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정의는 법을 넘어서 있다 - 로마서의 정치적 독해

본 책은 필자가 읽은 테드 W. 제닝스의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은 바울 사상을 데리다의 시각에서 풀어 낸 『데리다를 읽다/바울을 생각하다』였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잇대어 최근 바울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는바 이들 두 책도 이에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무법적 정의(Outlaw Justice) - 바울의 메시아 정치』가 앞의 책과 다른 점은 바울의 로마서를 저자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새롭게 풀었다는 사실이다. 로마서를 정치 신학적으로 풀어낸 일종의 주석서라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정도다. 본 책을 위해 저자는 데리다를 비롯하여 벤야민, 아감벤 그리고 바디우 등, 우리 시대의 정치 사상가들의 시각을 철저하게 빌려왔다.

바디우의 경우는 조금 다를 것이나 이들 모두는 바울을 유대 메시아주의 시각에서 전혀 달리 읽었던 학자들이다. 종교개혁자들의 바울 이해와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처럼 종교개혁자 루터의 시각에서 자유로울 때 로마서가 복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한마디로 바울을 메시아주의에 근거한 유대 사상가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바디우는 이런 메시아적 사건에 충실한 새로운 주체를 기독교적 주체라 불렀다. 유대적 메시아주의를 좀 더 보편화 시킨 결과라 하겠다. 여하튼 본 책을 통해 저자는 로마서가 칭의(稱義)에 초점을 맞춘 개인의 책이 아니라 세상을 전복시키는 위험하고 불온한 정치서적임을 적시했다. 로마제국 시대에 전달된 바울 서신이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그 뜻이 옳게 전해지기를 바라서 쓰여 진 귀한 책이다.

말했듯이 저자는 로마서가 지난 2천년 동안, 특히 종교개혁 시기 이후 아주 협소한 책이 되었다고 탄식한다. 세상을 위한 책이 아니라 교회의 책이 되었고 체제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구원을 위한 것으로 축소,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로마서를 새롭게 읽기 위해 저자는 칭의(의로움)를 정의로 대치하고 그리스도가 아니라 메시아를, 믿음(faith)대신 충실함(fidelity)을 그리고 예수대신 여호수아로 교체사용 할 것을 요구했다.

종교개혁가들 탓에 로마서가 반(反)유대교적 텍스트로 읽혀진 것에 대한 수정을 요구한 것이다. 로마서를 반유대교적 전통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을 로마서를 옳게 독해하는 첩경이라 여겼다. 로마제국에 대한 바울의 비판이 선명하게 들어날 수 있는 까닭이다.

이점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과 철저하게 일치되는 관점이다. 한마디로 로마서는 당시 사회의 무질서, 부정의에 대한 하느님의 기소장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는 여전히 우리 시대에 대한 고발장으로 읽혀져야 마땅하다. 정의를 추구하는 텍스트로서 목하 세상을 뒤집는 힘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 책은 로마서 전체 독해를 위한 핵심으로 다음 구절을 제시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유대사람에게는 유대사람을 얻으려고 유대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율법아래 잇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율법 밖의 사람들을 얻고자 율법 밖의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사람에게, 나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어떻게든 그들 중 몇 사람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고전 9:19-23).

본 책 본론의 첫 시작은 로마서 서론에 해당되는 1장 첫 절부터 17절까지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우선 이 편지의 수신자는 2천 년 전 로마에 거주한 바울의 지인들이다. 로마시대의 다차원적 정황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전달자인 바울의 뜻이 오늘 우리에게 왜곡된 채 풀어졌다.

첫 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종(노예)이라 했고 이름도 사울 아닌 바울로 명시하였다. 주지하듯 바울이란 ‘가장 작다’, ‘하찮다’란 뜻을 지녔다. 사울을 배출한 벤야민 지파 소속의 귀족 사울이 ‘하찮은’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 사울이 기독교인 바울로 변했다는 기존 해석과는 크게 다르다. 더구나 바울은 자신을 노예라 칭했다. 향후 그가 전할 메시아가 특권과 힘을 거부한 종의 형상을 지녔음을 예시한 것이겠다. 한마디로 바울은 자신을 메시아의 종(노예)라 불렀다.

