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의 순간이 페미니스트들이 크게 생각해야만 하는 때인 것 같다. 신자유주의의 맹습이 우리의 최고의 생각들을 제도화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되찾기 위한 시작에 놓여있다. 이러한 순간을 움켜쥐면서, 우리는 단지 젠더의 관점뿐만이 아니라 정의라는 방향으로 임박한 변화의 활을 막 구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미주 1)

진보적 사회운동의 규범적 목표에 관한 미국의 낸시 프레이저와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회과학연구소 악셀 호네트 소장 간의 논쟁은 기념비적 논쟁의 하나로 회자된다. 분배-인정에 관한 논쟁으로 일컬어지는 두 학자 간의 설전은 분배-인정 ‘이원론’이냐 분배-인정 ‘일원론’이냐로 요약 가능하다.(미주 2) 전자는 낸시 프레이저의 주장이고, 후자는 악셀 호네트의 주장이다.

이 논쟁이 한국 사회에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먼저, ‘일베’나 ‘워마드’로 대표되는 집단들의 행태가 그 목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인정’이라는 욕구가 그 기저에 숨겨져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최근에 일어난 최저임금 문제는 한국 사회가 ‘분배’의 문제에 있어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정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 하는 문제는 사회의 진보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 아니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일상에서도 부딪히게 되는 중요한 문제이도 하다.

▲ 미국의 페미니스트 학자이자 사회정의 이론가인 낸시 프레이저 교수 ⓒGetty Image

이 기념비적인 논쟁을 소개하기에 앞서 두 학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먼저 이 글에서는 낸시 프레이저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겠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낸시 프레이저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정의’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낸시 프레이저의 젠더정의

이렇게 규정되어 있는 것은 프레이저와 호네트와의 논쟁이 알려지기 전 그의 주저이기도 한, 『지구화 시대의 정의』(김원식 역, 서울: 그린비, 2010)가 먼저 번역되어 세간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순수한’ 의미에서 사회정의 이론가로 부르기보다는 페미니즘에 근거해 젠더 정의(gender justice)를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서 실현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페미니스트 정치이론가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실제로 낸시 프레이저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통을 계승하는 학자로, 근대적 사고에 근거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 중 한명으로 평가되고 있다.(미주 3)

그럼에도 프레이저는 초국적 자본의 ‘자유이동’과 탈규제로 인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들을 풀어놓았다. ‘세계사회포럼’의 문제의식, 그리고 이른바 남반구 여성들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신의 이론을 끊임없이 확대하고 가다듬어 발전시키기도 했다. 사회정의 이론과 페미니즘 양측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야기 하기에 어느 한쪽으로 규정하기가 어렵도록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프레이저 이론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그가 논의의 출발을 젠더정의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적 평가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한 그러한 내용적 성과가 어떻게 사회적 정의라는 입장을 통해 나타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프레이저에 대한 평가에 유용하다는 것은 학계의 입장이기도 하다. 즉, 페미니즘을 통한 사회비판의 결과물이 ‘3차원적’ 사회정의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페미니즘 비판

프레이저는 페미니즘의 제2의 물결(세대)(미주 4)을 크게 세 가지 운동 국면으로 구분하고 있다.(미주 5) 프레이저가 주장하는 첫 번째 국면은 사회민주주의의 표준적 구조에 저항하는 ‘신사회 운동’(미주 6)의 일부로 등장한 시기를 이야기한다. 남성지배 형태들을 폭로하면서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정치적인 영역의 확장을 위해 투쟁하던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는 주로 재분배의 문제가 전면에 내새워진 것으로 정의한다.

두 번째 국면에 대해 프레이저는 신좌파의 상상력이 쇠퇴하면서, 문화적 차원의 문제들이 전면에 등장했던 시기로 본다. 인정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정체성 정치’(미주 7)(Identity Politics, Identitarian Politics)의 시기를 말한다. 이 정체성 정치는 어떤 집단(예를 들면 인종, 민족, 문화, 젠더집단)에 소속 여부에 기반을 두는 정치적 동원의 형식이며, 그 집단에 대한 소속 여부는 그 집단을 정의하는 어떤 공통 경험, 조건 특징으로 경계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프레이저가 구분하는 세 번째 국면은 지구적 차원의 신자유주의가 민족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전세계적인 헤게모니를 구가하는 현재 시기이다. 프레이저는 이 시기를 초국적인 정치적 기획이나 과정으로 혁신하는 시기라고 본다. 재분배와 인정 그리고 대표의 문제의식이 함께 공존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적 국면의 변화과정에서 프레이저가 문제 삼고 있는 시기는 두 번째 국면이다. 프레이저는 이 시기에서 재분배와 인정의 문제를 각각 독립된 차원으로 분리시키면서 대부분의 페미니즘 운동이 운동의 역량을 인정, 즉 정체성 정치에 집중시켰다고 비판한다. 즉 인정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이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지배의 다양한 형태를 폭로하고 이를 교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기존의 첫 번째 국면의 주된 요구였던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관심과 인정을 분리시키면서 젠더부정의(gender injustice)의 중요한 한 측면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적인 투쟁을 문화적인 투쟁에 종속시키고, 재분재정치를 인정정치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미주 8)고 비판하고 있다. 프레이저의 이러한 비판은 세 번째 국면인 현재 시기에 젠더 부정의와 맞서 싸우기 위한 자원으로 분재 정의를 소환하고 있다. 기존의 재분배와 인정의 두 가지 차원을 확장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또 하나의 차원을 추가한다. 이미 다양한 페미니즘 운동은 영토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전지구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고, 전세계적인 가부장체제에 대해 공동으로 저항하고 있기 때문에 젠더정의의 새로운 틀이 발생하고 있다. 프레이저는 초국적 부정의의 원천에 대해 영토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문제틀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이로 인해서 부정의가 발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초국가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기존 국가적 틀른 더 이상 정의의 영역으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프레이저는 이러한 평가를 통해 초국적 여성정치는 젠더정의를 3차원적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재분배(redistriction)와 인정 (recognition), 그리고 대표(representation)라는 차원이 통합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미주 9)

이정훈  typology@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