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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과 독일의 개신교 사회주의 운동라가츠 이전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들
류장현 | 승인 2018.07.26 22:32

이번 글에서부터는 라가츠 이전의 개신교 사회사상으로서 강한 칼빈주의적 전통에서 있는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과 루터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독일의 개신교 사회주의운동, 그리고 스위스 개신교들의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에 대한 상이한 입장과 그 한계점을 밝히고, 이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이해하고 라가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와 헤르만 쿠터 (Hermann Kutter)의 사상을 논하게 된다. 글의 분량상 영국과 독일의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을 되짚어 보고, 스위스 개신교들의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은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다.

1.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은 산업혁명에 의해 발생한 사회문제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최초의 기독교 사회운동이다. 유럽에서의 산업혁명은 산업의 급속한 발달과 함께 자본가와 산업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분화를 초래 했다. 이들 중 프롤레타리아는 장시간의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 비위생적인 주거 환경 속에서 완전히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미주 73)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프롤레타리아의 비인간적인 삶에 대하여 무관심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본가의 편에서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그가 되었다. 이 같은 교회의 태도는 교회와 노동운동 사이에 심한 적대 관계를 가져왔다. 노동운동은 점점 반종교적이고 반 교회적인 태도를 나타냈으며, 노동계급은 교회를 “민중의 아편”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비극적 상황”(미주 74) 속에서 사회문제를 교회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칼빈주의적 전통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 마우리스(Frederick Dension Maurice, 1865-1892), 킹슬레이(Charles Kingsley, 1819-1875), 그리고 로버트슨 (Frederick William Robertson)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노동문제에 접근했고,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실천 사항으로서 노동시간의 단축, 공장에서의 위생적인 작업환경, 노동자들의 주택문제의 해결 및 노동자 교육 등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상이한 기독교적 사상을 가지고 노동문제에 접근하여 상이한 실천방법을 통해 노동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칼라일의 칼빈주의적 퓨리탄 사회개량 사상

칼라일은 칼빈주의적 퓨리탄(청교도) 사상을 가지고 노동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미주 75) 그는 노동자의 빈곤, 고통, 억압의 근본 원인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있다고 보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비판했다. 그러나 칼라일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을 정확히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구체적 실천 방법은 자본주의 경제체제 내에서의 사회개혁이라는 사회개량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칼라일은 노동문제의 해결은 사회변혁이 아니라 법률제정 및 엘리트의 윤리적 의무, 즉 노동자들의 복지향상을 법률제정을 통하여 보장하고 지배계층과 유산계급의 사회적 책임감을 각성시키는데 있다고 보았다.(미주 76)

▲ 토마스 칼라일 ⓒGetty Image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칼라일 사상의 중요한 점은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인간의 자기실현은 노동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한데 있다. 칼라일의 사상은 킹슬레이를 거쳐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19세기 말에는 독일의 개신교 사회주의자 협의회(Evangelishe-Sozialen-Kongreß)에도 영향을 주었다. 라가츠는 칼라일을 일평생 자신의 삶과 사상의 지도자로 생각했다.(미주 77)

마우리스의 하나님 나라 사회주의 운동과 최초의 노동자 대학

마우리스는 칼라일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의 종교적·윤리적 차원에서의 실현이라는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노동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담지자는 교회이며(미주 78), 교회의 임무는 자신의 전조직을 가지고 이 하나님 나라를 역사적 상황에서 실현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러한 책임감 속에서 마우리스는 기독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칼라일의 법률제정을 통한 노동문제의 해결이라는 실천방법과는 달리 가난한 자, 억압당하는 자들과의 연대, 즉 기독교적 형재애를 통한 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을 통하여 노동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마우리스의 노동자들과의 연대성은 특히 노동자 교육을 통하여 나타났으며, 그는 1854년 최초의 노동자 대학(Arbeiter Hochschule)을 세웠다.(미주 79)

