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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 하나님의 강박, 야훼의 법 안으로 들어오신 야훼참된 믿음(창 15:6-7)
이성훈 | 승인 2018.08.26 22:04

오늘은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을 통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과 우리의 믿음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오늘 본문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에 앞서서, 저는 종종 제가 썼던 설교문들을 읽곤 합니다. 지금 설교하고 있는 본문과 연결된 본문인 경우에는 그때 했던 해석과 지금의 해석이 충돌되지 않는지를 살펴보기도 하고, 또 전반적으로 해석의 방향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제 설교문들을 읽어봅니다.

그런데 몇 년 전쯤에 했던 설교문 중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설교문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읽으면서 스스로 많은 반성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이 땅에 개입할 수 있는 권리가 하나님에게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제 아이도 레고로 집을 만들고 레고 사람들로 놀다가 재미가 없으면 부수고 다시 만들곤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이 땅을 만드셨는데, 노아의 홍수와 같은 홍수를 일으키시는 일이나, 세상의 어떤 순간에 개입하셔서 이 세상을 변혁하시는 권리가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연한 이야기 같으면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개념이기도 하며, 또한 상당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우리는 과거 십자군 전쟁이 어떤 이들의 이익 추구를 위한 전쟁이었을 뿐이지 실제적인 종교전, 성전이 아니었음을 많은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익을 얻은 이들은 전쟁의 뒤편에 앉아 있던 자들이지 전쟁의 전면에서 칼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아닙니다.

당시 전쟁의 전면에서 싸우던 사람들이 외쳤던 구호가 있습니다. “Deus Lo Vult” “주께서 그리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기에 이단자들은 모두 죽여도 된다는 구호를 외치며 그들은 칼을 들었습니다. 이단자들의 생명은 생명으로 취급하지 않아도 된다며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고 다른 우상을 섬기는 이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믿었기에 칼을 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살인도 불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찌보면 과장된 해석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권리는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이런 개념을 자세한 설명 없이 그저 하나님께는 그런 권리가 있다고 말해버린 제 설교문을 보고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본문에서 뜬금없는 이야기를 전해드린 듯도 하지만, 오늘의 본문을 살펴본 후에 창조주 하나님의 권리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려고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브람을 의로 여긴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제대로 된 계약 체결 의식을 갖고, 계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이 나옵니다. 바로 6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로마서 4:2-3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갈라디아서에서도 또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장 6-7절)

사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라는 주장은 마틴 루터에 의해서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신칭의’ 사상입니다. 짧게 말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가 ‘이신칭의’입니다. 지금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런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신칭의’에 대한 신학계의 논쟁이나 논란은 뒤로하고, 우리는 이 말의 기초가 된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을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6절 본문을 원문으로 읽으면 약간 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원어는 적지 않겠습니다만, 원어로 보면 6절은 두 문장으로 나뉩니다.

“그가 야훼를 믿었다.”
“그리고 그가 그를 그의 정의로 여겼다.”

이렇게 두 문장이 됩니다. 첫 번째 문장에서 그는 당연히 ‘아브람’입니다(아직 이름이 바뀌지 않아서 ‘아브람’입니다.) 두 번째 문장의 주어인 ‘그’와 목적어인 ‘그’는 누구일까요? 문법적으로 보자면 주어의 ‘그’는 ‘아브람’이 될 것이고, 목적어인 ‘그’는 ‘야훼’가 될 것입니다. 앞의 문장과 동일하게 받아야 이해가 되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는 주어의 ‘그’를 ‘하나님’으로 바꿉니다. 70인역 성경도 주어와 목적어를 그냥 ‘그’라고만 명시해놓았는데, 성경이 번역되어 오면서 주어의 ‘그’에 ‘하나님’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런 전통에 의해서 우리 성경도 하나님이 아브람을 그의 의로 여겼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래적 의미로 문장을 바꾸어보자면, “아브람이 야훼를 믿었다. 그리고 아브람이 야훼를 그의 정의로 여겼다.”가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잘못된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된 믿음을 알고 있던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로 여겼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의, 정의로 여겼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부터 생각해야 할듯 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의’는 히브리어 ‘쩨다카’입니다. ‘정의와 공의’라고 할 때, 보통 ‘정의’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공의는 ‘미쉬파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선 정의가 무엇인지, 성경이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일전에 이사야를 함께 읽고 공부하면서 이사야에 나타난 정의와 공의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개념 정의를 내리기는 했습니다만, 이 개념이 정확하다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딱히 학자들의 책을 찾아본 것도 아니고 그저 성도님들과 성경을 읽으면서 정리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의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계약 ⓒGetty Image

