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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개신교와 노동문제라가츠 이전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들 2
류장현 교수(한신대 신학부/조직신학) | 승인 2018.08.02 21:45

스위스 개신교와 노동문제, 그리고 사회주의와의 만남은 이미 19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스위스는 19세기에 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노동자의 빈곤현상과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의 급격한 성장이 있었다.(미주 98) 그러나 교회가 급변하는 사회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시 노동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나타났고 교파주의(Kirchlichkeit)의 쇠퇴를 초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노동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고(미주 99) 공업지대에 대한 선교문제, 사회구조적 변화에 대한 교회의 구제사업의 개선문제, 사회보장법에 대한 법률 개정문제, 그리고 노동자들의 혁명적 희망에 대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미주 100)

이와 같은 문제 제기에 대한 스위스 개신교의 활동은 대부분이 구조사업의 차원에서, 그리고 공적인 활동보다는 사적인 활동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미주 101) 각종 사회  복지 시설물과 도시선교(Standtmission) 기관(미주 102)이 세워졌다. 이들의 활동은 사회구조적 개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도시 노동자들을 자선의 대상으로 보고 이들을 구체적 측면에서 돌보는 데 있었다.

이에 반해 사회구조적 개혁을 위한 시도는 1860년 ‘내지선교’(Inner Mission)에서 일어났다. 1848년 혁명의 영향으로 비헤른에 의해 시작된 이 내지선교는 도시선교가 종교적 사회복지 정책적 차원에 머무른 반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자선 사업 조직을 산업 지역에 세우려고 하였다. 이 밖에도 사회문제에 대한 법률제도에도 관심을 가져 1877년 스위스 연방 공장법을 비롯한 각종 사회복지법이 제정되었다.(미주 103)

스위스 개신교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의 흐름

스위스 개신교가 사회주의적 노동운동과 그 속에서 나타난 혁명적 희망(즉, 세속적 구원론) 및 사회주의적 사상에 대응한 것은,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신학적 입장에 따라 크게 3기로 구분할 수 있다.(미주 104)

우리가 제1기에 주목해야 할 인물은 봐이틀링(Wilhelm Weitling, 1803-1871)이다. 그는 ‘가난한 죄인들의 복음’(Das Evangelium des armen Sünders)에서, 예수를 “공산주의자”로 이해했고,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을 “자유와 평등의 원리”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이 공산주의자인 예수가 “공산주의적 비밀단체”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곧 원시 기독교 공동체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봐이틀링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정치권력의 시녀가 되고 지배자의 이데올로기가 됨으로써 원시기독교가 가지고 있었던 혁명적인 운동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 빌헬름 봐이틀링(Wilhelm Weitling, 1803-1871) ⓒWikipedia

봐이틀링은 영과 물질, 기독교적 심령주의와 사회주의적 유물론을 화해 불가능한 반목으로 보는 이원론을 거부했다. 그는 이와 같은 이원론은 물질에 대한 비복음적 이해에 기인한 것이며, 예수가 일용할 양식과 육신의 필요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을 잊어  버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봐이틀링의 주장은 영과 물질의 이원론적 대립을 극복하고 복음을 가난한 자들의 복음으로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와 사회주의 의 대립을 극복하려고 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미주 105)

제2기에 중요한 인물은 쥔텔(Züntel)목사이다. 쥔텔은 개인주의적 내면성을 지향하는 신앙이나 비물질적 세계를 지향하는 교회의 이원론적 사고는 종교적, 도덕적 의식의 붕괴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영과 물질, 성과 속을 구별하고 “순수한 정신성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교회를 비판하면서, 교회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쥔텔은 교회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세계 정신이 주지주의와 관념론에서 현실주의로 이행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세상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진정한 통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세상적인 영역과 영적 영역의 구분을 거부하며 내면적 기독교라는 가능성조차도 배제했다. 왜냐하면 부활은 죽음과 어 둠을 이기는 객관적 승리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쥔텔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속일여의 사상과 물질적 세계에 대한 관심은, 노동자의 해방운동이 복음의 동력에서 유래한다는 인식을 낳게 했다.

제3기에 해당하는 기간은 사회민주당이 창당되고 노동조합의 결성이 증가되며,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 본격화 했던 시기이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스위스 개신교들은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이들은 노동문제에 대한 상이한 신학적 입장에 따라 크게 세 그룹으로 구분된다.(미주 106)

1) 스위스 목회자로서는 최초로 공산주의자가 된 브란트(Paul Brant. 1852-1910)와 블룸하르트의 영향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던 오이그스터-쥐스트(Howard Eugster-Züst, 1861-1932), 그리고 플뤼거(Paul Pflüger, 1865-1947)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목사, 2) 스위스 개신교 노동자 연맹에 속한 프롭스트(Jakob Probst, 1846-1910)와 벤츠(Gustav Benz, 1866-1937), 3) 캄블리(Conrad Wilhelm Kambli, 1829-1914)를 대표로 하는 자유주의적 목사 등이 있다.

