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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명절, 우리 문화가 복음적입니다꽹가리 나팔 춤사위 넘치는 한가위감사예배 빠져봅시다
조헌정 | 승인 2005.09.14 00:00

한가위(추석)을 맞아 남한의 교회들이 당면한 서구일변도의 교회 예배 형식과 예전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우리의 전통을 살리는 민족문화의 예배 수용을 신학/성서적으로 살펴본다.

제목 : 샘이 솟게 하라
본문 : 레 23,37-43; 요 7,37-39

[복음과 전통문화의 수용]

   
향린교회는 복음의 사회적 실천 외에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는데 그것은 국악예배입니다. 11년 전 예향국악단의 창설 그리고 국악찬송가의 발행 등을 통해 우리 향린교회는 모든 한국교회들에게 전통문화 수용에 길잡이가 되어 왔습니다.

복음과 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적인 관계입니다. 복음은 본질적인 것으로 변하지 않지만 그 복음을 담는 그릇은 시대와 이를 받아들이는 구성원들의 문화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음악에도 시대적인 변화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교회 안에서 기타를 치는 일로 찬반이 많았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어떻게 세상 악기인 기타를 교회 안에서 칠 수 있느냐고 해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기타는 말할 것도 없고, 드럼까지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피아노나 올갠도 처음부터 교회가 만든 종교용 악기가 아닙니다. 본래는 세속 악기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교회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징이라든가 장구와 같은 국악기도 점차 많은 교회들이 사용할 것입니다.

  징소리에 놀라는 교인 그러나 탁상종도 일제 잔재인줄은 아는지

현재 아시아 아프리카를 위시한 많은 민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전통문화에 접목한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창출해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에는 전통 춤과 전통 악기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우리 한국교인들은 너무나 서구일변도로 되어 있어 기타나 드럼을 예배에 사용하면서도 장구나 징은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몇 달 전에는 새로운 한 가족이 저희 예배에 참여했다가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를 듣자말자 절간에 온줄 알고 기겁을 해서 나간 적이 있습니다.

왜 다 함께 묵도합시다. 하면서 땡!하는 탁상종은 당연시 여기면서 우리의 고유 악기인 징소리에는 기겁을 하는 것입니까? 자기 것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자기 것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사람이 어찌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다함께 묵도합시다. 하며 탁상에 있는 종을 치는 교회는 제가 아는 한 한국교회밖에 없습니다. 이는 일제의 군국주의와 일본세속식전의 영향입니다.

또 결혼예식이나 성찬예식 할 때 하얀 장갑을 끼는 것 또한 일제의 영향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식들 가운데는 실상은 전혀 기독교적이 아닌 것도 있고, 우리의 전통과는 무관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성서의 근본정신에서 변혁과 자유 민중해방이라는 근본정신에서 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일랜드 선술집 노래가 장례찬송 선호도 1순위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는 모두 성서적인 것이냐? 하고 물으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다.라고 답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교인들이 잘 부르는 찬송가 ‘주의 피로 이룬 샘물...’‘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이 마음... 주의 보혈 흐르는데 믿고 뛰어 나아갗 피와 관련한 찬송가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이런 찬송들은 모두 19세기 말 미국에서의 부흥운동 때에 자주 불려 지던 노래들입니다.

일전에 저희 교회를 방문하시어 하늘 뜻을 펴신 헨리페리목사는 미국 교회사교수이자 3대째 장로교 집안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런 노래는 처음 들어본다고 하십니다. 이런 노래들은 미국선교사를 통해 왔지만 실상 미국교회에서는 한때 부흥성가로 불려지다가 예배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어 사라진 노래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의 흐름으로 보면 우리 한국교회가 얼마나 변화에 더딘지 그리고 얼마나 보수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예는 기독교 장례식장에서 어김없이 들려지는 찬송가 중엶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송입니다. 아마 장례곡 선호도 1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회 찬송으로 버젓이 부르는 교회는 한국교회뿐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더군다나 장례식에서 즐겨 사용하는 교회 또한 한국교회뿐입니다.

