민망하고 미안했던 것 같았다. 가깝게 지내던 교수님들은 직접 청탁하셨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영희 교수님에게 강의 청탁하시기 곤란해 하셨다. 이에 내가 이 교수님을 뵙고 모셔보겠다고 자신 있게 나섰다. 이영희 교수님과의 인연이 남달랐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 1983년1학기 퇴수회 일정표 2. ⓒ한기양 목사 제공

여기서 이야기를 다시 1980년 5월 초순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때 [학보사] 기자였던 나는 이영희 교수님의 글을 싣고 싶어서 원고청탁 하러 교수님 집주소를 알아내고 화양동 댁으로 직접 찾아갔지만, 언감생심 만날 수 없음은 물론이요, “절대 원고는 쓸 수 없다”고, 가석방 중이어서 “절대 외부활동을 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제발 다시는 오지 말라”며 거절했다. 철없이 용감했던 당시 나는 서너 차례 더 찾아갔고 갈 때마다 대문 앞에서 응대할 때까지 기다리며 떼를 썼다.

그날도 두어 시간 대문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데, 아드님 되는 분이 “집에 안 계시고 근처 식당에 친구 분을 만나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냉큼 그 식당을 찾아가 식탁 모서리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렸다. 한참 지난 후 술잔을 건네시며 “원고는 쓸 수 없고 대담 형식으로 하면 되겠냐”고 타협안을 먼저 내놓으셨다. 끈질김에 항복했다는 거다. 실은 기특하게 여기신 거다. 물론 그 대담 원고는 이내 닥친 5‧18광주항쟁으로 인해 끝내 학보에 싣지 못하고 말았지만…

아무튼 그런 인연으로 만 3년이 지난 뒤 다시 청탁하러 간 셈이다. 단박에 알아보시고 빛의 속도로 수락하셔서 강의를 맡아주었다. 하여 1983년 1학기 강사진은 서남동, 진연섭, 김용복, 박현채, 한승헌, 이영희 교수님으로 확정되었다. 강의는 월요일과 화요일 각각 오전10시부터 오후8시까지 2시간씩 3교시로 진행되고, 월요일 밤에는 기숙사에 1박 하면서 ‘현장신학’이란 과목으로 월 1회 특강 강사를 초청하여 진행하는 커리큘럼이었다.

스승님은 우리 스스로 참여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진짜 ‘대학다운 대학’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야말로 ‘자유대학’이었다.

성서와 현장,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선교교육원]에서의 신학여정은 나에게는 너무 새롭고 생동감 넘치는 생활이었다. 또 다른 ‘주경야독(晝耕夜讀)’이랄까. 낮에는 겉으로 생업(월간 『마당』지 기자)에 열중하는 한편 이면으로 사회운동에도 간여하면서, 주 2일은 공부하는 생활이었다. 1980년대 나의 이력서를 쓴다면, 세 종류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생업 중심으로 하는 이력, 사회운동에 관여한 이력, 그리고 공부와 더불어 교회 섬김의 이력으로 나눠서 쓸 수 있다. 이른바 ‘멀티 플레이어’였다.

그때 나는 이 땅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은, 첫째 성경과 교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것, 둘째 먹고살기에 분주한 서민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셋째 이 땅의 정치경제적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회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야 정말 우리시대의 신학도라 생각했다. 스승님께서도 ‘오늘의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사회학, 정치경제학, 역사 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성서를 읽어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신학의 눈을 열어주신 스승님의 강의시간이 1983년 1학기의 경우, 화요일 2교시(오후2시~4시)여서 졸리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나를 비롯한 우리는 몰입했다. 2시간을 꽉 채운 강의를 듣고 나면 뿌듯했다. 특히 신학에 대한 갈증으로 찾은 나는 맨 앞자리에서 모든 시간을 개근하며 열심히 공부했던 것이 기억난다. 지병으로 우울한 때였지만 교육원에서의 수학시절만큼은 찬란했고 생동감이 넘쳤다.

성경만 열심히 읽어왔던 문자주의에 사로잡혀 엉거주춤해 있던 나는 스승님의 ‘십자가—부활의 현장화—구체화’라는 주제의 강의를 들으면서 신앙의 눈이 확 열리는 느낌이었다. 이미 사회과학 서적들을 탐독하고 노동운동 현장에서 이념적 이론에 익숙한 터여서 ‘민중신학’ 강의는 정말로 ‘복음’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노트를 펼쳐보면 빼곡하게 기록해 놓은 것을 새삼스레 스스로 기특해하며 읽을 수 있다.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비유(막11:12~14)로 강의는 시작된다. ‘성전숙청’의 길이었던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있었던 일이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다름 아닌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저주다. 열매가 없는 허식만의 종교, 민중을 착취하는 지배기구의 본산인 성전에 대한 저주다. 오늘날 우리들의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신학도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것은 아닐까?”(미주 1)

