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술은 마셨지만 음주 기도는 아닙니다?지성이면 감천?(열왕기상 3:3-5)
이성훈 | 승인 2018.06.24 18:59

옛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끔 가족여행으로 불교 유적지에 가보면 옛 사람들이 이 말을 얼마나 열심히 믿었는지 확인하곤 합니다. 예전에 서산 마애삼존불상을 보고 왔는데, 솔직히 큰 기대를 하고 갔다가 약간 실망감이 들었습니다.

차타고 한참을 들어가고, 차를 세운 후에 산을 약간 올라가 보면 바위에 조그마한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생각보다 작은 크기에 실망하기는 했습니다만, 과거 백제시대에 지금처럼 도로가 있던 것도 아니고 이 크지도 않은 조각을 하려고 산을 타고 올라와서 나름대로 꼭대기에 있는 바위에 불상을 조각한 사람을 생각하니 그 정성이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도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아보겠다고 불경을 파기 시작해서 16년이나 걸려 팔만여 판의 대장경을 만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당시 승려들의 정성이 부족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정성을 다하면 신이 돕는다는 선조들의 생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분명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성경 역시도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신다는 말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성

우선 우리가 생각하는 ‘지성이면’이라는 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성’, 길게 말하자면 ‘지극 정성’이 될 텐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지극 정성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처럼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평소에 안 나가던 새벽기도도 꼬박꼬박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께 나의 정성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들마다 하는 ‘특별새벽기도회’라는 것도 사실은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새벽기도 자체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성공으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또 정안수 떠놓고 신령님께 빌던 토속 신앙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들이 하고 있는 새벽기도회가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과 함께 시작한다.’는 의미보다는 매일 새벽 일찍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나의 정성을 하나님께 보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성에 대해서 또 다른 식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인데, ‘정성이 부족하다.’라고 하면 먼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사이비 점쟁이들이 돈 받아낼 때 하는 말입니다. 즉 물질적으로 더 많이 바쳐야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단지 사이비 점쟁이들 만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많은 교회들도 그렇게 하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정성은 이런 것입니다. 뭔가 하루도 빠짐없이 기원을 해야 하고, 기원을 할 때는 맨입으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두둑하게 바쳐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

이런 생각에 딱 부합하는 행동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인 솔로몬의 일천번제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에서는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이야기하면서 새벽기도회를 강조하기도 하고, 일천번제라는 헌금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일천번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솔로몬이 제사를 드린 기브온은 예루살렘으로부터 10km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먼 거리도 아닙니다만, 당시를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왕이 매일같이 왔다 갔다 할 거리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그렇다고 솔로몬이 몇 년을 기브온에서 지내면서 제사를 드렸다고 말하는 것도 그가 왕이라는 입장을 놓고 생각했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 Nicolas Poussin, Le jugement de Salomon, 1649 (Musée du Louvre) ©RMN / René-Gabriel Ojéda

여기에서 우리의 일반적인 오해를 풀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가 매일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을까 하는 점입니다. 3장 1절에 보면, 솔로몬이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주위의 성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성전이 아직 없기에 기브온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때는 왕이 된 4년 후였고, 성전은 건축을 시작한지 7년 만에 완공되었으니까,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제사를 지낸 것은 11년 동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성전 건축 이야기 앞에 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기 전 4년간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3장 1절의 말씀에서 ‘기다렸다’는 말은 이미 건축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3장 본문 전체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간혹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시간 순으로 팩트를 전하는 책이 아니라 의미를 전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천 번의 번제를 지냈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천 번이라는 횟수를 11년에 맞춰서 계산해보면 대략 큰 절기 때 아침저녁으로, 또한 절기 이외에 특별한 일로 인해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냈다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이스라엘 큰 절기는 1주일인 경우가 많고, 여기에 소소한 절기들까지 따지면 대략 이 정도 횟수가 나옵니다.