이 노래는 원래 아일랜드 민요입니다. 지금도 아일랜드 선술집에서 술 몇 잔 먹고 거나하게 취하면 그들이 자주 부르는 노래가 바로 이 노래입니다. 오랫동안 영국식민지로 살았던 그들의 슬픈 가락이 우리 한국 사람의 정서에 딱 들어맞으니까 사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장로교 찬송가에는 '아리랑'이... 정작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한 열등감만 가득

이외에도 우리는 다른 민족의 국가나 전통민요도 하느님을 예배하는 찬송가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애국가를 예배시에 못 부를 이유도 없고, 우리나라 민요도 못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 미국장로교 찬송가에는 ‘아리랑’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예배 중에 ‘아리랑’을 부르면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호들갑을 떨 것입니다. 이는 서양 것과 기독교적인 것을 혼돈하기 때문이고 자신의 것은 낮추어보는 열등감 때문이 아닐까요?

   
▲ 농악 잔치를 벌이는 향린교회 2004년 한가위감사예배(사진 향린교회)
서양사람들이 와서 한국교회 예배에 참여하면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한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왜 한국교회는 설교가 두 번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면, 하나는 눈 감고 하고 하나는 눈 뜨고 하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장로님들의 대표기도가 너무 길고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과 같은 성경의 인물들의 이름이 거론되니까 그걸 눈감고 하는 설교로 착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목사님들 모이는 곳을 가면 거의 대부분이 넥타이를 매고 있고 한복을 입고 계시는 분은 소수입니다. 회사에 출근할 때 한복을 입고 가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은 우리 문화의 병든 모습입니다.

폴 틸리히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라고 했고, 리차드 니버는 Christ and Culture 라는 책에서 5가지 유형을 얘기하면서 ‘문화변혁의 그리스도’, 곧 복음은 문화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리차드 니이버를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 신학자들은 문화를 말할 때 대체로 부유 귀족들이 누리는 문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에서 특별히 향린교회에서 문화라고 할 때의 문화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하느님을 향하여 몸부림치는 고통 받는 자들의 민중문화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가진 자들이 누리는 향유문화에는 사회의 변혁보다는 체제 유지가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서구로부터의 탈피, 성서로의 복귀]

지금까지 서구선교신학은 서구문명권 밖에 있는 문화는 이방문화요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특별히 초기 선교사들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저등한 것으로 여겼고 우상과 미신으로 가득 찬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단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겨 금지시켰고, 전통음악이나 풍습을 멀리하였습니다. 그로인해 지금도 명절 때만 되면 조상제사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많은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제사를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공동체의 일치와 화평을 위해 제사에 참여할 것인가? 이를 조화롭게 만드는 제3의 길은 없는 것인가?

초기 선교사들은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제사를 포함한 모든 행위 예식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절까지도 우상숭배로 간주하였습니다. 절은 한마디로 어른에 대한 공경심의 한 표현이고 예절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자녀들이 위 어르신들에게 절을 하면서 문안인사를 드렸는데 그게 우상숭배인 것은 아닌 것이지요.

악수만 하던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의 절이 우상숭배로 보였을 것이고 반대로 어른에게 반갑다고 손을 내미는 저들의 행위는 예의도 모르는 상놈들의 짓거리로 보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파수도 중요하지만 문화의 수용도 중요한 것입니다.

  악수만 하던 선교사 눈에 우리의 절은 우상숭배로 보였을 것

오늘 여러분이 굿을 포함한 전통 풍물놀이를 보면서 서구문화의 시각을 벗고 우리의 것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최소한 성서의 눈, 하느님의 눈으로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야훼 하느님은 온 우주의 하느님이요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십니다. 예배라는 말을 우리의 순수한 말로 바꾼다면 어떤 말이 적절할 것인가? 사실, 예배(禮拜)라는 한자말도 '예의범절을 다하여 절을 한다'는 유교/불교의 배경을 갖고 만들어진 말입니다.

