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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frame) 논쟁, 어떻게 진보를 재구성할 것인가?J.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읽고
이정배 | 승인 2018.08.08 22:11

10여 년 전 출간되었으나 개정, 증보판으로 새롭게 선보인 J.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은 이 땅의 진보 정치가들이 즐겨 읽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도 읽었고 JTBC방송의 손석희도 추천사를 썼으며 문재인 정부를 뒷받침하는 참모들 역시 이 책에 손때를 묻히고 있다.

오랜 세월 우리는 보수집단이 만든 프레임에 갇혔고 그를 벗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아픈 역사를 경험했다. ‘종북’ 프레임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남북 대화로 이것이 낡은 프레임으로 판명되자 동성애, 난민 등의 새 프레임이 생겨났고 그와 더불어 다시 전쟁(?) 중이다.

위 책의 저자 J. 레이코프는 버클리 대학교 인지학자로서 우리들 뇌 속에 프레임이 학습, 구조화 된 탓에 좀처럼 자유롭기 어렵다고 한다. 책 제목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바로 이를 적시한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 사람들 머릿속에 어느 덧 코끼리가 떠올려 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껏 보수가 만든 프레임이 세상을 지배해 왔다고 말한다. 물론 미국의 경우겠으나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촛불 혁명 후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지만 보수가 만든 프레임이 여전히 우리들 뇌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탓이다. 이에 익숙한 보수가 지속적으로 프레임을 만들고 있다. 이런 연유로 저자는 이 책에서 프레임 전쟁에서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진보가 이길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보수 프레임에서 자유로운 진보적 프레임,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1.

주지하듯 프레임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 무의식의 산물이고 무의식은 뇌(몸) 속에 잠재(고정)된 탓에 쉽게 바뀔 수 없다. 의식(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유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뇌의 회로에 따라 사유할 뿐이다. 그렇기에 학자들은 프레임을 ‘인지적 무의식’이라 일컫는다. 의식적으로 접근할 수 없고 결과를 통해서만 들어나는 까닭이다.

여기서 저자는 이런 무의식을 의식으로 끌어내는 일에 관심한다. 인지과학을 통해 프레임을 재구성하기 위함이었다. 사회변화가 그로부터 비롯할 수 있다고 저자는 확신했다. 공적담론 프레임의 재구성은 전혀 다른 언어를 필요로 한다.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다른 언어가 필요한 탓이다. 무의식적으로 믿는 것을 의식화시키는 작업이 반복되어야 가능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요청했다. 지금껏 보수 프레임의 승리는 이런 체계를 확보한 결과이다. 사실 진보/보수는 모두 저마다 도덕적 차원을 지녔다. 옳고 틀린 적대적 관계가 아닌 것이다. 이들 사이에는 도덕적 차(差)가 있을 뿐이다. 이런 차이를 뇌 신경회로 속에 고정화시키는 것이 프레임 전쟁의 핵심이자 요체라 하겠다.

2.

프레임을 벗는 첩경은 우선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치 않는 일이다. 예컨대 공공재를 축소 지향한 보수 정권은 ‘세금 폭탄’, ‘세금 구제’와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세금을 통해 공공성을 확보하려는 진보세력의 명줄을 끊고자 ‘폭탄’이란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여 대중을 호도한 것이다. 세금은 곧 고통이란 프레임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반면 ‘구제’란 말을 통해 보수는 세금고통을 치유하는 구세주임을 각인 시켰다. 이처럼 보수는 진보를 자신들 프레임에 갇히도록 언어의 덫을 놓았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이명박에게 정권을 내 준 것도 이런 프레임 전쟁에서의 패배 때문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미국 경우를 예로 들며 이들 프레임의 원(原)출처로서 국가를 가정에 비유(은유)하는 두 가지 방식을 설명했다. 엄격한 아버지 가정과 자상한 부모 가정. 물론 이들 은유의 끝은 기독교의 하느님(神)이해에 까지 닿아있다. 저자는 이 점을 지나치듯 넘어갔으나 필자에겐 더없이 중차대한 주제로 여겨졌다. 물론 후술할 주제이겠으나 프레임 이론이 이 땅에서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라도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이 물어져야 옳다.

