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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는 사람은” - 善救人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27
이병일 | 승인 2018.07.09 21:59
“다니기를 잘 하는 사람은 바퀴자국과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티와 허물이 없다. 셈을 잘하는 사람은 산가지와 제비를 사용하지 않는다. 닫기를 잘하는 사람은 문빗장으로 잠그지 않아도 누구도 열 수 없다. 묶기를 잘하는 사람은 노끈으로 묶지 않아도 누구도 풀 수 없다. 이럼으로써 성인은 늘 사람을 잘 구하므로(가려 씀으로) 사람을 버리지 않고, 항상 물건을 잘 고치므로 물건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밝음을 따른다(襲明, 曳明 밝음을 끌어온다, 申明 밝음을 편다)고 한다. 그러므로 잘 하는 사람은 못하는 사람의 스승이고, 못하는 사람은 잘 하는 사람의 바탕(제자)이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바탕을 사랑하지(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비록 지혜롭다고 해도 큰 미혹에 빠진다. 이것을 묘함의 핵심(要妙)이라고 말한다.”
- 노자, 『도덕경』, 27장
善行(者)無轍迹. 善言(者)無瑕謫. 善計(數)(者)不用籌策. 善閉(者)無關楗而不可開. 善結(者)無繩約而不可解. 是以聖人常善救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曳, 申)明.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知(也)大迷, 是爲要妙(妙要)

행군이나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인위적인 자취를 남기지 않으므로 해를 입지 않습니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인위적인 수단을 쓰지 않지만, 인위적인 수단을 쓰는 것보다 결과가 좋습니다. 예법을 기준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마치 멀쩡한 땅에 수레자국을 남기는 것이며, 빗장으로 문을 잠그는 것과 같아서 누군가 문을 여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참다운 성인은 나라를 다스림에 인위적인 수단을 쓰지 않지만 사람을 잘 구합니다. 一德一失, 一實一虛를 왕복하는 도를 이해할 때, 혼란하다고 사람을 배척하거나 버리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정치가 밝음을 이어가는 것(襲明)입니다.

ⓒGetty Image

습명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순환을 질서로 따르는 태도입니다. 달리기를 시켜 늦게 도착한 사람을 벌주는 것은 자연을 상대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지식이 없는 제자는 아직 자연 상태일 뿐입니다.

스승도 원래는 학식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했으므로 제자는 스승의 자연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식이 있는 자를 높이되, 학식이 없는 사람도 차별하지 않을 때, 질서와 조화가 옵니다. 스승을 높이면서 제자를 천하게 여기면, 시시비비를 가리는 지식은 있어도 이것은 오히려 자연과 싸우는 미혹의 길입니다.

창은 별이 빛날 때만 창이다
희망은 희망을 가질 때만 희망이다
창은 길이 보이고 바람이 불 때만 아름답다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
나그네여, 그래도 이 절망과 어둠 속에서
창을 열고 별을 노래하는 슬픈 사람이 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희망을 낳지 않는데
나그네여, 그날밤 총소리에 쫓기며 길을 잃고
죽음의 산길 타던 나그네여
바다가 있어야만 산은 아름답고
별이 빛나야만 창은 아름답다
희망은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창은 들의 꽃
바람 부는 대로 피었다 사라지는 한 순례자​
- 정호승의 “희망은 아름답다”

착하다는 것은 훌륭하다고 해도 되고 잘 한다고 해도 됩니다. 어찌하든 자본주의적 극한의 경쟁사회에서 꼭 새겨들어야 할 노자의 말입니다.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사람을 무시하고 심지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회, 일등만을 추켜세우는 사회, 성공만을 위해서 모두가 달려가는 사회, 태어나면서부터 이 경쟁에 시달려야 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 사회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잘 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소중히 여기는 태도야 말로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을 차별없이 품어 줄 수 있는 곳이 고향 같은 사람입니다.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을 하나로 묶어줄 공통의 끈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바로 그러한 일이기를 바랍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고향은 ‘세계의 중심’이고, 공간에 대한 모든 인식은 고향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집니다. 고향은 인간이 인식하는 최초의 공간입니다. 인간은 고향을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사회를 인식하며, 조국을 인식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저항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는 고향에 대한 기억을 “서로를 묶어줄 공통의 끈”이라 합니다. 그 기억은 지나간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기억입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로부터 예언자는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했습니까? 언제나 권력을 쥔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였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죄악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바로 잡아서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자들과 권력자들에게 예언자는 결코 달가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예언자의 가족이나 고향은 그 예언자를 그저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언제 끌려갈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예언자라는 사람을 만나거나 그 가족조차도 기피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꺼려하거나 달갑지 않게 여긴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권력의 횡포와 탄압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이들이 예언자를 품고 예언자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향으로부터 유배당한 사람들의 마음은 고향의 옛 모습이나 옛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이 과거에서 미래로 방향전환을 하게 되면, 새로운 고향 꿈꾸는 세상에 대한 기다림이 됩니다. ‘기다림’은 지금 없는 것, 현재의 부재(不在)를 전제로 하지만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과 긍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서로를 묶어줄 공통의 끈”인 고향의 품에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이 자유롭게 안기는 일입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갈 수 있고, 고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미소 지으며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서로를 묶어줄 공통의 끈”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일들이 언젠가 그리울 때에 “서로를 묶어 줄 공통의 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걸어갈 길이 평탄하고 넓은 길, 장애물이 없는 길이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험한 산을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당당하게 삽시다. 지금 나의 삶의 현장에서 “서로를 묶어줄 공통의 끈”을 만들면서 생명과 평화의 미래를 기다립시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고향이 뭐길래?”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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