“예수의 부활은 살해된 예수의 부활이다. 부활은 살해된 자의 항변이며 그 한풀이며 침해된 신의 공의의 회복이다. 한이란 억울하게 죽은(죽임을 당한) 자의 혼이며 그 호소다. 특히 불법적으로 살해된 데도 그 죽음이 법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가장되고, 반면에 진실과 사실의 정당한 해명과 항의가 금지 억압 묵살된 데서 생기는 억압된 감정이다. 그것이 한이다. 은폐된 진실, 억압된 정의, 살해된 생명이 한으로 남아서, — 그 혼백이 성수(星宿)의 저 세상으로 가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이 세상에 남아서 유령과 같이, 유언비어와 같이 관계된 자들 사이에 떠돌아다니는 것이 한이다. 죽임의 부정, 은폐된 사실의 나타남, 진리와 생명의 승리 — 이것이 부활이다. 부활은 한풀이다.”(미주 2) 그리고 민중의 ‘들고일어남’이었던 4‧19를 예수의 부활에 연결한다.

“위대한 4‧19를 우리가 기념합니다만, 오늘날 와가지고 4‧19의 공헌과 실패를 늘 논합니다. 왜 실패했다고 보느냐? 그것은 민중의 운동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담당한 민중에 기반을 두고 새 역사의 정권이 서야 되는데, 민중에 뿌리를 박은 정권이 서가지고 지도를 해야 되는데, 군인한테 줘버렸거든. 번번이 민중세력이 일어나가지고 역사를 개혁하는 일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역사의 새 장을, 그것이 주동이 돼가지고 새 역사를 열지 않으면 또 실패합니다. 어차피 우리가 성공한다고 그래서 천당 만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한 발짝씩 한 발짝씩 민중이 주인이 되는 역사를 개척해 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정치하는 사람이 그 민중에 뿌리를 박고 그들을 대변하고 그들에 봉사하는 정치가가 나와야 됩니다. 다른 세력, 정당세력 말고 민중에 뿌리박고 민중에 호응하면서 민중을 섬기는 그런 지도자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우리 역사의 한 발자국 전진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민중에 대한 역사적인 과업이 지대하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립니다.”(미주 3)

강의 과목을 [민중신학]이라 명명하신 스승님은 또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현장신학]이란 과목이었다. 월 1회 특강 형식으로 모두 1박 하면서 현장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을 강사로 모셨다. 민중신학은 반드시 현장신학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받은 새로운 충격을 ‘민중의 신학’으로 극단화(radicalize)하고 있다. 나는 이 신학의 미래를 남미신학이나 흑인신학에 못하지 않은 또 하나의 ‘현장의 신학’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어떤 신학보다도 한국교회의 삶에 그 호흡과 음정(音程)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미주 4)

당시 우리들은 매우 분주했고 치열했다. 모두다 각자의 일과 운동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수업에만 집중할 수 없는 형편들이었다. 해서 출석률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었다. 재적 28명 중 평균 출석인원 12~3명 정도였고, 어떤 때는 6~7명만 달랑 출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자랑 같지만 나는 한 시간도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그것도 매번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스승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며 꽤 기특히 여기셨던 같았다.

스승으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길

지금 생각해보면 스승님의 가르침이 네비게이션처럼 나의 목회활동을 이끌어왔던 것 같다. 스승님께서는 1970년대에 이미 생태문제를 신학의 주제로 삼으셨다. 그때는 흘려들었는데 결국 울산에서 목회하면서 ‘환경선교’ 1세대로 운동영역을 개척하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었다.

“지난 몇 해 동안, 그리고 지금도 지구 인류의 생태학적 위기에 관해서 말해 왔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세계적으로 인구문제 식량문제 천연자원 그 중에도 에너지문제 등, 그리고 핵무기, 생명과학의 발전도 있고 해서 지구에 묵시록적 종말이 더욱 역력하게 다가올 것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를 공동으로 타개해보자는 여러 가지의 세계적 국제적인 모임은 지금까지 성공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정치적 경제적 국제정의가 선결되지 아니한다면, 십년 후에 지구상에서 전 인류가 멸절한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나라 눌린 나라들은 협력보다는 오히려 공동의 멸망을 취할 것이다. 이것이 비극적인 전망이다. 국내적으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정의와 인권이 회복되지 아니하면, 집권자는 국가의 인구 식량 에너지의 절박한 파국적인 위기 앞에서 절망적인 낭비, 정치와 자금의 낭비로 이 위기를 보낼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를 말하는 것은 국가를 위한 전략으로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미주 5)

