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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도 이스마엘도 아니다탈ㆍ향(脫ㆍ向)(창세기 12:1~4)
최형묵 | 승인 2018.07.04 21:51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난 후 형제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사연을 들여다보자면 다양하겠지만, 대개 재산 상속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눠 먹을 떡고물이라도 있으니 아웅다웅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말이 없건만 무심한 자식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겠노라고 그렇게 다툽니다.

그렇게 싸우는 자식들을 둔 애꿎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싸우는 자식들은 누구일까요? 그 싸우는 자식들의 이름은 유대인, 아랍인/무슬림, 기독교인입니다. 이들 모두는 아브라함을 한 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서로 싸웁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손이라 믿고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에, 이삭의 후손인 유대인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적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반면 아랍인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 믿고 있습니다. 당연히 첫 아들인 이스마엘의 후손이니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적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그 아들을 유대인은 이삭으로, 아랍인은 이스마엘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모리아 산이라 믿고 있는 예루살렘의 시온산 언덕에 유대인은 성전을, 무슬림은 황금 돔과 알아크사 사원을 세워놓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여겨진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혈육상의 조상은 아니지만 믿음의 조상으로 오히려 어쩌면 더 거룩하게 받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인은 시온 산으로 간주되는 언덕 맞은편에 우뚝한 성묘교회를 세워두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주변에 가장 많은 교회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으로 알려진 ‘예루살렘’(원래는 샤하르/샬림의 집=태양신의 거주지)은 그 이름과는 상반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적자임을 주장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분쟁으로 얼룩진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도 그 도시를 둘러싼 분쟁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들 때 진정으로 세계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은 결코 빈말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 Guercino(1591–1666) Abraham Casting Out Hagar and Ishmael(1657) ⓒGetty Image

도대체 한 조상을 섬긴다면 더욱 평화스럽게 지내야 할 텐데, 오히려 더 지독하게 다투는 사연이 어디에 있을까요? 서로 적자임을 내세우는 이유는, 적자라는 사실을 공인 받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아브라함과의 연고권을 빌미로 하여 다퉈야 할 만한 어떤 요인이 있을까요? 성서 본문말씀을 보면 그렇게 보일 만하기는 합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아직 당시로서는 ‘아브람’이지만)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 선포하고 있습니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볼 것 같으면, ‘아, 바로 그 복을 독차지하기 위해 싸우는가 보구나!’ 하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그 복이 뭘까요? 같이 나누면 안 되고, 꼭 혼자서 독차지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조상이 복의 근원이라는 결과적 사실만을 기억하며, 그 연고권을 주장으로써 그 조상에게서 비롯되는 복을 독차지하려는 태도에서 형제들간의 싸움은 시작됩니다. 그게 사실은 따지고 보면 정통성과 명분의 우위를 갖는 것일 뿐이지만, 특정한 역학관계 안에서는 그것이 결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기에 그것에 기대려 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며 그 땅에 살고 있는 다른 주민을 배제하는 것이 바로 그런 태도입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으로 인정을 받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내린 복 때문에 자기 자식들이 그렇게 치고 박고 싸우기를 원할까요? 아니,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던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선언이 분쟁의 씨앗이 되기를 원하실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다는 결과적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사연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사연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결단을 동반합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따른 데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사연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사연이 있습니다.

