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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마음의 출구결국 되돌아오는 말의 화살(마 12:34-37)
이성훈 | 승인 2018.07.08 21:57

오늘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서 조심스럽게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반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최근의 일어나고 있는 여성운동에 대해서 비난하는 입장도 아닙니다. 그저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입장이고,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중립이라고 말하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관심이 없는 편입니다.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지난 토요일에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조금 어이없는 기사를 봤습니다. 혜화역에서 ‘불편한 용기’라는 여성 단체가 행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이 시위 자체가 어이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시위에서 외쳤던 내용 중에 저로서는 약간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과정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않으면서 주장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습니다만, 이런 생각은 소소한 점이었고, 정말 어이가 없는 점은 그들이 사용한 용어였습니다.

알 수 없는 용어들

자꾸 말을 덧붙이게 됩니다만, 저는 용어 사용이나 신조어에 상당히 민감한 편입니다. 매주 강단에 서는 사람이기에 언어에 민감한 부분도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언어의 유래와 사용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최근에 문재인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문빠’라고 부르고 본인들도 그런 표현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제가 대학시절 90년대에 출간된 비속어 사전을 정독한 적이 있는데, ‘빠순이’라는 말은 과거 청량리 588이나 미아리 텍사스촌에서 성매매 여성들이 지나가는 남성을 향해 ‘오빠, 오빠’하던 데에서 시작되어, 성매매 여성들을 낮춰 부르는 표현이었습니다. 그것이 HOT와 젝스키스로 인해 폭발적으로 일어난 아이돌 문화 속에서 남자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여학생들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고 나옵니다. 지금은 대부분 ‘빠순이’의 원래 의미도 모르고 그냥 쓰는 듯합니다만 저는 ‘문빠’에서 ‘빠’라는 표현 자체가 상대방을 상당히 낮춰서 부르는 저속한 표현이기에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시 ‘불편한 용기’의 집회로 돌아가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집회에 가서 보지 않았고, 실제로 남성은 참여할 수 없는 집회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제가 쓰는 단어들은 제가 들은 단어가 아니라 여러 기사에서 봤던 단어만을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단어들에 대한 설명은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가며 그 시작점까지 찾아가서 확인한 내용입니다.

요즘 워낙에 ‘무슨 무슨 충’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최근에 ‘맘충’이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이 말을 제가 처음 들었던 것이 2000년 초반에 ‘뇌가 없는 벌레’라는 의미를 가진 ‘무뇌충’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은 가수 ‘문희준’씨를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었습니다. 어감이 비슷하죠. 여기에서 ‘충’은 당연히 ‘벌레 충(蟲)’을 씁니다.

ⓒGetty Image

요즘에는 ‘뭔가 싫다’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에게는 ~충이라면서 비하하는 식으로 사용됩니다. 불필요한 설명을 나열한다고 해서 ‘설명충’, 연세 드신 분들을 비하하면서 ‘틀딱충(틀니 딱딱거리는 벌레)’, 수많은 벌레들이 있습니다. 혹시나 언젠가 들어보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말씀드리면,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리얼충’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충’이 ‘벌레 충(蟲)’을 쓰는 반면에 일본의 ‘리얼충’은 ‘차다, 채울 충(充)’ 자를 씁니다. 현실에 충만한 사람, 사회생활도 잘하고 연애도 잘하고 친구 관계도 원만한 현실에 완벽히 적응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처럼 비아냥거리는 말이 아니라 반대의 개념입니다. 간혹 ‘리얼충’을 ‘진짜 벌레’라는 말로 오인하는 분들이 있어서 사족을 답니다.

요즘 일부 여성 사이트에서는 이 충을 ‘한남’에 붙여서 ‘한남충’이라고 부릅니다. 한남은 많이 아실테지만, ‘한국남자’를 줄인 말입니다. ‘한남’이라는 말 자체가 싸그리 잡아 죽여도 괜찮은, 차라리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는데, 여기에 ‘충’까지 붙여서 한국남자는 바퀴벌레와 같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한남충’이라는 말 자체는 상당히 과격한 표현입니다. 