저는 정의와 공의의 개념을 법이라는 의미 속에서 찾습니다.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데, 이때 적용되는 대상에 따라 의미에 차이가 생깁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정의’는 법적절차에 따라 ‘재판을 여는 일’을 의미합니다. ‘공의’는 ‘열린 재판장에서 공평하게 판결 내림’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재판관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일한 의미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정의’는 ‘하나님의 법 테두리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공의’는 ‘법을 잘 지킴’을 의미합니다. 작은따옴표를 계속 써서 쓰다보니까 복잡해보이기는 합니다만, 전혀 어려울 것이 없이 지금의 법치주의 국가 체계와 동일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법부에 있어서 정의는 재판이 열려야 할 때에 재판을 여는 것입니다. 공의는 똑바로 재판하는 게 공의입니다. 이 국가에 속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국민이 되는 일은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게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정의입니다. 그리고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게 공의입니다.

이사야를 읽으며 우상숭배와 사회문제가 어떤 연결점을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다보니까 이런 개념을 정리하게 된 것입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긴다는 뜻이고, 이는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정의롭지 못한 백성이 됩니다. 사회에서 약자를 괴롭히고 착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바르게 지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공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약간 돌아서 오기는 했지만, 아브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의, 쩨다카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을 자신의 법으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법이 되셨다. 정의가 되셨다. 재판관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더 간단하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의 삶의 기준이 되었고, 삶의 법칙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의 믿음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법으로 삼는 데에서 출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판단하시도록 맡겨서 자신이 잘했을 때에 상을 주시고, 자신이 잘못했을 때에 벌을 주시도록 그 모든 권한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의 시작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법으로 삼았다는 말은 아브람이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에 한 가지 의미가 더 추가됩니다. 하나님도 역시 법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의미가 추가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사법농단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법을 수호하고 법을 철저하게 행해야 하는 사법부가 오히려 법을 어겼기에 일어난 재판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의심해왔던 것입니다만, 이제야 그것이 드러나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법 안에 들어오셨다는 이야기는 이런 우리나라 사법부처럼 자기 멋대로 법을 주무르고 재판을 진행해도 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스스로가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히게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맘에 안 든다고 무조건 사람을 때려죽일 수도 없고, 하나님 맘에 안 든다고 해서 이 세상을 심판할 수도 없고, 다시 노아의 홍수 같은 사건을 일으키실 수도 없습니다. 당신의 법에 따라서 심판을 내리셔야 하고 마찬가지로 복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납니다만, 예언서를 공부하면서 읽었던 어떤 학자의 글에서 예언서의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신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면서 법이 되셨기 때문에 법을 어기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해도, 이스라엘이 회개치 않고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이런 하나님의 고통이 여실하게 나타납니다. 요나를 보면 아주 나쁜 니느웨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회개해버렸기 때문에 심판을 거두실 수밖에 없는 모습도 나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율법의 멍에를 벗어던지자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때로 그렇기에 우리에게 구약의 율법은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구약의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난 개신교가 왜 동성애 문제에 관해서는 율법주의자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은 율법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의 ‘믿음’은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도 유사합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법이 가슴에 새겨져 있고, 당연하게 이를 지키며 살아가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가르칠 필요도 하나님을 가르칠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율법이야 지키라고 말해서 지키는게 아니라 당연히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굴레에서 해방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사회에서 우리가 법을 지키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사람 때리고 죽이고 싶은데 법 때문에 못해서 열 받고 화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싸이코패스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지극히 당연하게 법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법 안으로 들어간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면 됩니다.

오히려 스스로 율법의 멍에를 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전능자의 권능을 법이라는 테두리에 묶고 자신의 손과 발을 묶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런 하나님을 끊임없이, 쉬지않고 노력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저 ‘믿음’만 있으면 행함이 없어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믿습니다! 아멘!’만 하면 하나님의 복이 뚝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반대로,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2장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2장 21절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친 행함이 있었기에 의로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에서 ‘그’는 아브람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누가 되더라도 크게 의미에서 변화는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법이 되셨다는 의미가 되며, 아브라함에게 적용될 때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법 안에 들어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찬해주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잘했다고 칭찬하신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을 나눌 때에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의 법을 잘 지키고 있음이 여기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웃을 사랑하고, 도움을 받고자 원하는대로 남을 돕는 삶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이며, 믿음의 삶입니다.

여러분들께서 하나님을 참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입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움 안에서 살아가셔서 우리의 재판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벌이 아니라 영원한 복과 은혜를 받고 누리게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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