여기서는 상이한 신학적 입장들을 대표하는 플뤼거, 프롭스트, 벤츠, 캄블리의 노동문제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플뤼거는 노동자 교회의 목사이며 사회민주당원으로서 윤리적 문화를 위한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모든 종교적 근거를 배제한 인도주의적 윤리를 전파하는 것이다. 플뤼거는 사회주의적 활동은 모든 종교적 근거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파울 플뤼거(Paul Pflüger, 1865-1947) ⓒWikipedia

플뤼거는 1897년 쿠르에서 있은 스위스 목사 대회에서 “교회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여기서 플뤼거는 종교에 근거하지 않은 윤리를 강조하면서 모든 사회주의적 활동으로부터 종교적 근거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미주 107) 이것은 바로 사회적 제반문제를 기독교적인 영역에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윤리성(Sittlichkeit)위에서 논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미주 108) 이와 같은 종교와 윤리의 구분은 플뤼거로 하여금 예수와 기독교를 윤리적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했다.

따라서 플뤼거는 예수의 활동을 “국민들의 도덕적 갱신”이라는 윤리적 활동으로 제한시켰다. 그는 교회가 이런 예수의 윤리적 활동을 버리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초월적 본질로 만들었기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독재자와 자본가의 편이 되었다고 말했다. 플뤼거는 윤리적 입장에서 기독교를 단순히 “윤리적 이상주의와 휴머니즘의 종교”로 이해했다.(미주 109) 이같은 플뤼거의 종교를 배제한 윤리와 휴머니즘의 강조는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종말론적 요소를 상실했으며, 복음을 사회윤리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범했다.(미주 110)

스위스 개신교 노동자연맹 사람들은 독일의 스퇴거와 나우만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노동자들 가운데서 사회 민주주의적 전통을 배제하며 개신교의 입장에서 사회문제에 접근한 데 있다.(미주 111)

프롭스트는 복음을 어떤 기존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질서와 일치시키는 오류를 지적하고, 교회가 바로 이같은 오류로 인하여 가진 자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음을 인식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는 “그리스도교적이라고 불리워질 자격”이 없는 실천적 유물론에 기인한 반 그리스도교적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프롭스트의 이러한 비판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교회에 대한 비판이었다.(미주 112)

플뤼거는 또한 사회주의도 반그리스도교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스퇴거의 영향으로 무신론적 철학과 유물론적 세계관을 반-신적이며 반-그리스도교적 철학이요 세계관으로 규정하고, 이런 철학과 세계관을 가진 사회주의를 개신교 신앙과 그리스도교적 삶의 적대 세력으로 보고 사회주의에 반대했다.(미주 113)

이와는 다른 입장에 있던 사람으로는 벤츠가 있다. 그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각종 노동악법을 개정하고 노동자를 위한 법을 제정한 노동법의 전문가이다. 벤츠는 기독교인들의 노동운동에의 참여를 기독교인의 “도덕적 의무”라고 보았다. 그러나 벤츠는 노동운동에서 도덕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계급관계를 “사회적 파트너”의 관계로 이해했으며, 이같은 이해는 그의 “조화로운 사회상”과 연결되어 사회적 변혁보다는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벤츠의 조화주의적 사회개혁론은 노동계급투쟁이 치열해지면서 그 한계가 노출되었고, 1910년 이후 벤츠는 더 이상 노동운동에 관여하지 못했다.(미주 114)

사회주의적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해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캄블리가 있다.(미주 115) 캄블리는 명실공히 “최초의 스위스적 신학자”로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임무와 사회민주주의와의 관계를 가장 긴박한 현실문제로 인식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미주 116)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서 속에서 사회 원리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무궁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었다.(미주 117)

이러한 사회원리에 의해서 캄블리는 사회주의를 판단하고 규정했으며, 사회민주주의를 혁명이 아니라 지속적인  평화적 개혁을 통하여 더 나은 정의와 법을 가져오는 사회정책으로 이해했다. 그는 이 사회주의적 이상은 국가의 간섭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합적 자립(Genossenschaftliche Selbsthilife)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미주 118) 그 때문에 캄블리는 사회문제를 사회적인 개혁보다는 도덕적, 종교적인 생활을 개혁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스위스 개신교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의 한계