이것은 제국(로마) 하에서 일체의 비천한 자들과의 자기 동일시를 뜻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소명(Calling)을 받은 사도된 의미였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은 정치적 용어가 된다. 노예로 홀대, 치부된 이들에게 좋은 소식인 까닭이다. 제국과는 이질적인 생각을 담았던 탓이다. 이런 선포, 곧 메시아적 사명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다.

유대의 법이든, 제국의 법으로는 결코 하느님 정의를 실현시킬 수 없다. 세상 내 어떤 시도로도 하느님 정의를 이룰 수 없었다. 이점에서 바울의 메시아 선포를 수용 했던 로마의 지인들은 실상 메시아 운동의 조직원들이라 말해도 좋겠다. 제국 안에서 그와 다른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까닭이다. 메시아를 처형한 주체세력으로서 제국 로마에 이질적인 메시아 사상을 뿌리내리고자 했다. 그렇기에 바울에게 복음은 모두에게 자랑할 것이었다.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는 약하고 힘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예수가 하느님 뜻(메시아 사상)에 죽기까지 충실했듯이 우리들도 예수, 곧 하느님 정의에 대해 충실해질 때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하느님의 정의는 그에 대한 충성(성실)함으로만 이뤄 질 수 있다고 했다. 이 일을 감당하는 자가 의로운 이들이고 구원받은 사람이란 것이 로마서 서문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이어진 장에서 저자는 ‘부정의 한 사회질서’란 제목으로 로마서 3장 20절까지를 다뤘다. 바울은 정의가 어떻게 세상 속에서 실패했는가를 상세히 밝혔다. 무엇보다 당시 세계를 제패한 그리스-로마제국을 고발했고 모세율법에 기초한 유대적 정치체(體) 역시 부정의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한마디로 세상에 대한 총체적인 부정이었다. 이방인들의 부정의를 먼저 고발했다. 제국이 하느님 의(義)를 선포한 메시아를 처형했던 탓이다. 메시아의 죽음은 로마법에 따른 것이었다. 이 경우 법은 세상법(法)을 총칭한다. 이로써 법에 의한 정의는 거짓이 되고 말았다.

사회적으로 광기(狂氣)가 발현된 것이 그 실상일 것이다. 수치스런 열정이 삶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유교식으로는 천명(天命)의 상실, 소멸의 결과이겠다. 상부계층의 도착적 성윤리가 사회적 광기의 한 모습으로 적시되었다. 이로써 바울은 정의를 위해 법을 넘어선 어떤 다른 기초를 제공하고자 했던 바, 그것이 바로 신적인 정의였다.

하지만 율법에 의존한 유대의 정치 체(體) 역시 이방인의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유대인 역시 정의 위반이 다반사였던 탓이다. 유대인의 경우도 율법의 소유가 아니라 그 실행이 중요했다. 예컨대 할례가 중요한 이유는 그 정신 탓인데, 이들은 그 정신을 잃어 버렸다. 할례의식보다 정의가 중요하다는 것이 율법의 본뜻이다.

정의로운 이방인들이 오히려 할례 받은(부정의한) 유대인들을 심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비(非)기독교인이 세례 받은 기독교인보다 구원에 더 근접할 수 있겠다. 여하튼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 세계 모두가 신적 심판아래 있다는 것이 로마서의 전제이다. 부언하나 개인의 책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이런 기소장을 제시하는 책이다. 하느님 정의를 선포한 메시아 사상이 그 답으로 제시된다.

이어진 내용은 로마서 5장 21절까지를 분석한 것으로서 ‘메시아적 정의의 도래’란 제목이 붙어있다. 신적 정의 없이는 세상은 심판, 정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장의 내용이었다. 어떤 법도 정의를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정의는 법 밖의 정의, 본 책 제목처럼 ‘무법적 정의’와 동의어가 된다. 법을 초월하는 무법적 정의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다. 세상 법에 따라 의롭지 못한 자들을 의롭다고 불러주는 하느님 정의는 실로 무법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껏 교회 전통이 말해온 칭의(稱義)는 하느님의 무법적 정의의 보편적 실현으로 그 뜻을 치환해야 옳다.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의 특권을 재론한다. 율법 밖의 정의를 선포하는 메시아 전승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금 하느님 정의에 충실했던 예수의 죽음(십자가)으로 나타나 있다. 예수(죽음)에 의해 증거 된 하느님의 정의, 그것이 세상을 구할 복음, 곧 선물인 것이다.