예배의 순수 우리말을 굳이 찾자면 ‘굿’이고 기도의 우리말은 ‘비나리’입니다. 바울이 아테네 아레오파고 신전 앞에서 외친대로 우리 조상들 또한 알지 못하는 신을 경배하였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다신적 자연신관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조상들의 신앙과 믿음을 다 배척하고 경시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한신대 교수였던 박근원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늘님 제사는 유교전통의 제사와도 다르고 기복과 치유 위주의 민간신앙의 제의와 혼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민간신앙과도 다른 성격의 것이다.

지난해 동안의 하늘님의 보호에 감사하고 미래의 평안을 간구하는 소위 ’안과태평(安過太平)‘을 기원하면서 천지신명께 드리는 축제였다. ... 한국 민속학의 연구결과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하게 무속과 엉켜있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과 동일시 할 수 없는 성격의 민족적 제사 행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원시 ’하나님 예배‘였다.고 할수 있다. 역사적으로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이 우리 조상들의 하늘님 제사의 대표적인 것들이었고 이런 축제들의 유산이 그리스도교 예배와의 접목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이런 축제유산이 오늘까지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가? 마을공동체의 축제인 도당굿이 겨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역사적으로 위기가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조선조 500년 동안에 이 축제가 끊어지지는 않았다.

우리의 민족축제 전승과 관련된 큰 비극은 19세기말 조선조의 개화파와 일제 침략집단과의 야합, 그리고 이 개화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개신교 선교에서 비롯되었다. 명분은 우리 사회에서 불합리한 미신적인 요소를 쓸어낸다는 것이었다.

마을마다 서낭당을 불태우고 당굿을 금지시켰다. 일제는 식민정책으로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모든 축제를 못하게 하였다.... 더 부끄러운 것은 한국에 들어온 그리스도교회 역시 식민주의 개화 이데올로기를 등에 없고 당굿의 장소였던 성황당을 불태우고 그 자리에 교회당을 세웠다.

그 사례도 수백개나 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상징적인 의미이다. 민족적인 축제의 장소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 자리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가 우리 겨레의 하늘님(당굿)에 새로운 의미부여를 해서 우리 민족의 축제를 계승하고 보전할 수 있을 때에는 그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런 제의민족 전승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극히 변두리에서 병고침과 기복주의와 같은 무속적인 기능만 수용했기 때문에 그만 의미를 잃고 말았다." (박근원 미발행 원고 ‘한국가락 찬송으로 드리는 예배’)

사회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실현의 최고 단계를 자아실현의 단계라고 보고 있습니다.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자기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근본적인 마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전통을 회복하고 이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우리 민족이 자아실현의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국악에도 아악과 향악이라는 두 계층의 음악이 있습니다. 아악의 연주는 음악연주의 감상만을 하게 되어 청중은 수동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향악은 청중의 참여를 전제로 한 음악입니다. 사실, 지금의 향린교회의 전통음악은 아악과 향악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편기자가 노래하는 바와 같이 예배 참여자가 함께 춤을 춤으로 우리 하느님을 마음껏 몸으로 마음으로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주일인가? 한가위(추석)감사주일인가?]

대부분의 남한의 교회들이 11월 셋째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이것은 순전히 미국교회의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미국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미국사회의 전통입니다.

현재 미국은 11월 넷째 목요일을 Thanksgiving Day라 해서 흩어졌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명절입니다. 처음에는 청교도들의 신앙을 본받고자 시작했지만 지금은 상업화되어 있어 신앙과는 별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날을 우리의 추수감사주일로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서의 감사주일인 초막절 말씀에 비추어 보더라도 우리 한국교회는 우리의 감사명절인 한가위/추석에 맞춰서 지키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또 이미 인구 90% 이상이 농촌을 떠나 도시산업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추수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초막절에 비추어 한가위감사주일이 합리적

오늘 우리가 추석감사주일을 지키면서 하느님께서 진정 원하는 감사가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유대백성들에게 초막절을 이렇게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칠월 십오일(음력입니다) 땅의 소출을 거두어들일 때 너희는 칠일간 야훼께 축제를 올려야 한다.'

