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중고시절, 청년시절에 가장 애창했던 노래였던 “선구자”의 1절 가사로 인하여 독립을 염원하는 애국청년들이 꿈꾸며 방황하며 거닐었던 해란강을 알았다. 노래를 부를 때 마다 내 나름대로 대지를 적시며 유유하게 흐르는 멋진 강을 상상하곤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작곡자, 작사자 모두가 친일한 사실이 드러나서 선구자 노래가 한국사회에서 경원시 되었고 거기에 “선구자”가 “용정의 노래” 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도 따라서 차츰 멀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의 온상이었던 용정의 애국청년들이 망국의 아픈 가슴을 달래며 걸었을 강, 말을 달렸을 해란강이 보고 싶었다.

선구자를 부르기 시작한지 40십여 년 만에 단체 관광 팀을 따라서 드디어 해란강과 조우하게 되었다. 목을 길게 빼고 강다운 강을 찾았는데 강이 보이지 않았다. 용정 시내 관광을 마치고 명동촌으로 출발한다는 안내에 당황하여 “해란강을 보여달라”고 말했더니 ‘해란강은 창문으로 보는 차창관광’이라며 ‘앞으로 한 번 더 지나가게 되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보라’고 하였다.

▲ 해란강 ⓒGetty Image

차창 관광이라는 말에 적이 실망하였다. 강변에 서서 인사도 하고 강물에 손을 적셔보고 강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는데 ...... 어쨌든 창밖으로 바라본 강은 상상 속의 강이 아니었다. 강이라고 부르기에는 폭도 좁고 물의 양도 많지 않은 그저 그런 작고 평범한 강에 불과하였다.

용감한 선구자가 말을 달릴 공간도 없고 시원하게 헤엄칠 수도 없는 작은 강에 ‘속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로부터 2년 후, 개인적으로 용정에서 서남쪽으로 4km 떨어져 있는 비암산에 올라갔다. 용정이 한 눈에 보였다. 탁 터인 앞쪽으로 작은 도시 용정이 계란 노른자처럼 평야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평지를 하천이 구불구불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평야는 ‘세전이벌(’서전대야, 세전벌)이고 구불거리는 하천이 ‘해란강’이라고 하였다.

지렁이처럼 구불거리는 큰 시내가 ‘해란강‘이라는 말에 다시 한 번 실망하며 저런 곳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라니 하며 ‘가사가 지나치다’는 생각 끝에 해란강에 대한 환상이 지워졌다.

며칠 전에 도문에 다녀왔다. 도문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차가 강 옆의 길을 끼고 달렸다. 큰 강의 물이 유유하고 도도하게 흐르며 아름다운 산천경관을 만들고 있었다. 풍광이야 꼭 같지는 않지만 순간 섬진강이 떠올랐고 탄성이 터졌다.

그 강은 해란강과 부르하통하가 도문 가까이에 와서 합수되어 함께 흐르는 강이었다. 해란강이 부르하통하와 합수해서 흐르다가 도문에서 다시 가야하와 합수되어 두만강으로 들어가고 훈춘에서 훈춘하가 두만강에 합수되어서 동해로 들어간다는 말에 가슴이 찡하였다.

알고 보니 해란강은 두만강의 한 지류로서 백두산의 줄기인 화룡 청산 서쪽 베개봉 에서 발원하여 용정, 연길을 거쳐 도문으로 가서 두만강과 합수되는 장장 145km가 되는 장강이었다. 360여리 길을 허위허위 달리며 연변 조선인들의 벼농사를 일구어준 어머니 강이었고, 조선인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 수 있도록 받아준 강이었으며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의 재정적인 기반을 만들어준 실로 자비로운 강이었다.

1880년 청은 러시아제국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서 연길, 훈춘. 성동, 성기하, 흑전자 등지에 정변군을 주둔시켰다. 위기감을 느낀 청은 1881년 “봉금”을 폐지하고 국내 이주민을 받아들여 연변지역을 개간하고자 현지조사를 하는 중에 연변 땅이 조선 이주민들에 의해 많이 개간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200여 년 간의 봉금정책을 폐지하고 개방조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85년 청은 드디어 “봉금”을 폐지하고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여 두만강 이북, 해란강 이남의 길이 700리, 너비40~50리 되는 지역을 조선 이주민의 개간구역으로 확정하고 거주와 토지 경작을 허락하였다.1894년에 청은 조선인 월경개간자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조선이주민의 개간구역에 따라 4보 39사 124개 갑, 415개의 패를 설치하여 조선 개간민 전부를 이 행정조직에 편입시켰다.

조선인 거류지의 가장 큰 중심지가 되는 4보는 진원보(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등 대안지역), 수원보(용정시 삼합, 지신향 일대), 안원보(화룡시 덕화, 용신, 숭선, 로과 일대), 영원보(용정시 광개향, 도문시 일부)였는데 이들 보중에 진원보를 제외한 3개의 보는 해란강이 흐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1880년대 조선인들은 두만강 강변지역인 무산대안, 회령대안, 종성대안, 온성대안, 경원대안에서 개간을 하였으나 1890년대 4보 39사 설치와 조선인 전문개간지역 형성으로 말미암아 조선인촌락은 두만강북안지역에 자리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엽에는 조선인들의 생활중심권이 점차 연변 내륙의 부르하통하, 해란강, 가야하 변으로 옮겨졌다.