선물로서의 메시아적 정의는 로마와 유대 정치체(體)의 시각에서 볼 때 법 밖의 정의였다. 이런 메시아적 정의가 우리에게 그에 대한 충실함(충성)을 불러일으킨다고 바울은 믿었다. 그 충실함에 의해 법적 부정의로부터의 해방되는 것이 곧 바울의 구원이었던 것이다.

하느님 정의는 세상 법을 해체시키나 동시에 법을 확립하기도 한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 완성을 위해 왔다는 예수 말씀 뜻이 바로 이것이겠다. 법 밖의 환대, 이것이 법을 완성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선물이자 복음이라 부르는 것이다. 제 뜻 버려 하늘 뜻(義) 구한 예수의 충실함을 좆을 때 우리 역시 이런 정의를 생산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중요하다. 주지하듯 아브라함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넘어선 존재인 탓이다. 유대인/이방인, 그리스인/야만인, 로마 시민권/노예의 일체 구별을 뛰어 넘는 근거로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시했다. 전 인류의 보편적 구원을 말할 목적에서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절대 신뢰한 충실한 존재였다. 고향을 떠나라 하면 떠났고, 백세에 아들 얻을 것을 믿었으며 그 자식까지 바쳤던 충실한 사람이었다. 바울에게 이런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정의였다. 이런 충실함을 신(神)이 정의로 여겼다는 말이다.

이런 충실함은 신적 명령이 아니라 신적 약속에 따른 행위였다. 약속만이 충실함(믿음)을 일으킬 수 있다. 예수의 죽음도 이를 닮았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신뢰로서의 약속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는 법 밖의 존재들, 모두에게도 의당 해당된다. 아브라함 역시 할례 받은 자가 아니었던 탓이다. 모든 대립과 구별이 아브라함의 예에서 선행적으로 전복되었다. 이로써 이보다 더한 어떤 보편적 정의가 존재할 여지가 사라졌다. ‘모두를 위해 모두가 되었다’는 바울의 선포 역시 이에 터해 있다.

여기서 핵심은 진노가 아니라 관대함(사랑)이다. 무법적 정의가 그리스-로마 및 유대 체제하의 법적 죄인들 일체를 자유롭게 했던 까닭이다. 이런 관대함은 사실 세상 법에 대한 도발일 것이다.

여기에 메시아 사건의 요체가 있다. 세상 법이 메시아 예수를 처형했으나 그가 다시 부활했기에 법 밖의 존재를 품는 보편적인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될 일이다. 십자가처럼 부활이 정치적 사건일 수밖에 없는 이유라 하겠다.

실상 바울은 메시아적 정의가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음을 선포했다. 메시아 사건의 현재적 의미에 초점을 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아담적인 것과 메시아적인 것을 대별(大別)했다. 법이 지배한 아담의 시대와 달리 메시아 시대는 선물, 곧 하느님 정의가 지배한다고 확신한 것이다. 메시아로 인해 넘쳐나는 은혜(선물), 곧 새로운 보편성을 얻게 되었다는 말이다. 법은 폭력(부정의)을 확산시켰으나 은혜는 이 땅위에 생명(정의)을 생산했다.

본 책 중반부에 이른 지금 로마서 7장 6절까지의 내용을 달리 풀어냈다. 여기서 저자는 아담적 인류와 메시아적 인류를 전후로 다시 대별시켰다. 하느님 정의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확신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저자는 원하는 선은 못 이루고 원치 않는 악만 행한다는 바울의 고백을 먼저 주목했다. 메시아적 정의가 현실적으로 방해받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왜 죽음이 지배하는 아담적인 것으로부터 메시아적인 것으로의 이행에 있어 단절(중단)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물음이겠다. 법이 우리를 자신의 욕망에 복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공포를 조장함으로 지배자인 법은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하지만 神의 운명과 조우한 자는 누구든지 神과 함께 죽은 존재이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법(지배자)의 죽음이 된다. 법이 더 이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탓이다.

