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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민중교회운동의 위기와 그 극복들민중신학과 민중교회의 전망 3
한기양 목사(울산새생명교회) | 승인 2018.08.05 17:29

지난 7월16일 <죽재 서남동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광주YMCA 강당에서 “죽재 서남동 목사 탄생 100주년 34주기 추모예배와 심포지엄 문화제”를 개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울산새생명교회 한기양 목사님께서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의 전망”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셨습니다. 이 발제문을 에큐메니안에 게재합니다. 원고를 보내주신 한기양 목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1997년2월 정기총회에서 [기장 민중교회운동연합]은 조직명칭을 [기장 생명선교연대]로 바꾸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세계사적인 변화와 더불어 정치사회적인 상황 변화는 각 분야별로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요구받는 실정이었다. 이 즈음 개교회의 목회적 차원과 민중선교적 차원에서 다양한 영역과 신앙적 경향, 그리고 선교적 내용들이 제각각 모색되고 실천되었다.

생명 + 선교 + 연대

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한 이해도 일선 목회자에 따라 각기 다양해졌다. 당연히 이런 현상에 의해 민중교회운동 조직은 이완되어 갔으며 이전의 일치된 목표와 공통의 실천양식을 중심으로 형성된 단일한 대오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민중교회운동 조직은 각기 다양한 의견과 실천을 담아내는 데 실패했으며, 새로운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과 민중선교의 비전을 제시해주는 데도 한계를 노정하였다. 목회나 선교가 각 교회의 개별적인 상황이나 목회자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었으며, 점차 연합으로의 힘의 집중은 개교회로 분산되어져 갔다. …… 민중교회운동 조직은 지역에서도, 기독교운동에서도, 전체 운동에서도, 민중운동에서도, 교단갱신운동에서도 독자적이며 통일된 실천을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아무런 성과도 만들어내지 못하였다.”(미주 31)

당시 명칭변경을 논의할 때, 위의 고백에서와 같이 더 이상 ‘민중교회운동’이란 조직으로는 변화된 대내‧외적 상황을 담아내기 힘들다는 것을 함께 인식했다. 일반 민중운동 영역에서도 이른바 ‘보따리를 싸는 분위기’였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면서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정치사회적 정세변화는 사회운동 영역에서도 다양한 시민운동으로 분화,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런 정황에서 ‘민중교회운동’이란 명칭이 너무 무겁게 여겨졌다. 근본적인 목표는 변하지 않았지만, ‘거대담론’만으로는 ‘시민생활담론’을 요구하는 현실에 대응하기 힘들었고 전략적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본 것이었다. 21세기 주요한 키워드가 ‘생명’이고 ‘네트워크’라는 점에서 작명한 것이 [생명+선교+연대]였다.(미주 32)

민중선교의 지평을 넓히는 것으로서 변화된 환경에 뿌리내림, 즉 ‘개방성‧다양성‧포용성’을 담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2000년대를 맞이한 것이다. 민중교회들은 민중선교지향적 교회, 목회지향적 교회, 사회복지선교지향적 교회, 지역 및 부문별 시민운동지향적 교회 등으로 분화 분포된다.

▲ 민중교회협의회로 시작해 노동자·도시빈민과 애환을 같이했던 기장 생명선교연대가 2005년 당시 창립 20주년을 맞았었다. 사진은 2005년 열린 여름수련회에 참석한 회원들이다. ⓒ 생명선교연대

1990년대 중반 즈음 변화된 상황을 읽어내고 지향해야 할 좌표를 설정하는 ‘레이더’가 부재한 가운데 각 지역에 소재한 민중교회들은 ‘본능적 감각’으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행10:17~23,16:10) 새로운 선교영역들을 캐낸다. 그러면서도 현장을 해석하고 변화에 대응하는 ‘민중신학’의 부재를 절감하고 있었다.

당시 민중신학과의 단절에 대한 민중교회 목회자의 지적은 아직도 유효한 점이 없지 않다.

“특히 민중신학 2세대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선배들이 역사의 전면에 서서 민중들과 함께 투쟁해온 성과를 책상에서 요리할 생각을 그만두라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민중교회에 출석하여 민중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생활하며 같이 호흡하는 일일 것이다. 민중은 연구대상이 아니고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이다. 민중들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에서 민중과 함께 투쟁하는 곳에서만 민중신학은 살아 숨쉬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미주 33)

1세대 민중신학자는 언제나 민중교회를 새로운 교회운동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민중교회운동은 철저히 새로운 교회운동으로 출발했어야 했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고백에 걸맞는 예배, 기도, 신앙생활, 제도와 구조, 직제를 개발해나갔어야 했다. 민중교회운동의 정체성과 생존의 위기 역시 본질로 돌아가 본연의 새로운 교회운동을 전개할 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민중교회운동은 종말론적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새로운 교회운동이어야 한다.

그런데 2세대 민중신학자들은 ‘새로운 교회운동’ 대신 교회개혁운동으로 후퇴했다고 류장현은 지적한다. 그는 2세대 민중신학자들이 기존교회의 틀 안에서 민중교회 이념을 담아내려고 했을 때 그 관계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민중교회의 위기탈출을 위해 기존교회와의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민중교회의 정체성을 왜곡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2세대 민중신학자들이 제안한 기존교회와의 연대와 역할분담은 민중교회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생존전략이었을 수는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교회의 본질을 상실한 것이었다고 비판한다.(미주 34)

‘똥교회’에서 피어난 [들꽃피는마을]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큰다.” 이런 동요처럼 비록 그 대오는 흐트러졌지만 각 지역에 소재한 민중교회들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거나 민중의 신음에 성실하게 응답해 왔고 또 새롭게 응답해가고 있다.

