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그리스도인은 오타구?(마태복음 5:13-15)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는 사람들
이성훈 | 승인 2018.06.17 22:00

저희 가정은 가끔 가족 여행으로 일본 도쿄에 갑니다. 보통 다른 분들과 일본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도쿄 말고 일본의 다른 지역에도 다녀보라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하지만 저희 가족이 도쿄에 가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아키하바라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도쿄의 아키하바라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본래 전자상점가로 시작된 곳입니다. 우리나라의 용산 전자상가와 같은 곳입니다. 하지만 전자상가가 발달되다보니까 게임도 함께 취급하게 되었고, 일본은 게임에 대한 부차산업이 발달된 곳이어서 게임과 관련된 다양한 상품들이 함께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일본 애니메이션 문화와 연결되어서 애니메이션 관련 상품들까지 그곳에서 팔리게 됩니다. 지금의 아키하바라는 전자상점가라기보다는 애니메이션 관련 상품, 캐릭터 관련 상품을 파는 지역이 되어 있습니다.

오타쿠 문화와 하나님

저는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아이도 어느 정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기 때문에 관련된 상품을 구경하고 때로는 구입하기 위해서 아키하바라에 자주 가게 됩니다. 얼마 전에도 일본에 가서 아키하바라에 갔는데, 한참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본은 특이한 나라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상품으로 만들고, 그런 상품을 파는 하나의 특화된 지역까지 만들어 내는 특이한 나라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아키하바라역에서 했는데, 한국말로 했으니까 다행이지, 그쪽에 있던 오타쿠들이 알아듣게 이야기했으면 큰일 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뭔가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생명체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 앞에서는 이런 캐릭터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실제로 일본 오타쿠 중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결혼하고 혼인신고를 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 배경에는 ‘하츠네 미쿠(初音ミク)’라는 일본 보컬로이드가 있었습니다.

ⓒGetty Image

‘하츠네 미쿠’는 보컬 음성 합성 프로그램인 야마하의 Vocaloid로 만들어진 소프트웨어이면서 이미지 캐릭터입니다. 흔하지 않은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에 뭐라고 쉽게 설명드리긴 어렵습니다만, 내가 원하는 대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소프트웨어입니다. 처음 이 소프트웨어가 발매되었을 때에는 당연히 망할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오히려 일본 내에서 엄청난 흥행을 일으킵니다.

더욱이 이 소프트웨어, 특히 하츠네 미쿠라는 캐릭터 자체에 빠진 사람들이 생겨나고 이 캐릭터를 이용한 게임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급기야 VR을 이용한 라이브 콘서트까지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파돌리기송’으로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 중에서는 저 라이브 콘서트와 저기를 돈 주고 가서 보고 있는 사람들 자체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목소리 소프트웨어이면서 그저 케이스 겉면에 그려진 그림일 뿐인 이것이 하나의 존재가 되고 그 존재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제 아내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큰일 날 소리를 한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한 가지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오타쿠라 불리는 이들의 모습, 화면 상에서는 볼 수 있지만 실제로 보이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어떠한 캐릭터를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돈을 투자하고, 그것을 향해서 애정을 쏟고 있는 오타쿠들의 모습과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의 모습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타쿠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상품을 구매하는 마음가짐은 대게 이렇습니다. 그 캐릭터를 자신의 방에 두기 위해서, 그 캐릭터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기 위해서 캐릭터의 상품을 구매합니다. 또한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투자하고 더 많은 노력을 들여서 그 캐릭터에 대한 사랑을 표출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많은 기독교인들은 집에 십자가를 사서 걸어두고, 때로 성경 문구가 적힌 액자를 사서 걸어둡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집을 방문한 사람에게 내가 기독교인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토속 신앙처럼 집에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기 위해서입니까? 보통의 경우 그런 행동, 십자가나 성구를 내 집에 장식함으로써 내 신앙을 하나님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이나 특정 캐릭터 상품들과 교회에 관련된 수많은 상품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 저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기독교백화점에 가보면 교회와 관련된 수많은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캐릭터화 시켜 놓은 상품들도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아키하바라에 있는 캐릭터 피규어 상점들과 기독교백화점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에 대해서 목적성이나 피상적인 차이점은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 차이점을 저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둘은 동일하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결국 일본의 오타쿠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오타쿠일 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오타쿠적인 행태들,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를 그저 사랑하면서 그 캐릭터에 자신의 열정을 쏟고 있는 행태와 동일하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저 사랑하면서 하나님에 관련된 상품들을 소모하고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에 많이 들어보셨던 이야기일 듯 합니다만, 많은 분들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십자가에 빗대어 설명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허점이 많이 보여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비유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전통적으로 많이 들어오셨던 이야기이기에 쉽게 이해하시리라 생각해서 이 이야기를 드립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라고 합니다.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은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을 십자가의 세로 축이라고 빗대어 말합니다. 오타쿠들이 어떤 캐릭터와 맺고 있는 관계도 이런 수직적인 관계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없고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만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까지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가로 축이라고 우리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비유 자체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간의 수평적 관계 또한 가져야 합니다. 대부분 성경은 우리의 행동을 수직적 관계에 집중하기보다 수평적 관계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과의 관계인 수직적 관계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하나님에게 쏟고, 행위는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연결되어서 이루어집니다.