킹슬레이, 교회의 선교 과제로서 노동운동

킹슬레이는 칼라일과 마우리스의 사상과 사회적 요청을, 그의 유명한 소설 ‘Yeast’와 ‘Alton Locke’, 그리고 ‘Publizistik’ 등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전파했던 시인이자 목사였다. 킹슬레이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이념을 가지고 노동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는 교회의 선교 과제는 바로 이 세 가지 이념의 실현에 있다고 판단하고, 교회는 이 이념의 구체적 실현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연대의식과 노동운동에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킹슬레이는 노동운동에 있어서 혁명과 폭력을 반대했으며 자신의 주장을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교육 (Arbeiter Bildung)을 통해서 실현하려고 했다. 특히 그가 세운 노동자대학은 라가츠가 취리히의 ‘아우서실’(Aussersihl)에서 노동교육에 전념할 때 많은 영향을 주었다.(미주 80)

로버트슨의 하나님 형상의 회복으로서의 노동운동

마우리스와 킹슬레이의 제자이면서도 이들과는 달리 독특한 자신의 이론으로 노동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은 로버트슨이다. 그는 개인의 경건성의 중요함을 강조했고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노동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래서 로버트슨은 그리스도인의 임무를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있다고 보았다.

▲ 프레데릭 윌리엄 로버트슨 ⓒGetty Image

그는 이 관점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며 노동조합을 세우고, 노동자들의 위생적 인 주거환경과 노동시간의 단축, 그리고, 노동자교육 등 사회개혁의 실천적 요구를 주장했다.(미주 81) 로버트슨의 설교와 저술 등은 독일 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라가츠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미주 82)

영국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한계

이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라가츠의 금주운동, 사회교육, 구빈제도 등 사회적 실천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라가츠 자신도 이들의 주요 서적의 대부분을 읽었다.(미주 83) 또한 이들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노동현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교회의 각성과 책임감을 고취시켰으며, 노동자들을 위한 구체적인 사회개혁적 요구와 함께 그것은 위해 실천을 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의 사회활동은 단지 교회를 위한 운동임과 동시에 교회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운동이었을 뿐 교회와 세계 간에 막힌 담을 허무는 운동은 아니었다.(미주 84)

또한 이들은 사회개혁의 구체적 실천방법으로 자본주의 경제질서 내에서의 법의 제정, 그리스도의 형제애의 실천, 기업가에 대한 도덕적 각성의 촉구를 제시함으로써 사회개량적 측면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민중을 교회의 선교의 대상이나 구호의 대상으로만 인식하였고 역사와 변혁의 주체로서 인식하지 못하였다는데 그 한계가 있다. 이런 점에서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개신교 사회활동의 선구자이면서도 종교사회주의 운동과는 구별된다.

2. 독일에서의 개신교 사회주의 운동

독일에서의 개신교 사회주의 운동은 칼빈주의적 전통을 가진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루터적 사상의 영역에서 진행되었다. 이들은 루터의 두 왕국설에 근거하여 교회와 국가를 철저히 분리하고, 사회문제를 순수한 내면성의 문제로, 또한 교회 내적인 영역으로 국한시켰다.(미주 85) 독일의 개신교 사회주의자들로는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 영향 아래서 노동자 조합(Arbeitergenossenschaft)을 만드는데 일생을 바친 후버 (Vikfor Aime Huber, 1800-1869), 신약성서에서 사회민주주의적 경제 프로그램을 발견하고 이것을 실현하기를 원했던 토트(Rudolf Todt), ‘그리스도교 사회 노동자당’(Christlich-Soziale-Arbeiterpartei)을 창설한 스퇴커(Adolf Stoecker), 그리고 나우만(Friedrich Naumann, 1860-1919) 등이 있다.(미주 86) 그러나 여기서는 라가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스퇴거와 나우만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스퇴거의 그리스도교 사회노동자당 건설과 한계

스퇴거는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도덕적 갱신과 함께 사회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대안으로 1868년 1월 3일에 ‘그리스도교 사회노동자당’을 창설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민족주의 정당이며 부르조아적 정당이었다. 스퇴거는 이 정당의 목적을 기독교·황제·조국에 대한 사랑에 두었다.