그런데 축제로 지키라고 명하면서 42절에서 '칠일간 초막에 살아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에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광야에서 살게 하였던 그 해방의 기쁨을 상기시켜 주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2004년 향린교회 한가위감사예배. 교회 마당에서 농악과 함께 온교인이 함께 춤을 추며 즐기고 있다.(사진 향린교회)
여기서 우리는 감사절을 지키는 축제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신앙심 깊은 유대인들은 세계 어느 곳에 살든지 초막절이 되면 자기 집 뜰에 초막을 세우고 거기서 먹고 잡니다. 그리곤 듬성듬성 뚫어진 천장을 보면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수천년전 조상들이 겪었던 일들, 곧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는 이야기, 그 물에 이집트 군대가 빠져 죽은 이야기, 하느님께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되어 백성들을 인도해준 이야기, 반석에서 물을 내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이야기 등을 말해줍니다. 이게 산교육이지요.

제가 뉴욕서 공부할 때 길 건너에 유대인 신학대학이 있었습니다.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학교 뜰에다가 장막을 짓고 거기서 교수와 학생들이 식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호텔 앞에다가 초막을 짓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장소를 제공합니다. 호텔 방값을 내고 텐트에서 자는 겁니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은 지나친 형식이고 하나의 율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국민들에게 부족한 것이 이 모습입니다.

  참된 감사는 낮아짐과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것

요즘 ’경제살리기‘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전 무엇이 경제살리기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만달러 소득이 되면 경제살리기가 되는 것인지?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대국은 아니라 하더라도 세계 상위권에 속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눈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부자나라입니다. 제3세계 사람들이 막노동이나 해서 돈을 벌겠다고 오는 부자나라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남한사람들이 미국사람이나 일본사람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경제살리기를 해서 어떻게 살자는 말인지 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도 하구한날 떠드는 것이 경제살리기입니다. 경제살리기라는 말은 모든 나라가 평생토록 외치는 구호입니다. 5백 불도 못 벌던 40년 전에도 우리의 구호는 잘 살아 보세였고, 만 불을 버는 지금도 우리의 구호는 잘 살아 보세입니다. 무엇이 잘 사는 것입니까?

저는 정말 잘 사는 길은 자꾸만 높이높이 올라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낮아짐에 있습니다, 성장일변도에서 분배도 함께 하는 나눔 정신에 있다고 봅니다. 이 분배는 단지 남한 땅 안에서만이 아닌 한반도 전체를 감싸고 더 나아가 저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낯모르는 아이들까지도 감싸는 큰 나눔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늘 말씀과 같이 자기 집을 놔두고 초막에 거할 줄 아는 낮아짐과 넉넉함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아무 것도 없었던 모습으로 돌아가 보는 것, 진정 어려웠던 때로 돌아가 보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길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바벨탑을 높이 쌓아가자는 기복의 외침이 아닌, 광야의 메마른 곳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진리 안에서의 자유를 외쳐야 합니다.

[샘이 솟게 하라]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초막절 마지막 날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물을 마시기 원합니다. 샘물처럼 솟아나오는 시원한 물, 끊임이 없는 물, 나눠주고 나누어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물. 이 물을 얻기를 원합니다. 아니 주님은 주를 바로 믿으면 주님으로부터 생수를 조금 얻어먹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서 이 샘물이 솟아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샘물은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오늘 말씀에서 이 물은 곧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런데 아직 이 성령이 오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받으실 영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 죽음의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샘솟는 샘물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우리 또한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영광에 동참할 때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은 죽음의 낮아짐과 하늘을 향해 빈손을 펴는 가운데 임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비우고 주님 앞에 빈손을 내밀고 광야로 나아가십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솟아나오는 샘물이 되어 세상의 목마름을 적시는 자유와 해방의 영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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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향린교회 2004년 한가위감사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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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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