‘한남충’도 상당히 과격한데, 성적인 의미를 담은 용어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이 ‘자이루’, ‘자이스’라는 말을 외쳤다고 합니다. ‘한남’이나 ‘한남충’은 워낙 많이 봐서 알고 있었는데, ‘자이루’, ‘자이스’는 너무나 생소해서 한참을, 그 시작점까지 찾아봤습니다.

이 용어의 시작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아프리카 TV’라는 인터넷 방송을 하는 BJ 보겸과 그의 구독자들 사이에서 ‘보겸 하이루’를 줄여서 ‘보이루’라는 말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만, 보겸이라는 BJ가 유투브에도 영상을 올리는데, 우리나라 크리에이터 중 구독자 수 230만 명으로 1위라고 합니다. 게임과 만화에 대한 내용을 얘기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기 유투버(유투브에 영상을 올리는 사람)의 특성상 10대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보겸 BJ가 데이트 폭력을 행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본인도 이에 대해서 인정하고 사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인해 여성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보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물론 그 전부터 보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사용하는 단어인 ‘보이루’가 ‘보겸 하이루’의 줄인 말이 아니라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단어에 하이루를 붙인, 여성을 비하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라고 단정해버리게 됩니다.

원래 없던 개념을 본인들 스스로가 붙여 넣고, 스스로가 붙인 개념을 이슈화시키면서 BJ가 잘못되었다고,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용어의 개념을 재정의 하면서, KBS 뉴스에까지 이 단어가 등장하게 됩니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안 좋은 의미의 신조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는 내용의 뉴스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 성적인 의미를 담은 ‘보이루’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사실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은 그런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유투버의 방송을 너도 보냐? 하는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유투버 ‘도티’의 매니아면서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남자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용어를 여성 사이트에서 재정의 해버렸고,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본래의 개념은 알지 못한 채, 재정의 된 개념만을 알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잘못된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금지시키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뉴스에 나올 정도의 이슈가 됩니다.

‘자이루’, ‘자이스’는 여성 사이트에서 이런 ‘보이루’를 미러링 한다면서 만든 용어입니다. 남성의 성기에 ‘하이루’나 ‘나이스’를 붙인 말입니다. 이 용어를 만들어낸 의미는 이렇습니다. 남성들이 여성들을 보면서 ‘보이루’라고 한다면, 우리는 남성들을 보면서 ‘자이루’라고 해주겠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보이루’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여성 사이트였고, 결국 자신들의 부여한 의미를 자신들이 다시 미러링 해서 남성들을 혐오하는 단어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기사에 보면, 주최 측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자매님 하이루’라는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인터넷 상에서 본인들이 실제로 쓰는 의미가 있는데, 그것을 아니라고 말해봤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일 뿐입니다. 이들의 답변에 대해서 일부 남성들은 ‘자이루’가 ‘자유한국당 하이루’의 줄인 말이고 ‘자유한국당’과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면서 오히려 여성들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한 표현도 나왔습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경찰의 수사에 편파수사는 없었다는 식의 언급을 했다는 이유로 문재인 대통령을 비하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문재인 재기하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물론 주최 측에서는 이 구호에 대해서도 ‘재기하라’가 아니라 ‘제기하라’이며 이는 사전적 의미로 ‘제기’, ‘문제를 제기한다.’는 의미라고 말했지만, 여성 사이트에서 ‘재기하라’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아신다면 단순히 ‘문제를 제기한다.’는 뜻이 아님은 알 수 있습니다.

여성 사이트에서 ‘재기하다’가 무슨 의미인지 찾아봤습니다. 한마디로 자살하라는 말입니다. 예전에 ‘성재기’라는 남성연대 대표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성들이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이 차별받고 있다고 주장한 사람인데, 저도 정확히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안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이 2013년에 남성의 연대를 위해서 한강에서 투신하는 퍼포먼스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이야기에 따르면 구조대를 준비해놓고 KBS에서 촬영하는 상황에서 한강에 투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 사람은 구조되지 못했고, 사고사로 죽었습니다. 여성 사이트에서는 이 사람의 죽음 비웃으면서, 또한 그 행위를 빗대어 한강에서 뛰어내려 죽으라는 의미로 ‘재기하다’라는 말을 씁니다.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이해가 안 되어서, 무슨 성경 원어 의미 찾듯이, 인터넷을 뒤져야만 그 의미를 알게 되는 요즘 세대 자체는 한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용어가, 이들이 만들어낸 용어가 폭력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겠습니다.