죽음을 접한 인간은 그의 부활과도 연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정의한 세계와의 단절을 뜻한다. 메시아의 부활을 통해 아담적 현실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이 더 이상 역할 못하는 현실 말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우리 몸을 정의의 도구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무의식적이라도 제국이 조장하는 죽음과 폭력의 조력자이길 그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메시아의 노예라 했다. 철저하게 메시아의 요구에 충실하길 바라서이다. 폭력과 부정의가 아닌 신적 정의의 편에 서라고 했다. 법은 우리에게 그 삯으로 죽음을 주나 하느님 정의는 우리에게 관대한 사랑(은혜)을 베푸는 까닭이다. 법의 행위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하느님 정의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더 이상 아담적 인류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본장은 로마서 8장 39절까지의 내용으로서 법(法)으로부터 영(靈) 혹은 영적 삶으로의 전환을 주제 삼았다. 하느님 정의가 지배하는 획기적 전환을 적시한 것이다. 지금껏 말했듯이 하느님 정의는 (율)법과 상관없이 도래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죄에 대한 현실주의적 견해를 지속시켰다. 법 위반을 가르치기보다 용서란 이름으로 법적 삶에 알리바이를 제공했다. 불가능한 하느님의 약속을 충실히 믿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메시아적 정의는 부정의한 죄(법)와 공존할 수 없다. 지금껏 법을 거부할 수 없는 질서로 여겼던 기독교가 크게 뉘우칠 부분이다.

여기서 7장 말미에 실린 바울의 실존적 고백이 다시 거론된다. 바울은 자기 의지의 모순성을 자신 속의 죄 탓이라고 보았다. 자신이 아니라 그 속의 죄가 자신을 이율배반적 존재로 만든다고 했다. 그렇다면 메시아적 정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내 밖으로부터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7장 마지막에서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하느님 정의에 무력했던 인간이 지금 메시아적 현실로 내몰린 것이다. 이런 전환이 기쁜 소식이고 감사의 조건이다. 이로써 아담적 인류의 탄식은 끝났다. 법 자체가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인류에게 유죄판결 그 자체가 없어졌다. 오로지 메시아적인 것과의 유대와 연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부활, 곧 생명의 영이 우리를 일체 법으로부터 자유케 한 까닭이다.

메시아 부활이 우리들 부활도 예고했다. 이런 메시아적 현실은 아담적 현실에서만 발생한다. 아담적 현실이 메시아적 정의의 발생 장소란 것이다. 현실을 떠난 메시아 사상은 존재치 않는다. 이후의 삶은 약한 육에 따르지 않고 생명 자체인 영의 지배하에 놓였다. 여기서 영은 하느님 정의의 다른 말이겠다. 영적인 것이 바로 정의인 것이다. 배고픈 자들이 먹고 억울한 이의 눈물이 멈출 때 그곳에 하느님 정의가 있다.

그래서 바울은 ‘마치 –아닌 것처럼(as if not, hos me)’의 삶을 요구했다. 현실 세계 속에서 살면서 ‘마치–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야말로 법을 무력화시킨 메시아적 시간의 현실이다. 세계(제국)속에 살면서도 세계의 구조나 분류에 휩쓸리지 않는 삶의 모습이겠다. 이런 삶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의 양자(養子), 행위주체로서의 상속자가 되는 길일 것이다.

이런 메시아적 현실은 동물의 세계까지 포섭한다. 신음하는 피조물 세계 전체에 하느님 정의를 세울 목적에서다. 이를 위해 인간이 자연(땅)을 환대하며 그와의 연대할 일이다. 모두가 하느님 자녀 되는 희망을 갖고 약자(자연)들의 절규와 신음을 청취하는 것이 메시아적 정의(현실)인 까닭이다.

이어서 로마서 9장부터 11장 끝까지를 다뤘다. 신적인 약속이 어떻게 세상 속에서 이뤄지는 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즉 메시아적 정의가 과연 현실이 될 수 있겠는지를 묻고 답하는 내용이 되겠다. 앞서 보았듯이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울렀고 피조물마저 포함하는 우주 보편적 구원을 메시아적 현실로 보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은 메시아적 약속을 폐기 처분했다. 그렇다면 인간, 곧 유대인의 거부가 하느님 약속의 신실함을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점에서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반(反)유대주의를 극대화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바울은 하느님의 이스라엘 선택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 동족을 향한 바울의 연민이 얼마나 컸는가를 성서가 증언하고 있다. 메시아의 약속은 먼저 유대인에게 좋은 소식이 된다고 바울은 확신했다. 그렇기에 하느님 약속의 신실함은 인간에 의해 좌우될 수 없다. 하느님의 자비가 한없이 큰 탓이다. 지속적 인내로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를 참고 있다. 기독교가 유대인을 정죄하는 것은 그렇기에 잘못된 월권이다.

