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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로 그리울 때 그때 울어요은혜가 다가옴이라(시 102:12-13)
이성훈 | 승인 2018.08.19 21:05
12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오늘 말씀은 노래 가사 한 소절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들어보시면 다 아실만한 노래입니다.

“이미 와버린 이별인데 슬퍼도 울지 말아요. 이미 때늦은 이별인데 미련은 두지 말아요. 눈물을 감추어요, 눈물을 아껴요. 이별보다 더 아픈게 외로움인데. 무시로 무시로 그리울 때 그 때 울어요.”

나훈아의 ‘무시로’입니다. 때로 한 시간 이상 차를 몰고 다닐 때, 남진이나 나훈아의 노래를 듣곤 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장거리 운전을 하다가 약간 졸립다 싶으면 힙합을 들으면서 운전했는데, 최근 들어서 트로트를 듣는 편이 좀 더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점점 나이가 들고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무시로’를 듣다가 노래 가사의 의미가 참 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별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말고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인 외로움, 그리움 때문에 울자는 가사 내용입니다.

어떻게 보면 여기까지는 그냥 평범한 가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시로’라는 말이 평범함에 한 수를 더했다고 생각합니다. ‘무시로’는 인터넷에 찾아보면 국어사전에도 나옵니다. ‘정해진 때가 없이 아무 때나’라는 의미입니다.

노래 가사를 보면, 이별이라는 순간에 ‘이별’이라는 이유로 울지 말자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때를 정해서 울지는 말자는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시로는 어떤 울어야 할 때, 슬퍼해야 할 때는 정하지 말고 정말로 슬플 때, 그리움이 사무칠 때 울자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번 더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생각해보면, ‘그리울 때 그때 울어요’라는 말이 귀에 들려옵니다. 이 가사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별 후에 언제 그리울까? 이별 후에 그리움은 때때로, 혹은 가끔씩 찾아올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부분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우면 계속 그립고, 그립다보면 계속 외롭습니다. 그렇기에 ‘무시로’는 사무치게 그리울 때 한 번 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계속 그립고 외롭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운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단어 자체가 끊임없이 계속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뭔 대중가요를 이렇게까지 분석하면서 듣냐? 싶기도 합니다만, 이건 직업병 같은 거라서 어쩔 수 없는 듯 합니다.

제가 ‘무시로’로 말씀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런 슬픔, 결코 특정한 순간에만 닥쳐와서 그 순간만 울고 나면 끝나는 슬픔이 아니라 끝임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그 슬픔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나눠보고자 함입니다.

시간이 약이다

옛말에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괴로운 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진다’, ‘시간이 지나서보면 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말들을 우리는 많이 들어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Getty Image

저 역시 이 말은 일면 맞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다퉜던 일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다퉜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들을 만나서 얘기해보면 그땐 왜 그랬을까 하는 이야기 밖에 안합니다. 대학 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에 가지고 있던 고민들, 괴로운 일들, 그때는 너무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너무나 뜨겁게 아파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히지 않는 일들도 있습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여전히 화나고 기분 나쁜 일들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슬프고 괴롭고 외로워지는 기억들도 있습니다. 아픔이 아직도 이어지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는 이야기일까요? 때로는 시간도 약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시편 102편의 말씀도 어떻게 생각해보자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테니까, 그 순간을 기다리자는 이야기로 끝난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읽은 12절의 본문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어찌보면 그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앞선 시인의 괴로움을 생각해본다면, 시인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과거로부터 영원히 존재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언젠가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신앙적으로 풀어놓은 듯한 느낌의 이야기를 합니다.

시편 102편

우선 시편 102편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살펴보고 계속해서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시편 102편은 짧은 시는 아닙니다만, 쭉 읽어보신다면,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우선 1절부터 11절까지는 시인의 괴로움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시인의 간구와 호소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시입니다. 슬픈 노래 ‘애가’라고 불러도 무색할 정도로 시인은 고통에 차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절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듯한 분위기의 시로 바뀝니다. 11절까지의 시와 같은 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변합니다.

사실 학자들은 이 시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시가 하나의 시가 아니라 두 개의 시가 합쳐졌다고 말합니다. 11절까지의 개인적인 애가와 12절부터의 공동체적인 구원 시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학자들의 말이 없더라도 이 시를 읽어보시면 누구라도 그렇게 구분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바탕에서 학자들의 의견은 또 나뉩니다.