▲ 아돌프 스퇴커 ⓒGetty Image

따라서 그는 사회민주주의의 국제주의와 무신론은 조국을 배반하고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조국·황제·교회의 적이라고 비판했다.(미주 87) 그의 사회주의의 강령은 신약성서 에베소서 4장 25절에 근거하고 있다.(미주 88) 그는 자본주의를 노동을 상품화하고 노동자를 비인간화시키는 제도로 이해했다.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는 사회혁명과 계급투쟁을 부정하는 수정주의적 사회주의이다.

스퇴거에 의하면 진정한 사회주의란 사회혁명이 아니라 사회개혁, 즉 기존 질서의 체제 내에서 연금 제도의 확립, 어린이 노동 및 주일 노동의 금지, 하루 8시간 노동제 확립, 고임금의 보장 등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주의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혁명을 촉발시키는 계급투쟁을 철저히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회적 불의와 증오 위에서 자라는 마르크스주의는 신적 질서와 인간적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조장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퇴거는 계급투쟁 대신 계급연대성을 주장했다.(미주 89) 이와 같은 스퇴거의 사회개량적이고 부르조아적인 보수주의 정당은 결국 성장하는 노동계급에 의해 몰락하고 만다.

나우만의 스퇴거 비판과 민중 예수

이와는 달리 나우만은 스퇴거의 보수적이 부르조아적 노선과, 비헤른(Johann Hintich Wichern: 내지선교의 창설자)의 종교적 편협성에서 벗어나 도덕문제의 원인을 사회적·경제적 원인에서 찾고, 자유방임주의를 부정했다.(미주 90) 그의 신학의 중심사상은 그가 저술한 ‘민중 예수’(Jesus als Voksmann) 안에 잘 나타나 있다. 나우만은 여기에서 전적으로 노동자를 위한 예수상을 그린다. 그러나 노동문제의 해결에 있어서는 철저히 비폭력적 수단을 요구하는 예수상을 제시했다. 이러한 나우만의 ‘민중 예수’는 라가츠의 초기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라가츠로 하여금 역사적 예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했다.

나우만은 ‘민주주의와 황제숭배’(Demokratie und Kaisertum, 1900)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오류는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태도,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 등한시한 점, 폭력을 통한 도덕적 실패,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와 현재에 대한 비판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이같은 나우만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는 사실상 사회주의에 대한 이탈을 의미하며, 기독교 복음의 정치적 결과들에 대한 그의 투신을 크게 줄어들게 했다.(미주 91) 그 결과 나우만은 36세 때인 1896년에 실질적으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에게서 이탈하였다. 이것은 나우만에게 있어서 “제2의 개종”이었다.(미주 92) 나우만의 관심은 종교와 정치, 그리스도와 민족을 어떻게 동시에 섬길 수 있는가를 설명하려는데 있었다. 나우만은 그리스도를 정치와는 무관한 종교적 인물로 만듦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는 인간의 발전의 모든 측면을 동정이나 형제 사랑 위에 건설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기독교는 어쩔 수 없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세계는 어디까지나 세계이며 권력이 동정 (Compassion)보다 앞선다.(미주 93)

이렇게 해서 나우만은 종교와 정치, 그리고 생존투쟁의 도덕을 만들어내는 세상의 신과 자비의 도덕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을 분리함으로써 “전쟁신학”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같은 나우만의 입장에 대하여 칼 바르트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허용했다고 비판했다.(미주 94)

라가츠는 나우만의 신학과 현실정치의 배후에는 민족국가나 민족적 힘속에서 나타난 역사적 힘에 대한 신앙, 즉 자유주의적 신학의 잔재가 있다고 보았다.(미주 95) 때문에 라가츠는 나우만을 “거짓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라가츠의 초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나우만은 1903년 이후 라가츠에게 더 이상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미주 96)