전자의 은유는 세상이 험하고 악이 지배한다는 세계관을 전제한다. 그럴수록 힘을 소유한 아버지에게의 순종이 미덕이다. 세상 악으로부터의 보호를 받는 탓이다. 때론 절제력을 위해 체벌도 가능하다. 보수주의는 이런 프레임을 내면화 시켰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바로 여기서 비롯했다. 사적 이익 추구가 도덕적 행동이기에 가난은 개인 탓으로 치부되었다. 사회복지는 사람을 의존적 존재로 만들기에 오히려 비도덕적이라 비난 받는다. 이를 낭비성 지출이라 보고 ‘구제’란 이름하에 세금 감세에 역점을 둔다. 오히려 그 돈으로 군사력을 강화시키고자 한다. 이는 오로지 힘 있는 엄격한 아버지의 도덕(프레임)을 정치에 활용하는 양태라 하겠다. 앞서 말했듯이 엄격한 아버지의 원형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가부장적 하느님일 수밖에 없다.

반면 진보세력은 자상한 부모(가정)라는 은유를 내면화 시켰다. 여기서 핵심가치는 감정이입과 약자에 대한 돌봄 그리고 세상을 위한 헌신이다. 세상의 중심을 약자에게서 보는 시각을 견지한 것이다. 여성신학은 이런 가치를 풀어낸 담론중 하나라 할 것이다. 여기선 인간에 대해 자연, 자본가에 대해 노동자가 우선이며 소수자, 이민자에 대하 배려가 깊다.

물론 이런 진보적 가치를 공유함에도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강조 차(差)에 따른 진보의 분열이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럴수록 진보의 공유된 가치가 더없이 중요하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방식을 터득할 필요가 크다.

그동안 전자의 프레임이 후자를 압도했던 현실에서 말이다. 보수주의자를 어리석고 이기적인 사람이라 비판하는 것에 진보의 역할이 있지 않다. 가난한 이들이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는 보수진영에 표를 던지는 상황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주지하듯 인간은 누구나 이런 두 가지 은유를 갖고 인생을 산다. 어느 한 세계관에 절대적으로 의존치 않는다. 그럴수록 프레임 싸움에서 승자되는 것이 중요하다. 진보에게 새로운 언어 계발이 필요한 이유이다.

여기서 저자는 다시 ‘세금’에 대한 다른 생각과 다른 언어를 제시한다. 우선 세금을 모두가 함께하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발상을 전환시켰다. 또한 누구도 혼자 힘으로 돈을 벌 수 없는 현실에서 세금을 일컬어 사회와 국가를 향해 되갚는 행위라고도 했다. 이런 언어를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통해 반복 사용함으로써 ‘폭탄’과 ‘구제’라는 보수 프레임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시종일관 진보적 시각에서 언어를 창출하는 일이 관건이다. 진보적 가치에 입각한 언어를 갖고서 다른 프레임을 만들어 보수 가치와 맞서는 일이 정치의 핵심이자, 종교의 정치적 과제라 할 것이다. 우리들 기독교 신앙 역시 프레임 化되어 있기에 하는 말이다. 미국서 건너 온 엄격하되 전능한 하느님(아버지) 관념이 뇌 회로 속에 인 박혀 보수적 세계관을 확대 재생산 시키는 상황에서 ‘다른’ 기독교가 요청된다. ‘다른’ 기독교는 앞서 말한 ‘다른’ 언어를 힘입어 재구성될  수 있겠다.

3.

말했듯이 프레임은 단 시간에 바뀔 수 없다. 새롭게 프레임을 계발하는 일 역시 긴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지금껏 뇌 속에 형성된 프레임에 따라 인간은 행동했고 그 과정을 통해 프레임이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반사성(reflectivity)을 이용하여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종전과 다른 새 프레임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지구 온난화, 빈부격차 등 세계적인 문제가 산적한 현실에서 말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새 프레임을 위한 인과관계의 두 측면, 직접적/유기적 인과관계의 양면을 소개했다. 이 부분은 첫 출판에 없었던 내용으로서 금번 개정판에 수록되었다.

우리들 일상에서 인과관계의 직접성은 너무도 확연하다. 예컨대 무릎에 상처가 난 것은 달리다가 넘어진 탓이다. 유기적 인과관계는 이와 달리 직접 경험할 수 없다. 기후변동 및 붕괴 현실이 그렇다. 한 쪽에서 많은 에너지를 쓸 경우 전혀 낯선 곳에서 기상 이변이 생기는 까닭이다.