이상에서 우리는 스위스 개신교 내에서 일어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한 상이한 신학적 이해와 사회문제의 해결방법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급속히 성장하는 노동계급 투쟁을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인식하면서도 그 본질은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계급투쟁에서 수반되는 자본가와 노동계급의 적대적 관계를 “사회적 파트너” 관계로 이해했으며, 노동운동에서 분출되는 혁명적 희망, 즉 세속적 구원론을 사회변혁으로 연결시키지 못한 채, 기존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인 평화적 개혁으로 해소시키는 오류를 범하였다. 또한 이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 보수적인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었으며,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 또한 윤리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고 구속사적·종말론적 요소를 상실했다. 이들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주의적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새롭게 이해한 사람들은  블룸하르트와 쿠터, 그리고 라가츠이다.

미주

(미주 98) 소련과학 아카데미 국제노동계급운동 연구소 편, 국제노동계급운동·1권 2부, s. 258, 263. 인터내셔날의 영향으로 1868년 이후 스위스에서는 노동조합들이 급속하게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1869년에는 이미 제네바에 23개, 바젤에 11개, 로잔에 8개, 취리히에 5개가 존재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프랑스 등에서는 인터내셔날이 합법적 지위를 갖지 못했으나 스위스에서는 합법적이었다. 스위스에서는 이미 1832년에 러다이트 운동이 있었고(국제노동계급운동, 1권 1부), 그 후 1868년 겐프에서 건축노동자들의 노동투쟁이 1868년 바젤에서 Bandarbeiterstreik가 있었다. 그   밖에 연방공장법 제정(1877년), 스위스 연방의 노동조합연맹 창설 (1880년), 최초의 스위스 사회민주당 창설 (1870년), Olten에서 노동자 연맹 (1873년)이 생겼다. (M. Mattmüller, Bd. I., ss. 30-34를 참조하라.)
(미주 99) 마트뮐러는 스위스 개신교가 노동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830년 이후부터라고 한다. (M. Mattmüller, Bd. I., s. 32.)
(미주 100) E. 부에스 / M. 마트뮐러, 『예언자적 사회주의』, 손규태 역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7), s.78.
(미주 101) 예) 바젤의 국가교회는 1833년 이후 바젤 지역에 프롤레타리아가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 1900년까지 한 사람의 목사도 파송하지 않았으며, 또 단 하나의 예배처도 신설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통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에 신학적 존쟁에만 관심이 있었다. (위의 책, s. 17.)
(미주 102) M. Mattmüller, Bd. I., s.33. 이 기관은 1852년 베른에서 처음 생겼고, 그 후 바젤(1859)과 취리히(1864)에 각각 생겼다. 이 도시선교는 새로이 발생한 프롤레타리아를 종교적, 사회복지 정책적 차원에서 돌보려는 시도였다.
(미주 103) 각종 사회복지법으로는 “알콜법 제정”(1822년), G. 벤츠 목사의 “실업보험 의무제”, A. 비찌우스 목사의 “극빈자를 위한 법률 제정” 등이 있다. (앞의 책, s. 18을 참조하라.)
(미주 104) 마트뮐러는 이 시기의 구분을 “제1기: 스위스에서 최초로 공산주의자가 등장한 때와 1848년 혁명 때”, “제2기: 1871년 파리꼬뮨 봉기 때”, “제3기: 1878년 사회주의법 제정-1888년 사회민주당 창당 때”로 나눈다. (『예언자적 사회주의』, ss. 19-20을 참조하라.)
(미주 105) E. 부에스 / M. 마트뮐러, 앞의 책, ss. 20-21.
(미주 106) 위의 책, ss. 23-24.
(미주 107) A. Lindt, ss. 222-223.
(미주 108) M. Mattmüller, Bd. 1., s. 44.
(미주 109) 위의 책, s. 45.
(미주 110) E. 부에스 / M. 마트뮐러, 앞의 책 s. 27.
(미주 111) A. Lindt, ss. 223-225.
(미주 112) E. 부에스/M. 마뮐트러, 앞의 책, s. 29.
(미주 113) 위의 책, s. 30.
(미주 114) 위의 책, s. 32.
(미주 115) 이 밖에 Zwingli Wirth, Luzi Michel(1841-1876), Albert Bitzius(1835-1882)등이 있다.
(미주 116) A. Lindt, s. 220.
(미주 117) 위의 책, 같은 곳.
(미주 118) 위의 책, s. 221.

류장현 교수(한신대 신학부/조직신학)  jena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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