‘네가 살고 있는 땅’, ‘네가 난 곳’, ‘너의 아버지의 집’은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의 안정을 제공해준 바탕이며 조건입니다. 이미 익숙한 것들이고 언제나 눈에 들어오는 것들입니다. 눈감아도 알 수 있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여주는 땅’은 낯선 곳입니다. 하나님께는 환히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은 땅입니다. 그것은 눈을 아무리 크게 떠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미지의 세계입니다. ‘네가 살고 있는 땅’이 이미 완결된 세계라면, ‘내가 보여줄 땅’은 열려 있는 가능성의 세계입니다. ‘네가 살고 있는 땅’에서 ‘내가 보여줄 땅’으로의 이동은 공간적 지리적 이동일 뿐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결단입니다. 가능성을 믿고 확실하게 자신을 내던지는 결단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결단한다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한 번의 결단으로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이를 ‘탈ㆍ향’(脫ㆍ向)으로 집약하였습니다. 익숙한 기존의 세계에서 떠나’(脫) 낯선 새로운 세계를 향(向)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삶의 여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의 근원이 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떠받드는 것은 그 믿음의 결단을 본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신앙세계를 다른 고대의 종교적 신앙세계와 구별해주는 요체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스스로의 주체적 결단을 동반한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주었고, 이후 그리스도인에게까지 계속되는 신앙의 요체는, 낡은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세계관의 변화와 함께  윤리적 결단을 동반하는 데 있습니다. 그저 간절히 빌면 내리는 복에 의존하는 신앙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동반하는 신앙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한해의 절반을 마무리하고 또 남은 절반을 맞이하는 시점입니다. 본래 농경생활 주기에서 한 해 절반의 첫 소출을 거둬들이고 이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밀과 보리를 추수하고 이를 하나님께 드리며 기뻐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텃밭에서 지난 주일에 감자도 거둬들였고, 보리도 이미 거둬들였습니다. 워낙 한정 생산된 것이라 누구 코에 붙여야 할지 희소할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씨를 뿌리고 거둬들이는 이치를 환기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농사입니다.

그런데 성서를 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로 그 맥추감사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햇곡식 예물을 드리면서 신앙고백을 또한 드립니다. 이른바 ‘역사신조’입니다(신명 26: 5~10).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는데,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주께서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 주께서 내게 주신 땅의 첫 열매를 내가 여기에 가져 왔습니다.”

첫 열매를 거둘 수 있기까지 자신들의 현재의 삶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회고하면서 그 삶이 가능하도록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그 첫머리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조상들의 삶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은 철저한 역사의식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저 ‘천지신명께서 햇빛을 내려 주시고 비와 바람을 내려주셔서 이렇게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하는 류의 고백도 혼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는 자연의 이치와 삶의 이치를 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나름대로 숭고한 뜻을 담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신앙은 그보다 훨씬 철저한 역사의식을 동반합니다. 어쩌면 끊임없이 나그네와 같은 삶의 여정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억압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자각을 동반한 신앙입니다.

그 자각이 구체적인 만큼 그 믿음은 언제나 구체적인 윤리적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는 역사의식과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성서의 신앙,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매우 긴장도가 높은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신조에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을 주 너희의 하나님 앞에 놓고, 주 너희의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레위 사람과 너희 가운데서 사는 외국 사람과 함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와 너희의 집안에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려라.”(신명 26:10~11)

별도의 생업수단이 없는 레위인들과 이방인 나그네들과 더불어 거둔 것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그저 막연한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더불어 삶을 나누는 결단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낯선 이방인이었던 사실을 환기시키며, 그 때 겪었던 고통을 되새기는 가운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이루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아브라함이 모든 민족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까닭이 무엇인지,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낯선 타인들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삶을 누리는 세계를 지향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가치관의 변화를 요청받고 있고, 또 그런 만큼 의미 있는 변화 또한 이뤄지고 있습니다. 냉전의식을 넘어 평화의식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제도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양심의 자유와 인권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변화입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고 있지만 여전히 서로 다른 의견들이 대립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난민을 대하는 시선,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을 대하는 시선, 성적 소수자를 대하는 시선 등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국제적 차원에서 상식적인 규범이 통용되지 않는 하나의 영역이 있고 다른 시선들이 엇갈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지난 주간 전경련에서 초청한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깜작 놀란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주당 52시간씩이나 노동을 하느냐고 반문했지요. 주 52시간 노동제를 갑자기 시행하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전경련 부회장의 질문에 대한 반응에서였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주류 인사들이 갖고 있는 인식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정말 무엇이 인간을 위한 삶인지, 어떻게 해야 그 삶을 모두가 누릴 수 있는지, 그것이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입니다. 그 지향점이 배제된 채 효율과 경쟁이 목표가 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재삼 새기고, 그 삶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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