하지만 직접적 인과 관계가 지배하는 일상에서 기후 붕괴의 개념화가 쉽지 않다. 생태학 영역에서 뿐 아니라 경제학 분야에서도 개념화는 여전히 어렵다. 여기서 저자는 신경과학이 발견한 뉴런 체계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자기 밖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감정이입 능력을 부여하는 까닭이다. 타인의 행동과 자기 뇌 활동이 신경적으로 짝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웃 및 자연의 고통, 신음소리를 들을 때 우리들 뇌에서도 고통을 느끼는 중추(中樞)가 활성화된다.

그러나 이런 연결이 불가능한 사람도 있다. 양육방식, 가정환경의 영향 탓에 자기 이익(행복)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경우이다. 우리 사회의 물의를 일으켰던 대한항공 일가(一家)의 사례가 바로 이를 적시한다. 보수적 도덕체계일수록 개인의 능력, 책임에 초점을 맞추며 반면 진보적 도덕체계는 감정이입에 충실하다.

지금껏 보수적 도덕체계는 늘 상 보수적 언어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뇌 속의 보수적 회로망이 활성화된 것이다. 작은 정부론을 주장하며 일체의 민영화를 추동하는 ‘신자유주의’가 바로 그 실상이겠다. 그러나 정말 ‘자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야 옳다.

4.

저자에 따르면 미국은 본래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에 의존한다’는 원칙하에 세워졌다. 공공재가 부재할 경우 만족스런 개인 사생활은 불가능하다 여긴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한 진리이다. 개인만을 위한 절대적 자유는 애시당초 없다.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에 의존하는 까닭이다. 거듭 말하지만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보지 못한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혐오스럽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여긴다. 이들에겐 개인의 능력과 책임이 가치론적으로 앞서 있다. 이것이 보수를 결집시키는 가치이다.

그렇다면 과연 보수화된 뇌가 변화될 수 있을 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이중개념주의’란 말을 사용한다. 우리들 뇌에는 진보/보수의 가치가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상충하는 신경회로는 서로를 억제하며 맥락에 따라 달리 작용한다고 했다. 즉 상이한 주제에 따라 상호 다른 뇌 회로를 넘나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보수 집단이 이중개념 소유자들을 보수적 뇌 회로로 이끄는데 성공했다. 이제 진보는 상대편 언어를 사용치 않으면서 뇌 회로의 방향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공적담론에서 보수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진보에게 있어 자충수일 뿐이다. 즉 진보는 끝까지 진보적 언어로 승부해야 옳다.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 곧 자유를 가능케 한다는 것을 보수 세력에게 입력시키란 말이다.

하지만 현실정치의 장(場)에서 보수 세력이 ‘자유’의 개념을 선취하고 말았다. 자유의 본래적 의미를 왜곡시켜 나름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자유의 사적 차원을 가시화시키면서 말이다. 보수는 저렴한 건강보험제도를 ‘오바마 케어’라 칭(稱)하며 정부가 건강보험을 장악했다고 공세를 퍼부었다. 이들은 공교육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대신 교육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보수가치의 확대 재생산을 목적한 것이었다. 빈곤 역시 앞서 언급대로 개인적 삶의 실패로만 여겼다. 따라서 사회복지제도 역시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 난민을 범죄자로 보고 수용불가 입장을 택한 것 역시 자국민의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자유는 근본에서 이탈하여 사적 개인을 앞세우는 보수의 가치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미래는 이들 상대적 약자들에게 감정이입하는 진보적 가치에 달려있다. 어떻게 우리는 이 과제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인가?

5.

저자는 빈부격차 가속화를 염려한 『21세기 자본』의 저자 피케티의 견해를 길게 소개했다. 기후붕괴뿐 아니라 경제영역에 있어서 사적 자유가 아니라 유기적 원인을 파헤치기 위함이다. 피케티의 고언을 통해 프레임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피케티는 두 종류의 부(富)를 예시했다. 생산에 의한 부와 재투자에 의한 부가 그것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재투자에 의한 부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자본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했다. 부자들의 몫이 늘어날수록 정치 로비스트의 영향력이 커지고 방송장악을 통해 공적담론을 통제하는 까닭이다. 타인의 권리를 제약시켜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이다. 효율을 내세워 노동자를 자산이 아니라 일회용 자원으로 취급하는 반(反)인권적 행위도 빈번하게 발생된다.