“여느 때처럼 우리 부부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교회로 들어섰습니다. 바로 그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먼저 코를 찔렀습니다. … 놀란 것에 비해 궁금증은 쉽게 풀렸습니다. 서둘러 불을 켜고 교회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현관 바로 옆 공부방의 문을 여는 순간, 한껏 긴장했던 우리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들 여덟 명. 그것도 한 덩어리로 뭉쳐 곯아떨어진…. 겨우 열 살이 되었을까 싶은 아이부터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언제 빨아 입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꾀죄죄한 옷가지, 걸레가 되다시피 한 양말,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운동화 ….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회 문을 나서는 아이들을 따라가려니까,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도 못가서 다시 쓰러져서 눕는 게 아닙니까. 우리 부부도 그때서야 무엇엔가 얻어맞은 듯 가엾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교회로 찾아든 어린 아이들인데….’ 해서 다시 교회로 불러들여 아이들을 마저 재웠습니다.
… 결국 정오가 다 되어서야 아이들은 고단한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머리맡을 지키고 있던 우리 부부는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왜 여기서 자고 있었니?’ 숟가락을 쥐어주며 물었지만, 여덟 명의 아이들은 아구아구 밥을 퍼 넣기에 바빴습니다. 묻는 말에 답을 듣긴 틀린 모양이라 생각하면서, … 신신당부하며 떠나보냈습니다. ‘이젠 여기 들어오지 마라. 부모님들께서 걱정하실 테니 곧장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아이들과의 이 만남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도 아이들은 간혹 교회로 스며들었습니다. … 아이들이 자고 가면 교회가 난장판이 되곤 했습니다. 더군다나 녀석들은 자고 가면서, 교회 한구석에 똥까지 싸놓고 가곤 했습니다. 혹시나 ‘똥교회’라고 소문이라도 날까 싶어 아무도 모르게 똥을 치우고 물로 싹싹 닦아냈습니다. … 성난 표정으로 다신 오지 말라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튼튼한 자물통 네 개를 사다가 밤이면 교회의 셔터문을 닫아걸었습니다.
…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며 그저 밥이나 한 끼 달라고 했는데, 그저 못 이기는 척 밥이나 한 끼 내주었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이때 문득 사고를 치고야 말았습니다. 불현듯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헤어진 이야기, 얻어터진 이야기, 집을 나온 이야기, 나와서 거리에서 살아온 이야기, 서로를 만나게 된 이야기 ….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부부는 한 일주일쯤 이 아이들에게 시간을 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우리는 아이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는 쉽지 않겠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이미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결국 우리의 계획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진즉에 세워놓으신 계획이었다고 고백하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미주 35)

1994년9월 어느 날 교회에 몰래 들어와 잠을 자던 가출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우여곡절 끝에 그들과 함께 살게 된 김현수 목사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시작된 [들꽃피는마을]의 사례는 ‘그룹홈’이라는 형태의 우리나라 청소년복지 모델의 대표적인 경우로 손꼽을 수 있다. 이후 여러 개의 ‘그룹홈’으로 형성된 [사단법인 들꽃청소년세상]과 청소년교육을 위한 대안학교 [들꽃피는학교]로 발전한다.

▲ 들꽃피는 학교 ⓒ들꽃피는 학교 홈페이지

느닷없이 닥쳐와 시작해버린 이 일을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섬세하신 계획안에 있었던” 일(미주 36)이라고 고백하는 그는 덜컥 일을 벌이고만 것을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콩깍지의 맹목을 몰라서도 아니요, 그 뒷일이 걱정되지 않아서도 아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안 될 것 같은 강렬함 때문이었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미주 37)고 고백했다. 아마도 그의 내면에 잠재된 마그마와 같은 열정이 성령의 이끄시는 부르심에 응답하며 표출된 것이리라.

민중교회운동을 온몸으로 맞서서 살아온 1세대에 속하는 그는 [안산노동교회]의 경험과 지역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경험, 그리고 탈진된 상황에서 마침내 위로하시는 ‘그 분’을 만나는 체험을 했다고 고백한다. 그 아이들을 만나면서 이미 ‘콩깍지’는 그의 내면에 만들어져 있었던 셈이다.

열다섯 살 자폐증세가 있는 아이가 그룹홈 ‘예수가정’에서 생활하면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살면서 치유되는 사건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렇게 아이들은 닫힌 마음으로 닫힌 마음을 엽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상처로 상처를 치유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눈물로 눈물을 달랩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절망으로 절망을 이겨냅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버림받은 마음으로 버림받은 마음을 위로합니다. … 아이들이 알건 모르건, 우리 사회가 알건 모르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아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에 담긴 깨달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주 38)

미주

(미주 31) 기장 생명선교연대 발제위원회, “기장 생명선교연대 위상정립을 위하여”(「생명선교연대 20주년 기념자료집」, 2005), 244.
(미주 32) 1997년2월3일 제12차 정기총회에서 이해학, 최의팔, 노창식, 한기양, 이재호 등 소위원회로 모여 총회에 제안할 명칭변경에 대한 안건을 초안하면서 작명했다. 그해 4월28일 임시총회를 열고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생명선교연대]로 개칭하여 채택하게 된다.
(미주 33) 김광훈, “민중신학과 민중교회 태동의 역사적 의미”(『갈릴리로 가신 예수』, 1996), 329.
(미주 34) 류장현, “민중교회론의 신학적 재정립”, 위 각주20)의 책, 166~178.
(미주 35) 김현수, 『똥교회 목사의 들꽃피는마을 이야기』(서울: 청어람미디어, 2004), 20~28.
(미주 36) 위의 책, 221.
(미주 37) 위의 책, 31.
(미주 38) 위의 책, 242-243.

한기양 목사(울산새생명교회)  ecohan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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