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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 효과하나님의 믿음(삼상 8:5-8)
이성훈 | 승인 2018.07.15 22:04

구약성경 중에서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를 합쳐서 신명기 역사서라고 부릅니다. 한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적지만, 최소한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집단에 의해서 연작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사사기 다음에 룻기가 위치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위의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의 배열은 시간순에 따른 배열이기 때문에 룻기가 이 사이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신명기에서 열왕기에 이르는 신명기 역사서는, 우리가 20권에 이르는 박경리의 토지를 하나의 책으로 읽듯이, 하나의 책으로 읽어나가야만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신명기 역사서가 하나의 흐름을 갖춘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때, 그 절정을 이루는 곳은 어디일까요? 만약 신명기 역사서의 중심이 다윗 왕조에 있었다고 한다면, 사무엘상 16장의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이 절정이 될 것입니다. 만약 중심이 성전, 하나님의 집에 있었다면,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성전 건축 후 솔로몬의 기도 장면이 절정이 될 것입니다.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하지만 저는 신명기 역사서의 절정은 그러한 성공과 성취의 이야기, 훌륭한 믿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본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떠나버린 이야기입니다.

피그말리온 효과

잠깐 이야기를 다른 데로 돌려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용어 중에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2002년 월드컵 때 유행했던 말, ‘꿈은 이루어진다’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를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이야기 하게 될 때에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로 말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바램, 언급, 등이 지속되면 결국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의 용어입니다. 물론 부정적일 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용어는 피그말리온에 대한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했습니다.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은 현실의 여성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되어 자신만의 여성,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여성을 조각하기에 이릅니다. 조각을 완성한 후에 그는 자신이 조각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고, 조각에게 옷을 입히고, 자신의 아내라고 부르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갸륵하게 보았고, 조각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줍니다. 피그말리온은 살아난 조각에게 ‘하얀 돌’ 혹은 ‘바다의 요정’이라는 의미를 가진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둘은 행복하게 살았더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 루이 장 프랑수아 라그레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1781. ⓒ위키미디아

선을 너무나 아름답게 그려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라그레네의 작품입니다. 라그레네는 피그말리온에 대한 작품 두 점을 그렸는데, 하나는 위의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거의 동일한 구도이지만, 아프로디테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피그말리온에 대해 그릴 때는 위와 같은 장면과 구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갈라테이아가 사람이 된 순간의 환희, 이 둘의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의 격정을 그려냅니다.

옆에 있는 아기는 큐피트는 아니고 당시에 유행했던 아기 천사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푸토(Putto)라고 불리는 이 아기 천사들은 ‘라파엘로 산치오’의 작품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해서, 로코코 화가인 ‘프랑수아 부셰’가 빈번하게 사용한 소재입니다. 성경이나 전설 등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화가들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존재입니다. 다만 푸토가 그려진 장면들은 부정적인 이미지보다는 긍정적 이미지, 기쁨, 환희, 격정을 나타낼 때에 사용되곤 합니다. 위의 그림은 갈라테이아가 사람이 된 순간에 피그말리온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자신의 바램이 이루어졌을 때, 그가 느낀 환희를 느끼게 해줍니다.

▲ 쟝 레옹 제롬,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뒤’, 1890. ⓒ위키미디아

반면에 또 다른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품이 있습니다. 쟝 레옹 제롬의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갈라테이아는 아직 완전히 사람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의 다리는 아직 석고 상태로 있습니다. 아직 완전한 사람이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그말리온은 그녀에게 뜨거운 입맞춤을 합니다. 어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신화의 하이라이트인 갈라테이아가 사람이 되는, 그 순간의 격정을 그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롬은 그 순간을 단순히 환희의 순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화면 오른쪽에 큐피트는 사랑의 화살을 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자면, 이 둘의 사랑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피그말리온 혼자 갈라테이아를 사랑할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본다면, 뜨겁게 껴안고 있는 피그말리온의 오른손을 갈라테이아가 왼손으로 떼어내려 하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큐피트의 바로 아래에는 두 개의 가면이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과 희극 공연에서 사용된 가면입니다. 갈라테이아의 왼편에는 ‘거울을 보고 있는 여성상’,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여성상’이 있습니다. 왼쪽 위편의 그림은 정확히 어떤 그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색상과 구도는 그가 1861년에 그린 ‘판사들 앞의 프리네’를 연상시킵니다. 이 작품까지 이야기를 하자면 페미니즘 쪽으로 이야기가 흐르기 때문에 이 그림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두 개의 가면 아래에는 ‘메두사’의 얼굴이 새겨진 방패가 놓여있습니다. 갈라테이아의 발밑에는 물고기 조각이 있습니다. 이 소품들이 가진 의미들은 무엇일까요? 제롬은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전하고자 했을까요? 그는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에게 준 것은 단지 생명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갈라테이아에게 인생의 기쁨과 슬픔도 주었습니다. 또한 여성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숙명을 주었습니다.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이 바다의 요정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물고기 조각이 있는 것이지만, 갈라테이아의 인간화가 끝났을 때, 조각이 모두 생명을 얻었을 때, 저 물고기가 어떻게 될지는 자명합니다. 죽게 됩니다.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결국 죽게 될 운명 또한 주게 됩니다. 그래서 조각이 사람이 되는 순간에, 사람을 돌조각으로 만드는 메두사의 얼굴을 마주하게 됩니다.