▲ 이정배(顯藏아카데미)

여기서 ‘남은 자’ 사상이 다시 거론된다. 유대인들 중에서 남은 자들이 그루터기 되어 약속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이런 하느님 정의는 타자(약자)를 향한 신실하고 충성스런 헌신에서 비롯한다. 불가능한 것을 약속으로 믿고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유지할 때 가능할 수 있다. 처형당한 자가 메시아라는 확신도 여기서 핵심이다.

저자는 이를 ‘수행적 진실진술(performative veridiction)’이라 말했다. 여기서는 기독론적 해결이 거부된다. 약속과 구원의 행위 주체는 끝까지 하느님이며 그리스도는 그에 대한 순종과 충실함의 구체적 사례로 간주된다. 유대주의적 바울 이해를 통해 예수를 바라 본 결과일 것이다. 유대인에 이어 이방인들 구원 역시 당연히 가능해졌다. 유대인들 중 남은 자들이 이방인의 구원을 도왔던 탓이다. 이 모두는 신적 관대함이 지배하는 메시아적 시간, 곧 지금 일어나고 있다.

저자는 이를 하느님의 즉흥 연주라 일컬었다. 이 연주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이 은인이 되었다. 유대인들 탓에 본래 이방인이었던 기독교인들 역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하느님 정의로 불려 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되어야 옳다. 유대인을 정죄하는 기존의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일체를 배제하는 기독교보다 가난한 자를 편드는 뭇 세속이념이 오히려 메시아 사유와 가깝다.

하지만 최근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폭력은 유대인 중심의 메시아적 사유를 무력하게 만든다. 메시아 사상을 민족적인 시오니즘으로 전락시킨 결과일 것이다. 역사란 처음이 있어 마지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이 있어 처음이 있다는 말을 오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으면 좋겠다.

본론 마지막 장에서는 로마서 12장부터 15장 중반부까지를 다루는 바, 앞 장에 이어 메시아 시간에 펼쳐지는 하느님 정의의 실상을 명시했다. 주지하듯 메시아 시간은 미래의 시점이 아니라 지금여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도래하는 하느님 정의는 제도 밖, 체제 밖의 사유로서 지금 여기를 달리 만든다. 법 역시도 역사 속에서 정의를 실현시키는 수단이겠으나 바울은 이들의 실패를 적시했었다. 신적 정의인 메시아를 처형했던 까닭이다.

그렇기에 법을 대신한 메시아적 기획이 역사 속에 임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한 부활은 불가능한 것의 실현을 뜻한다. 그것은 하느님 정의인 선물로서의 호의, 관대 등이다. 이것은 아담적 인류와는 전혀 다른 삶의 양식이다. 이 시대의 삶의 양식인 자본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겠다.

로마서 12장에 이르러 바울은 메시아적 정의가 실현되는 역사적 현실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지금이 바로 메시아적 시간이란 것이다. 하느님 정의가 법과 상관없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에 대한 관심이었다. 12장 첫머리의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이를 적시한다.

여기서 몸을 제물 삼는 것이 메시아 정치의 핵심이다. 몸은 세계에 속한 것으로 상호 고통과 만족을 주고받는 방식을 뜻한다. 이런 몸이 정의의 도구가 되길 요구한 것이다. 저자는 몸을 ‘복수의 단독 존재(being slngular plural)’라고 풀었다. 타자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만 존재하나 그 영향 사(史) 속에서도 독특하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을 예배하는 것은 상호 주고 받는 몸의 방식을 정의롭게 하는 일이다. 약자들과 연대하는 삶, 그것이 하느님이 만족할 제물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 세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했다. 법, 곧 죽음의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메시아적 삶에 충실하란 말이겠다.