마음의 출구인 입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은 바리새인, 서기관과 예수님이 논쟁하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을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22-37절의 한 묶음으로 보았고,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은 33-37절을 개별 본문으로 나눠놓았습니다. 신약학자인 ‘톰 라이트’는 33-42절을 하나의 묶음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저는 22-45절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자 바리새인들이 말합니다. 저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바알세불’은 본래는 ‘오물의 왕’이라는 의미로 일종의 은어로 보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치유가 하나님의 힘으로, 성령의 힘으로 행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나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괜찮지만 성령을 모욕하면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오늘 본문의 위치는 조금 애매합니다. 그래서 먼저 뒷 단락의 본문을 먼저 살펴보자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말합니다. 앞선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를 행한다고 말씀하시자, 그에 대한 표적을 보여 달라는 요구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며, 자신이 보여주실 표적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 세대는 심판 때에 정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어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없더라도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는 이 흐름 속에 넣지 않았던 말씀, 33-37절의 말씀을 그 사이에 넣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너희 마음에 가득한 악을 입으로 내뱉고 있다고 훈계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이 이 이야기들의 사이에 들어감으로 인해 우리는 한 가지 사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비판하고 계신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마음속에 귀신의 능력에 대한 생각만이 차있고, 하나님의 표적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너희는 그런 식의 비판밖에는 하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오히려 너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있다면 너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리라는 훈계이십니다.

이런 이야기는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5장에서 나타난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비판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의 본문에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비판합니다. 이 비판에 대해서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마음,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억지스러운 연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마태복음 7장의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와 연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내 안에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내가 남을 비판하게 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내 마음에서 악을 제거한다면, 남을 비판할 일이 없으리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가복음은 6장 39-45절에서 마태복음 12장 33-37의 오늘 본문을 ‘네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라’는 말씀 뒤에 이어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입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며 생각하는 것들이 결국 입으로 나오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앞서 여성 단체의 시위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여성 단체들의 경우에 남성에 의한 차별만을 생각하며 살다보니까 어떤 단어에도 성차별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그 단어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표현, 그들의 언어가 폭력을 담고 있는 언어라면, 폭력을 담고 있는 표현이라면, 이는 결국 그들의 마음에 폭력이 담겨져 있음을 나타냅니다. 저는 상당히 인기 있었던 페미니즘 서적인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읽으면서, 남성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폭력에 ‘그건 폭력이다’라고 외칠 언어, 여성들 스스로 우리는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깨닫게 할 언어가 필요하다고 읽었지, ‘우리도 똑같이 폭력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지는 않았는데, 제가 잘못 읽은 것인지, 일부 여성 단체들에서 잘못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비단 이 이야기는 일부의 여성 단체를 향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남성 우월 단체라는 일베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어묵’이라고 비하하는 일도 그들이 어떠한 사건에 대해서 측은지심을 갖고 바라보지 않고, 정치적인, 혹은 유희적인 맥락으로만 바라보면서, 사람의 죽음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런 폭력적 언어들이 무분별하게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어떤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교인들이기 때문에 교회 용어를 일상에서도 열심히 사용해야하고 그래야만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일이며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집니까? 그 용어들 속에서 선이 드러납니까? 오히려 요즘에는 교회 용어만 사용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기 십상입니다. 오히려 세상과 공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용어라는 언어 자체가 폭력성을 띄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난 구원받은 사람, 넌 지금은 벌 받아 지옥 갈 사람’이라는 선을 긋는 표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한쪽 측면에서는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35절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교회 용어를 많이 사용해야 우리가 선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삶에서 선한 행동을 하면서 살아야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선한 말이 나오게 되며, 그것이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언어가 됩니다.

37절의 말씀,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결국 우리가 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판단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얼굴’이 아니라 내 ‘언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 언어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출발해서 우리의 마음을 거쳐 입으로 나오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선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폭력을 저버리시고 악을 내려놓기 위한 회개를 하시며 살아가신다면, 남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언어, 폭력적이고 악한 언어, 교회라는 울타리에 갇혀있는 언어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그들에게 참 은혜를 전하는 말을 하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삶에서부터 드러나는 말로 세상을 선하게 바꾸어 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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