제롬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가장 잘 표현한 듯 합니다. 그가 1912년 창작한 희곡 ‘피그말리온’은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에게 생명을 주고 사랑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조각가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Living Doll’, 살아있는 인형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갈라테이아는 피그말리온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도 합니다. 버나드 쇼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신데렐라 이야기를 좋아했기 때문인지, 그의 희곡은 결국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영화와 뮤지컬로 만들어지게 됩니다만, 버나드 쇼는 창조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서 창조자의 의도대로 살아갈 뿐이라면 그 생명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희망, 하나님의 구속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돌아온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위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명기 역사서의 절정을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라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성경을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믿음, 신앙’이라는 관점에서 읽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우리를 향해 보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관점에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신앙의 선조들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을 반대로 읽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믿음’으로 읽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타락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타락해왔고,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왔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이 땅을 좋아하셨기에 이 땅을 관리할 사람을 만드십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 땅을 ‘좋은 상태’로 놔두지 않았고, 선악과(좋음과 나쁨의 열매)를 먹은 후에는 오히려 ‘나쁨 상태’로 만들어 갑니다. 살인을 행함으로 사람의 피로 땅을 적셨고, 점점 더 악한 일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악함으로 인해 이 땅을 다시 정리하실 필요를 느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믿으셨습니다. 그렇기에 ‘노아’라는 사람을 통해 이 땅을 재건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노아 이후에도 악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십니다. 그의 아들 이삭을 도우셨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도우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악한 일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저버리고 풍요가 약속된 애굽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민족은 결국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한 번 더 그들을 믿으셔서 그들을 약속된 땅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 과정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없이 많이 하나님을 실망시키지만,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한 번 더’ 그들을 믿으셨습니다.

약속된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또다시 죄를 짓습니다. 악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때만 잠깐 돌아왔다가 다시금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믿으셨기에 다시 돌아오게끔 시련을 내리십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이스라엘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굳이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 아니라 시련을 이겨내면 그만 아닌가? 그래서 시련, 이웃 나라로부터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한 필요조건, 왕을 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믿으셨지만, 사람에게는 피그말리온 효과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바램과 희망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가겠다는 결정만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앞서 설명 드린 상황이 일반적인 작가들이 피그말리온에 대해 그린 그림의 내용과 같다면, 뒤에 나오는 상황, 사람들이 더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상황은 제롬의 작품과 연결됩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제롬은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작품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으로 볼 수 있지만, 대표적인 무신론자 중 한 명인 버나드 쇼가 이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의미 확장 시켰습니다.

저는 이런 의미가 이미 사무엘상 속에 들어가 있다고 봅니다. 1900년대를 살았던 버나드 쇼가 외친 말이 아니라, 이미 기원전 11세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창조주를 향해 외쳤던 소리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꼭두각시가 아니라고, 당신이 우리를 만들었고, 사랑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당신의 뜻대로 살아갈 의향이 없노라고 외칩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법이 아니라 우리의 법으로 살아가겠다고 외칩니다. 우리를 향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아니라 구속일 뿐이라고 외칩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 이후에 사무엘상으로부터 열왕기하에 나타나는 이야기들은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 사람을 왕으로 세운 이스라엘이 어떤 결론을 맞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왕은 오늘 본문 이후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이야기했던대로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키고, 백성들의 것을 갈취했습니다. 왕들이라고 해서 편하게만 살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은 병에 시달려야만 했고,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과 전쟁을 치러 아들을 죽이게 됩니다.

위대하다고 말해지는 다윗 왕의 손자 때에는 이스라엘이 북과 남으로 분열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 둘은 때때로 동맹을 맺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적대하며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외세에 의한 침략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북왕국은 앗수르에 의해, 남왕국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여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약속된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오해

신명기 역사서가 하나님을 떠난 삶의 결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그 핵심은 ‘하나님을 떠나지 말자’가 됩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 속에서 머리가 굵어진 우리들은 신명기 역사서의 이야기보다는 버나드 쇼의 말이 그럴싸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꼭두각시로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하나님 시키는대로만 살아간다면 우리 삶이, 우리의 자유의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믿음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희망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하기에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두각시와 같은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게 ‘동물에게 이름을 붙여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아담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만 보셨습니다. 다만 아담이 악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야 그의 앞을 막으셨습니다. 애초에 처음 만들어진 사람이 악한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점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뜻에 얽매려고 하시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제롬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페미니즘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제롬은 ‘비극’의 가면만을 놓지 않았습니다. ‘희극’의 가면도 함께 두었습니다. 삶은 분명 죽음이라는 운명으로 끝맺게 되며, 그 속에서 남성들이 정해놓은 여성의 역할을 어쩔 수 없이 수행해야만 하지만, 그 삶은 결코 비극이지만은 않다고 여지를 둡니다. 그곳에는 기쁨도 함께 있습니다. 그렇기에 갈라테이아는 오른손으로 피그말리온의 목을 껴안고 그의 입에 입술을 맞춥니다. 아직 큐피트의 화살이 그녀의 가슴에 꽂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자녀를 키워보신 분이라면, 자녀가 없더라도 자신의 후배에게 뭔가를 가르치려고 해본 적이 있으신 분이라면, 다들 느끼실 겁니다. 자녀들은 또 후배들은 부모와 선배의 가르침을 구속이라고 느끼며 피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부모나 선배는 후배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그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희망을 품고 믿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가르칩니다.

신명기 역사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속한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법 안에서만 살도록 만들었다고, 답답한 법을 지키며 살아가게 만들었다고 여기며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구속(拘束)하신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를 향한 믿음이요, 소망이요,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에 응답하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라며, 하나님의 소망에 부응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누리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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