1984년 1학기 때였던 것 같다. 강의하시다가 문득 “지금 민중교회들을 개척하고 있는데, 특별한 교회로 생각하지 말고 평범한 개척교회처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면서 민중교회운동이 기구 중심의 기독교운동을 교회중심으로 하고자 하는 시도는 좋지만, 프로그램 위주이거나 특수한 목회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는 거였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때 강의를 듣고 있던 학생들이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즈음 선생님께서는 손수 달동네를 찾으시면서 ‘빈민신학’을 말씀하셨다. 신학논문에 무슨 통계표가 등장하고 생활보호대상자에 관한 자료들이 나열됐다. ‘빈곤의 사회학’과 ‘빈민의 신학’이 중요한 연구주제로 삼고 계셨다. 결국 그것이 스승님의 신학연구의 ‘오픈 엔드’(open end, 열려진 끝)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변적 빈곤’을 보고 또 그러한 설정에 대해서 민감하면 단지 시혜와 자선사업만으로는, 필요한 연대와 치유의 길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연장‧심화시킬 우려마저 있다. 새로운 처방이 요구된다. 새로운 방식의 연대가 있어야 하겠다. 어떤 사람은 ‘주변적 빈곤’ 곧 ‘종속’을 극복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자력갱생의 정치학’을 말하고(오슬로대학교, 요한 칼통), 또 어떤 사람은 ‘존재의 혁명’을 말한다(칠레대학교, 거스타보 라고스). 거의 같은 내용이 되겠지만 필자는 주변적 빈곤의 극복 이데올로기로서 성서적 상징인 ‘메시아 정치’ ‘메시아 왕국’을 그려본다. 이것이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었다. 예수운동에 참여하는 현대인들은, 전통적인 시혜방식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메시아 정치’의 실현을 위한 이데올로기와 프락시스를 다짐해야 할 것이다.”(미주 6)

스승님은 내가 민중교회를 개척하면 제일 먼저 오셔서 축하해 주시기로 했었다. 결혼주례도 서 주시고 좋은 일 있을 때마다 모셔서 평가도 받고 싶었고, 힘들 때면 찾아뵙고 힘이 되는 위로와 격려도 받고 싶은 그런 스승님이셨다. 그런데 스승님은 [선교교육원] 졸업장에 원장님 존함마저 새기지 못하고 바삐 떠나셨다. 천애고아가 된 심정이었다. 실제로 목회하면서 고아와 같은 신세를 자주 느꼈었다. 아버지 같으신 스승님은 1984년 여름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 혼수상태로 누워계시는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1980년 5‧18광주항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나는 신앙적으로 눈이 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선교교육원]에서의 스승님 가르침은 내 인생의 항로를 설정하는 매우 소중하고 결정적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고우신 스승님에 대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가장 적합한 글을 인용하며 ‘신학의 현장화’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장공 김재준 목사가 지어준 서남동 목사의 아호를 왜 ‘죽재(竹齋)’라고 했는지 말하고 있다. “그의 용모와 뜻이 맑고 깨끗하며, 그의 지조와 마음은 곧고 비어 있도다. 그의 학문은 넓고 사귀임은 공경할 만하도다. 고난을 당하되 태연하고 안정하여 학문에 힘쓰니 널리 그의 풍문이 들리도다. 이에 그의 덕을 기리어 84세 장공이 호를 지어 들어내노니 ‘竹齋’이라.” 장공은 서남동 교수를 생각할 때마다 대나무가 늘 연상되어 죽재라고 했노라 말씀하셨다. 진실로 서남동 선생의 품격과 지조와 학문의 성격을 한마디의 말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미주 7)

▲ 1983년1학기 퇴수회 일정표 3. ⓒ한기양 목사 제공

미주

(미주 1) 서남동. 「십자가—부활의 현장화—구체화」. 1983.3.29. 민중신학 강의.
(미주 2) 위와 같음.
(미주 3) 서남동, “민중(씨ᄋᆞᆯ)은 누구인가”(1977). 『한국민중론』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4), 554~555.
(미주 4) 서남동, 『전환시대의 신학』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76), 9.
(미주 5) 서남동, “예수‧교회사‧한국교회”(1975), 『한국역사 속의 기독교』 (서울: NCCK, 1985), 69.
(미주 6) 서남동, “빈곤의 사회학과 빈민의 신학”(1983), 『한국 민중신학의 전개』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3), 228.
(미주 7) 김경재, 『전환기의 민중신학 -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논문집』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7.

한기양  ecohan21@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충정로 2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생명의집 204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8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