즉 솔로몬이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2년 하고도 270일이라는 오랜 기간을 쉬지 않고 기도했던 것도 아니고 물질적으로 엄청난 것을 바친 것도 아닙니다. 일천이라는 숫자 자체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신학적 해석을 거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솔로몬의 일천번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정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것도 솔로몬이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정성을 들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뒤에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이뤄주시는 이유가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들어주신 이유, 그에게 많은 복으로 채워주신 이유는, 단지 그가 ‘지혜’, 올바른 재판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 나타나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우리는 아이를 갖지 못했다가 아이를 갖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봅니다. 그런데 그녀들의 경우에도 대부분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 삼손의 어머니인 마노아의 아내, 신약에서 보면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딱히 하나님께 간구 하였다던가 호소하였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다만 라헬의 경우에는 빌하를 통해 단을 얻었을 때, 하나님께서 내 호소를 들으셨다는 말을 하긴 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한 경우가 있기는 한데,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입니다. 한나는 1년에 한 번 실로에 있는 성소에 갔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실로에 간 것은 정성으로 간구하기 위해서였다기 보다는 일 년에 한 번 의무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상황은 한나의 정성스런 기도이기보다는 브닌나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한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올린 내용입니다.

한나가 기도할 때에 제사장 엘리가 한나에게 술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이 엘리의 오해라는 점을 알고 있기에 한나의 기도가 방언 같은, 마치 취해서 말하는 듯한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한나는 술을 마셨습니다. 9절에 보면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라고 나옵니다. 이들이 마신 것이 당연히 물은 아니겠죠. 한나가 엘리에게 한 말은 술을 마시긴 했지만 취해서 주사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누군가의 명언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주사는 아닐지언정 약간의 술기운에 지금껏 브닌나에게 당한 것이 억울하고 속상해서 기도했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한나의 이런 모습이 정성스러워 보입니까?

성경은 결코 이들이 정성을 다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셨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셨기에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쏟을 정성

기독교는 본래 은혜의 종교이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정성’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성’이 불필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서 정의내린 그 ‘정성’의 개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정성이라는 것은 ‘정결한 마음’을 뜻합니다. 정결하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을 비운다는 의미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비운 후에 쏟는 간구가 정성을 드린 간구입니다. 솔로몬의 경우에는 천 번의 제사를 드린 후에야 그러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재산, 명예, 영토 확장, 이런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마음만을 남겼습니다. 그제야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가 비워낸 모든 것을 다시금 그에게 채워주셨습니다. 

한나는 자신이 아이를 가지면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오히려 아이가 생기니만 못한 그런 간구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에게 더욱 채워주셨습니다. 

과거의 토속 신앙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앞서 서산 마애삼존불상을 말씀드렸으니까 이를 예로 말씀드리자면, 산에 올라가 불상을 만드는 행위는 산을 오르는 도중에 그리고 불상을 조각하는 과정 중에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조각을 마친 순간에는 자신이 조각을 시작한 이유, 세상에서의 근심 걱정, 불교 용어로 번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이건 궁극에 가서는 결국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이런 정성이나 기독교의 정성은 궁극적으로 같습니다. 우리가 매주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의 정성을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근심하고 걱정하는 나의 마음을 정결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 성도님들께 그렇게 말씀드립니다. ‘나는 하나님을 100% 신뢰합니다! 그렇기에 저에겐 근심 따윈 없습니다!’ 라고 ‘자타’공인할 수 있는 분이라면 교회 안 나오셔도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타공인이 아니라, 남들은 아니라고 하는데 혼자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분은 그냥 교회 다니기 싫은 분이니까 교회 나오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께서 어떤 교회에 나가시던 여러분 안에 있는 근심 걱정을 그곳에 내려놓고 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굳은 신앙으로 여러분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정성입니다. 새벽기도회에 매일같이 나가는데도 걱정과 근심으로 차있다면, 교회에 끊임없이 헌금을 드리는데도 걱정과 근심으로 차있다면, 여러분의 정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이 무엇으로 차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는 정성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소원을 들으시고 여러분께 더욱 큰 사랑과 은혜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충정로 2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생명의집 204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윤인중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8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