두 개의 시가 그냥 합쳐진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아픔에 의해 호소하는 가운데 공동체적인 구원 시를 차용해서 사용한 것이라는 입장도 있고, 그 반대의 입장, 공동체가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서 고통스러워하는 가운데, 개인의 탄원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였고, 뒤에 나오는 시가 본래 공동체의 중심 생각을 담은 시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식으로 보자면, 개인의 고통스러운 탄원과 그에 대한 성전 제사장의 화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1절까지의 탄원은 1인칭으로 나타나는데, 12절부터 나오는 구원의, 은혜의 선포에서는 3인칭으로 변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 시를 대하던 별로 상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고통이던 공동체의 고통이던 이 시는 분명한 고통을 말하고 있으며, 이 시가 끝나는 순간까지 시인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는 점, 시인이 받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12절 이후로 시인이 말하는 내용은 미래형입니다. 이루어진 내용이 아니라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내용입니다. 그렇기에 아직 시인은 고통 속에 있음을, 이 시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 순간에, 공동체의 시를 차용해왔던, 공동체가 개인의 탄식이라는 형식을 사용했건, 아직도 그 고통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또한 분명히 알게 됩니다. 시인은 지금 결코 고통에 차서, 비탄에 차서 쓰러져 있지만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개인의 탄원과 제사장의 화답으로 생각한다면 등장인물이 둘이 되기 때문에 맞지 않는 말이겠습니다만, 성경에 딱히 둘로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우리가 탄원과 대답으로 구분해서 읽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를 한 사람의 이야기 혹은 한 공동체의 이야기로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며, 그 또는 그 공동체는 탄식 후에 찬양을 통해서 구원을 간구합니다.)

아직 그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머지않은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셔서 그것이 해결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구원을 간구하는 이 순간에 시인은 고통으로 차 있지 않고 오히려 희망으로 차 있습니다. 그에게 희망이 없다면 이런 영광을 돌리는 시는 읊조릴 수가 없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종종 말씀드립니다만, 사람이 정말로 힘들고 슬프고 괴로울 때, 찬송가를 부르면서 마음을 위로한다던가, 달랜다던가 하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내 마음을 달랜다는 이야기는 특정한 몇 명에게나 가능한 일이거나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경험해보신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정말 힘들고 괴로우면 찬송가가 목에 걸려서 나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만 나옵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은 다음에야 찬송도 나오고, 찬송을 부르며 마음을 더 가라앉힐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시인은 누가 보더라도 절박하고 절실한 탄식의 기도를 찬송을 부르며 끝내고 있는 겁니다. 절실한 기도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까요? 아니면 이 기도를 쓴 시점과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는, 찬송을 올리는 시점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럴까요?

믿는 힘

앞서 저는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은 언제나 통용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시간’ 자체가 약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그 말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의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그 말 자체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닦아낼 수 있게 만듭니다.

시인은 그런 맥락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먼저 제시해줍니다. 자신의 괴로움의 간구 끝에, 그 간구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믿음의 말을 전해줍니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분명 시인은 아직 그 은혜를 받지 않았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때를 경험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그 때다. 그 때는 곧 올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 때가 언제인가가 아닙니다. “도대체 언제 나를 구해주실 것입니까? 언제까지 이 슬픔 가운데에서 고통 가운데에서 기다려야 합니까?”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저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이,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고통 속에서도 눈물을 닦아내게 만들고 우리로 다시금 일어서게 만들며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만듭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렇게 결론 맺는다면, 우리가 흔히 TV에서 명사들이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강조하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힘들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긍정의 힘은 결국 내 스스로 쥐어짜내서 만들어야 하는 힘입니다. 정말 괴로운 순간에 긍정의 힘을 쥐어짜내는 것은 그저 슬픔을 버텨내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긍정해보려고 노력은 할 수 있어도, 그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다릅니다. 우리 혼자서 쥐어짜내는 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도움을 주십니다.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비록 그 고통의 원인을 지금 당장 해결해주시지는 않을지언정,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 눈물을 닦으시며 지금을 버티며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괴로워도 찬양을 부를 수 있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게 곧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라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곧 내려주실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평안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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