새로운 질서는 다양성을 공동체 안에서 구체화시키고자 했다. 각자가 온전한 전체에 필요한 부분인 탓이다. 전체와 개체의 상호 귀속성을 말하는 ‘씨ᄋᆞᆯ’ 사상과 유사하다. 자기 충족적인 개인은 존재치 않는다. 각각의 인간은 다른 선물을 지닌 개체일 뿐이다.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는 것도 메시아적 시간 속의 삶이다. 신적 정의는 끝까지 사랑과 평화를 선호한다. 함께 울고, 함께 웃으라 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산상수훈보다 진일보 된 생각이라 평했다. 국가 권위에 복종하라는 13장에 대한 해명도 동일하다. 제국적 체제를 부정했던 기존 시각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국가제도의 힘을 빼앗는 다른 방식을 제시했다. ‘마치—아닌 것처럼’의 삶이 그것이다. 국가 자체를 전면 부정하기보다 그를 무력화시키는 삶의 방식을 환기시켰다. 특별한 존재(권력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을 보이는 방식으로 권위 자체(권위 이데올로기)를 붕괴시킬 수 있는 탓이다.

이어서 로마서는 ‘사랑의 빚 이외는 빚지지 말 것’을 말한다. 여기서 세상적 차원의 부채(debt)는 소멸된다. 법이후의 삶의 양식인 것이다. 이웃의 곤경을 무시하고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일은 결코 가능치 않다. 이점에서 메시아사상은 가장 급진적이면서 보편적인 인본주의라 말해도 좋겠다. 메시아적 사회 체(體)는 차이를 환대하는 ‘Cosmopolitanism’ 를 요청하는 까닭이다.

이제 본 책 『무법적 정의』의 종결부분에 이르렀다. 당연히 로마서 마지막(16장)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다시 각인시켰다. 로마의 지인들이 메시아적 정치를 시행에 옮기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메시아 시간이 지금 도래했다고 믿은 탓이다.

바울은 메시아적 사회 체(體)가 생성되면 될수록 제국의 멸망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은 로마 이외의 지역에서도 신적 정의(약속)에 충실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 것이라 선포한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시간이 촉박하다고 여길 정도로 말이다.

로마서 끝 장에서 바울은 로마 공동체 속에서 메시아적 사회 체(體)의 흔적을 발견, 적시했다. 그간 주목되지 않았으나 인사 차 언급되는 수많은 사람들, 공동체 구성원들의 면모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제국에서 사람취급 못 받던 푀베를 비롯한 여성들 다수가 언급되었고 노예 신분이었으나 해방된 사람들이 이었으며,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어울렸다. 이 뿐 아니라 공동체에 물적 토대를 제공한 부유한 사람, 집을 제공한 집주인 등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었다.

메시아 공동체 안에서 남녀, 빈부, 신분 및 민족 차(差)가 전적으로 사라졌음을 보여 주었다. 메시아 공동체 안에서는 종종 사람 잡았던 ‘문화적 정체성’이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디우은 여기서 바울 사역의 평등주의적 성격을 보았다. 바울을 탈(脫)유대교적 맥락에서 읽는 것도 이점에서 수정되어야 옳다.

10.

이렇듯 로마서는 기존 사회질서를 뒤집는 텍스트이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종교적 개인을 위한 책으로 오도 되었으나 본래 로마서는 메시아적 정의를 요구하는 정치적 텍스트였다. 한 때 니체는 약함을 힘으로 바꾼 바울의 도착을 비판했으나 여기서 약함은 환대인바, 역사 속에서 이루지 못한 메시아 정치의 본질이자 핵심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나면서 개신교의 ‘以信稱義’가 중세기의 면죄부보다 더욱 타락했다는 말이 회자된다. 천민(賤民) 자본주의를 부추기고 유지하는 하부구조의 역할을 하고 있는 탓이다. 이점에서 본 책 『무법적 정의』가 기독교 신학과 교회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참으로 크다. 세월호 以後의 기독교 신학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얻을 자양분이 작지 않다. 경쟁력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신자유주의의 세상에서 값싼 임금에 팔리는 노동자들, 이주 노동자, 세상 곳곳의 난민들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행위, 곧 예배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텍스트 속 유대인과 오늘의 이스라엘은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 본 책이 먼저 현실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의미로 다가가야 설득력을 지닐 것이다. 메시아적 유대주의에 대한 과한 평가는 위험하다. 더구나 메시아주의가 일체 자연신학의 부정을 뜻하는 바르트 계시신학을 후견할 때 메시아 정치신학은 보편주의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아시아적 종교문화와의 접촉과 연결을 유대적 메시아주의에게 요구하고 싶다.

이정배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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