즉 오타쿠들은 어떤 캐릭터에 대한 사랑과 애정, 그 둘의 관계밖에는 갖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혼자서도 충분히 캐릭터를 사랑할 수 있고, 자기만의 방에 빠져 살 수도 있습니다. ‘히키코모리’(ひきこもり, 방구석폐인)가 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 안에서 자신이 애정하는 캐릭터와 수직적 관계만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기독교인은 혼자서 올바른 신앙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가 있어야 바른 신앙을 할 수 있습니다. 아파하는 이들, 슬퍼하는 이들을 안아주고, 어려워하는 이들을 도와주며,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할 때에 우리의 신앙이 완성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들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라고 오늘 본문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소금과 빛의 역할

무언가 결론을 먼저 이야기드린 듯 싶지만 이제 성경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희가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너무나 잘 아는 말씀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성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조금만 더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이 둘을 항상 붙여서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좋은 역할을 한다.’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둘은 하는 역할이 다릅니다.

우선 소금은 기본적으로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원어를 보면,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소금을 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맛을 잃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는 ‘포라이노(μωραίνω)’인데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용될 때에는 ‘어리석어지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멍청해진다는 뜻입니다.

소금이 멍청해질 수는 없기에 맛을 내지 못한다는 뜻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만, 본 의미는 ‘기능을 잃는다.’로 봐도 무관할 듯 합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소금의 맛내는 역할만을 생각하기에 소금의 기능을 짠맛으로 여기고 말씀을 읽지만, 사실 무더운 지역에서 소금이 하는 더욱 중요한 역할은 조미료의 역할이 아니라 부패를 막는 일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소금은 금보다 귀했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소금은 사해에 굴러다니는 상당히 익숙한 재료입니다. 사해 소금이 사용된 기록은 이미 기원전에 이집트에서 사해 소금을 채취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원전 2,800년 경에 이집트에서 염장한 생선을 외국 상인들에게 팔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집트에서는 소금을 이용하여 부패를 막는 기술이 이미 기원전에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그도 그렇수 밖에 없는 것이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 때에 시체를 소금에 일주일간 담궜다가 뺐다고 합니다.

미라를 만드는 기술에서 염장법이 발달한 것인지, 염장법이 미라 기술에 적용된 것인지 순서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집트에서는 염장 기술이 이미 발달해 있었고 오랜 기간 이집트에 체류해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기술은 낯선 기술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해를 차지한 이후에 이스라엘은 염장 방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금은 짠 맛으로 맛을 내는 조미료의 용도보다는 부패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이 더 익숙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빛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빛은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15절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곳에 있으면 어둠을 밝힐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빛이 어둠을 밝혔을 때,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곳이 빛으로 인해 드러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둘의 역할을 조합해보면, 소금은 썩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빛은 어두움을 밝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신앙의 이야기로 적용해서 말하자면, 사람이 선한 길에 들어섰을 때에, 그가 다시 악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이 소금의 역할이고 사람의 안에 있는 더러움, 악을 드러내는 역할, 악을 밝혀서 악이 사라지게 하는 역할이 빛의 역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신앙인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역할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 사람들 앞에서 그 빛을 비추라고 하십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선한 행실을 하나님께서 아시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서로가 악을 행하지 않도록 돕고, 악에 물들지 않도록 이끌어나가며 혹시나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관계가 있어야만 신앙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수직적 관계만이 있는 오타쿠와 다릅니다. 아니, 달라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역할

우리의 역할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는 성도님들 사이에서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 세상 속에서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세상 속에서 악한 것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고, 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드러나도록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지방선거를 치루었습니다. 누구에게 투표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지만, 우리가 투표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분명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 이 세상 속에서 악한 곳을 비추는 빛을 보고 있습니다. 미투운동은 분명 이 시대의 악을 비추는 빛입니다. 하지만 빛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이 운동이 변질되거나 악용되지 않도록 지켜야하고, 또한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합니다. 소금의 역할 또한 행해야 합니다.

과거 인터넷 상에서 몰카영상이나 성적인 영상들을 공유하고, 심지어 성폭행을 계획하고 조직하던 소라넷이라는 사이트가 몇몇 국회의원들과 시민운동가들의 노력으로 폐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대체하는 사이트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다시 생겨날 수 있습니다. 악을 드러내는 일은 어쩌면 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악이 다시 생겨나지 않도록 막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런 역할을 감당하기에 앞서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는 일도 중요합니다. 내가 먼저 악을 행하며 산다면 우리는 소금도 빛도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입니다. 먼저 선을 행하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렵게 선이라고 말하기보다 그저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바름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는 바름을 따르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오타쿠 신앙인이 아닌,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먼저 악을 떠나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시기 바라고, 그런 여러분들께서 각자의 교회 안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교회를 바로 세워야하는 책임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참된 소금과 빛이 되셨을 때, 이 땅은 하나님 나라가 되리라 믿고, 그렇게 만들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