이렇듯 부(富)의 기하급수적 축적은 결국 공적자원의 공급을 희생시킨다.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전체가 희생되는 상황을 초래한다. 지구온난화를 심화시키듯이 그렇게 말이다. 한마디로 이런 결과들은 자유 남용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기에 피케티의 통찰은 단순히 불평등에 대한 고발만이 아니다. 앞서 말한바, 경제와 생태, 사회와 자연에 있어서의 유기적 인과관계를 포괄적으로 적시한 것이다. 피케티의 고발은 프레임의 변화를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사(私)가 공(公)에 의존 한다’는 진보적 프레임의 당위성을 말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언어가 뇌 회로에 영향을 미치면 인간 뇌 구조 역시 달리 형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점에서 종교의 역할이 다시 중요해졌다. 본래 ‘다시 연결 한다’(re-ligio)는 뜻을 지닌 종교에게 公私를 재(再)구조화시킬 책무가 생긴 까닭이다.

6.

그럼에도 여전히 급속하게 증가하는 초부유층의 부(富), 급속한 기후재앙, 공적자원의 급진적 사유화 그리고 헌법적용 대상으로서의 인간 등이 대중들 속에서 아직 프레임화 되지 못했다. 이런 사안들이 상호 유기적 관계 속에 있음을 파악치 못한 결과일 것이다. 그 총체적 원인을 저자는 ‘기업의 지배’란 개념에서 찾았다.

주지하듯 최근 미국 대법원은 기업을 권리를 지닌 ‘사람(法人)’으로 판결했다. ‘기업이 곧 사람’이란 은유는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본 은유에 터해, 기업은 ‘사람’으로서 발언할 법적 권리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업이 버는 모든 돈은 결국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애매한 명제도 생겨났다.

이로써 기업에 의한 지배의 합법화가 완성되었고 이런 보수적 정치 판결이 위 주제들의 공적 담론화 과정을 방해했다. 지나치게 부를 축적한 기업의 부정적 역할 프레임을 구성(개념화)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기업의 정치로비가 한층 극심해졌고 기업의 비효율성이 증가되었으며 기업의 사업비용을 공공의 몫으로 전가(비용의 외부화)시키는 불합리한 상황을 야기했다. 생태계질서를 교란시키는 기후붕괴와 지구적 차원의 빈곤화 역시 ‘기업 지배’의 최종적 결과물들이다.

이렇듯 부(富)의 전유와 기후붕괴는 오로지 기업에 의한 지배 탓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인간의 자유 또한 한없이 축소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본 프레임은 아직도 낯설다. 이런 프레임을 공적 담론화 과정에서 구성하지 못한 것이 진보의 한계이자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이런 정황에서 종교역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7.

이어진 장에서 저자는 결혼 프레임에 대해 언급했다. 동성애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이다. 보수는 주로 이성애(愛)에 터해 결혼의 정의(定義)와 그의 신성함(sanity)을 개념화시켰다. 동성애를 반대할 목적에서다.

하지만 저자는 이 개념을 옳지 않게 여겼다. 결혼에 있어 지속적인 사랑과 헌신만이 결혼의 정의이자 신성함의 내용이라 본 탓이다. 이런 가치는 결코 이성애적 결혼에만 해당될 수 없다. 동성애 결혼 역시 헌신과 사랑을 요구한다. 이성결혼만을 고집하는 것을 규율을 강조하는 것은 엄격한 아버지 모델의 산물일 뿐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성결혼만을 신성하게 여기는 보수주의 프레임에 걸려들지 말 것을 충고했다. 이성결혼의 이혼율이 크게 증가추세에 잇는 현실에서 말이다. 사랑과 헌신에 갖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 그 누구와도 성별 관계없이 결혼할 자유가 우리에게 법적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동일 선상에서 저자는 9.11 테러 사건 발발 이후 보수가 구성한 ‘범죄’ 프레임도 설명했다. 테러리스트는 동성애자들처럼 극복할 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부시 정부는 ‘악의 축’이란 은유를 만들어 냈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아버지 국가인 한에서 자국을 공격하는 자는 누구든 악(惡)일 수밖에 없었다. 악의 부정을 위해 미국은 군사력(미사일 방어체계)을 정당화시켰다. 엄청난 군사력이 곧 미국에게 있어 권위이자 도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에게 처벌(보복)이 아니라 정의가 우선이었다.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미국의 자발적 변화를 요구한 것이다. 구조적으로 절망에 빠진 이슬람 국가들을 보살피라고 했다. 한마디로 테러의 조건을 없애라는 것이다. 이는 전 지구적 상호 의존을 깨닫고 정책의 초점을 평화에 맞출 때 가능하다. 엄격한 아버지 도덕을 갖고 미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한 테러는 항존 할 수밖에 없다.