연변지역은 조선인에 의하여 수전이 개발되기 전까지 한전이 주를 이루었다. 한전에 보리, 밀, 수수, 옥수수, 조와 콩류를 심었다. 조선 농부들은 조선의 벼농사를 해란강가에서 끈질기게 시도하였고 그 결과로 1890년 용정시 개산툰진 광소일대에서 처음으로 수전이 개발되어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1900년 해란강반 서전평원의 대불동 일대에서도 연이어 수전이 개발되어 벼를 심었다. 1905년 훈춘 마적달 오도향, 밀강향 중강 등지에서도 수전이 개발되었다.

수전 개발과 더불어 관개수로도 개발되었다.

1906년 연길청 용지사 대교동의 14세대 조선족농민들은 최초로 공동으로 수로(1308m)를 만들어서 관개를 하였고 그 후 용정의 수남촌, 반석촌, 화룡의 투도구, 평강 등지의 조선족들도 수로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1910년 말에는 벼농사지역이 두만강, 해란강안 산곡으로부터 서전평원, 평강평원 및 북부의 부르하통하, 가야하, 훈춘하류지역으로 널리 확장되어 갔다.

수전 개발과 더불어서 조선족은 연변 내륙지방으로 강을 따라서 이주를 하였다. 험란한 수전개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눈이 비로소 뜨였다.

해란강에서 말달리던 선구자가 아니라 해란강물을 끌어들여서 “벼농사”를 개발한 이름 없는 조선의 이주민들이 바로 그 위대한 “선구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이야 말로 나라의 혜택이라는 것을 받아 본적이 없는 나라에 세금내고 군에 복무하면서 죽도록 수고만 했던 평민들이었다. 계속되는 가뭄과 한파의 기근, 세금 폭탄에 맞아 신음하다 죽고 사는 것을 하늘에 맡기고 남부여대하고 남의 나라에 도적처럼 스며들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넘어 북상하여 생계 터를 일구며 해란강으로, 부르하통하로, 목단강으로, 흑룡강으로 퍼져 나가며 정착을 하였기에 소위 말하는 독립투사들의 독립운동이 가능하였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진정한 “선구자”인 그 분들을 가슴에 모셨다.

선구자는 바로 그들이었고 내가 노래를 부르며 연상했던 말달리던 선구자는 그들의 그림자였고 그들의 표상에 불과하였다.

해란강에서 수전을 일군 그들은 그야말로 “조선인 프론티어”였다. 고향과 자기 나라에서 기아에 직면하여 운명을 박차고 나와 남의 나라에서 척박한 땅을 일군 모험정신과 개척정신, 토비와 중국인 지주들에게 수탈과 학대를 당하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불굴의 의지와 집념으로 그들은 연변 땅에 조선족의 뿌리를 심은 위대한 “선구자”였다.

실로 해란강에서 독립을 꿈꾸는 선구자가 말을 달리는 일은 1910년 이후의 일이었고, 해란강은 조선의 월경 이주민들을 받아서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도록 생명을 품어준 강이었고 조선인들이 낯선 이국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어머니 강이었다.

수전 개발로 경제적인 기반이 닦인 터 위에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지사들이 모여들었고 해란강이 흐르고 있는 도시들인 화룡, 용정, 연길, 도문, 훈춘은 그들을 받아들여서 독립의 운동의 온상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도 범월 이주민(월경 개간민)들의 피눈물 나는 이주와 정착의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으며 우리 역사가 그분들께 진 빚을 다시금 깊이 생각하였다.

감사한 마음으로 해란강을 바라보니 우리 고향 마을 뒤로 흐르는 만경강처럼 다정하였고 섬진강처럼 금강처럼 내 가슴으로 흘렀다.

해란강이 형편없이 보여서 실망했다는 내 이야기를 들은 어느 시인이 조선족 이주 초창기에 해란강변에서 개발된 수전을 보여주셨다. 조선인들의 수전개발을 기념하기 위해서 옛 모습 그대로 유지하도록 두었는데 적당히 크고 작은 네모난 논들이 다정하게 이웃해 있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여름에도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받아서 갖은 고생을 치루며 최초로 수전을 일구어낸 조선인 농부들, 진정한 선구자들의 땀방울 흘리는 얼굴이 하늘에서 아른거렸다.

눈을 뜨니 해란강 노래가 들린다.

해란강 6
- 김학송

하나의 민족을 등에 업고
해란강이여
눈부신 갈망으로
울먹이는 강이여

너는 우리의 마음이요 노래다
우리의 숨결이요 맥박이다
우리의 두루마기요 행주치마다
우리의 조상이요 신앙이다
이제 너는 미래 속에 길이길이
우리의 날개가 되리니

해란강 1
- 김학송

사연 많은 해달 싣고 굽이굽이
파도 높은 세월 싣고 천리만리

평강벌에 계절이 벼꽃처럼 하아얗게
모아산에 진달래 불꽃처럼 빠알갛게
그사이 강산은 수없이 바뀌고
아이들은 자라서 로인이 되고

오, 너의 가슴팍을 휘젓고 간
백의의 눈물은 얼마였던고?

해란강 8
- 김학송

구월의 들국화 하늘종 울리고
축복의 해살
황금이 논벌에 쏟아지는 날
이백만송이 진달래로
고이 엮은 영광의 꽃다발
삼가 그대의 파도 앞에 올리나이다

작다고 하기에 너무나도 위대한
우리의 어머니- 해란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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