독일 개신교 사회주의 운동은 스퇴거의 보수주의적 부르조아 정당의 몰락과 나우만의 기독교 사회죽의 이탈, 그리고 1903년 독일 제국주의 의회 선거에서의 나우만의 사회주의 정당의 패배 이후 쇠퇴하고 말았다. 따라서 “독일은 영국의 마우리스와 같이 기독교 사회주의의 훌륭한 신학적 기초를 닦은 인물을 갖지 못했다.”(미주 97)

▲ 프리드리히 나우만 ⓒGetty Image

미주

(미주 73) 산업혁명과 계급분화에 대해서는, 소련과학아카데미 국제노동계급운동 연구소, 국제노동계급운동: 역사와 이론의 문제(서울: 전진출판사, 1989), 특히, 영국 노동계급의 비인간적 상황에 대해서는 G. 엥겔스, 박준식 외 역,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서울: 도서출판 두리, 1908)를 참조하라.
(미주 74) Paul Tillich, 송기득 역,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0), 229-230.
(미주 75) Markus Mattmüller, Leonhard Ragaz und Der Religiöse Sozialismus, Eine Biographie Bd. 1: Die Entwicklung der Persönlichkeit und des Werkes bis ins Jahr 1913 (Zollik - Zürich, 1957), 19. (이하 M. Mattmüller, Bd. I. 라고 쓴다.)
(미주 76) Andreas Lindt, Leonhard Ragaz: Studie zur Geschichte und Theologie des Religiosen Sozialismus (Zollikon - Zürich, 1957) s. 201. (이하 A. Lindt라고 쓴다.)
(미주 77) 위의 책, 같은 곳.
(미주 78) M. Mattmüller. Bd. I., s. 21. 마우리스는 하나님 나라의 담지자를 영국 국교회라고 생각했다.
(미주 79) A. Lindt, 202. 마우리스가 세운 최초의 노동자 대학은 런던에 있는 남자 노동자대학(Das Working Mans College)이다.
(미주 80) 위의 책, ss. 202-203.
(미주 81) 위의 책, ss. 204.
(미주 82) 위의 책, s. 205. 하르낙은 로버트슨의 책 ‘Religiöse Reden’을 출판했다.
(미주 83) 위의 책, s. 35. 라가츠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읽었다. ▲ Robertson의 ‘Religios Reder’, ‘Lebensbeshreibung’, ‘Predigten’, ‘Korintherbrief’, ▲ Kingsley의 ‘Lebensbeschreibung’, ‘Römer und Germanen’, ▲ Carlyle의 ‘Helden und Helden Verehrung’, ‘Sozial Politische Schriften’, ‘Einnerungen’ 등을 읽었다. M. 마트뮐러는 라가츠가 신학자 마우리스와 실천가 로드로우가 아닌 예언자 칼라일과 로버트슨으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했다.
(미주 84) 정하은, “틸리히와 종교사회주의 전선”, ‘현대와 신학 2집’, 1996, s. 165.
(미주 85) M. Mattmüller, Bd. 1., s.23.
(미주 86) 위의 책, ss. 24-28. 블룸하르트는 독일 개신교 사회주의자 운동에 넣을 수 있으나, 그의 종교사회주의의 독특성과 라가츠와의 직접적 연관성으로 인해 다음 장에서 쿠터와 함께 취급한다.
(미주 87) 위의 책, s. 25. 또는 A. Lindt의 앞의 책, s. 205도 참조하라.
(미주 88) 제임스 벤틀리, 김쾌상 옮김, 『기독교와 마르크시즘』 (서울: 일월서각, 1988), s. 31.
(미주 89) 위의 책, ss. 32-33.
(미주 90) 위의 책, ss. 34-35.
(미주 91) 위의 책, ss. 36-37.
(미주 92) 위의 책, s. 55. K. 바르트는 ‘제2의 개종’이라고 했다.
(미주 93) 위의 책, s. 38. 재인용.
(미주 94) 위의 책, s. 90.
(미주 95) M. Mattmüller, Bd. 1., ss. 97-98.
(미주 96) 위의 책, s. 99.
(미주 97) 제임스 벤틀리, 앞의 책, s. 38.

류장현  jena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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