8.

본 책 말미에서 저자는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말했듯이 보수주의 핵심에는 가정 내 아버지의 도덕(규율)이 자리한다. 이를 근거로 보수는 개인의 자유(私)를 앞세웠고 군사적 페권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를 추동했다. 진보주의자를 상대로 문화전쟁을 이끄는 ‘티파티’도 보수의 극단적 모습이다.

이런 보수주의자들의 생각은 항시 기독교 하느님에게서 비롯했다. 세상의 최후 보루로서 하느님이 순종해야 할 위계적 질서를 원한다고 믿은 탓이다. 그리스도 역시 이런 하느님의 법을 따르도록 인간을 구원할 뿐이다. 이것은 비서구문화에 대한 미국의 우위를 말하는 토대가 된다.

따라서 미국은 세상이 추종할 도덕적 국가로서 정치·경제 모든 면에서 우월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시장의 규제는 나쁜 것이 되고 사회보장제도는 인간을 게으르게 하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폄하되었다. 일체 교육기관은 이런 보수 가치를 가르쳐야 옳다. 그렇기에 공립학교 지원을 축소하고 정부가 지원하고 간섭하는 사립학교를 선호한다.

의료보장 역시 사적 책임의 영역으로 넘겼고 동성결혼을 반대했으며 생명존중을 바라면서도 임신중절-이 경우 ‘잘못된(부정한) 임신’이란 전제가 있다-을 통해 낙태를 조장해 왔다. 이들 모두는 도덕적 아버지 가치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 보수주의자들에겐 자기 부정과 동일했던 까닭이다. 이들과의 전면투쟁이 미국 종교와 문화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한국의 경우 촛불과 맞섰던 태극기 부대의 성향이 이들 미국 내 보수주의와 대단히 유사하다. 그럴수록 프레임 전쟁에서지지 않는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9.

흔히들 진보는 분열을 통해 망한다고들 한다. 실제로 저자 역시도 진보주의를 가르는 여러 요인들을 열거했다. 농촌/도시, 지역의 이익 대변 여하, 이상주의 대 실용주의의 논쟁, 급진적 변화와 점진적 변화간의 이념 투쟁, 환경/노동/영성/자유 등 관심영역의 차이에서 비롯한 갈등 그리고 자기 속의 이중성, 즉 진보와 보수의 양면을 지닌 현상 등이 그것이다.

▲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여기서 저자는 이런 차이로 갈등치 말고 조율을 통해 진보를 하나로 결집시키라 했다. 분열시키는 개별가치보다 상위 개념이 있는 탓이다. 진보의 우선적 가치는 돌보고 책임지는 일로서 公을 私보다 앞세우는 삶이다. 이를 위해 형평성, 평등, 윤리적 기업 활동, 공적 정부라는 원칙이 세워져야 한다. 양질의 일자리 보장, 세계에 신뢰를 주는 국가위상,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의료제도, 공교육의 활성화, 깨끗한 환경, 안전한 먹거리, 재생 가능한 에너지, 진실이 보도되는 언론, 인종/피부색에 상관없는 평등성, 난민/소수민족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 등이 진보가 추구해야 할 정책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이런 정책을 선호한다면 자신을 진보주의자로 여겨도 좋겠다. 이런 진보의 가치가 성서가 말하는 가치이자 모든 인류가 원하는 원칙이다. 하지만 미국처럼 한국도 오랫동안 보수주의 가치가 공적담론을 지배해 왔다. 촛불 혁명을 등에 업은 문재인 정부도 쉽게 이 향방을 바꿀 수 없다. 그럴수록 진보주의자들은 더 크게 자기 가치를 소리쳐 증거 할 일이다.

저자는 진보가치에 있어 타협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진보가 중도(中道)가 되면 이미 보수 프레임에 패한 것이라 했다. 자칭 진보임을 자임하는 성직자라면 진보의 가치를 강단에서 외쳐야 옳다. 그것이 성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종교가 결코 보수주의와 짝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엄격한 도덕적 신이 아니라 보살피는 하느님이 성서의 하느님이다. 지난해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종교개혁 500주년 행사의 주제가 ‘하느님이 우리를 살피듯 우리도 이웃을 살피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런 진보적 종교운동이 세속의 진보가치와 더욱 결합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이정배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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