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시대는 참으로 길었다. 고대사회는 제국의 시대였다. 지중해 지역 전체가 제국의 권역에 말려들어가서 황제가 지배하는 체제가 무려 3천년 동안 지속되었다. BC 3500년 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남쪽으로 두 강이 합류하는 갈대아 지역에 도시국가들이 출몰하였다. 소위 수메르 문명권이 형성된 것이다.

창세기 4장 17절은 가인이 축성한 “에녹성”은 문명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도시국가였다고 회고한다. 문명의 시발점을 알리는 에녹성은 고고학에서 ‘에리두’ 도성과 동일시되고 있다. 최초의 도성에 내포된 정신사적 의미는 자기소외로부터 발출된 폭력의 사회적 지배였다. 폭력이 비로소 조직적 방식으로 사회체제로 둔갑하여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도시의 등장으로써 폭력은 이미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체제의 형식을 띠게 된 것이다.

문명사와 제국

오랜 세월에 걸친 문명사의 퇴행 과정은 창세기 10장에 나타난다. 노아 홍수 이후에 드디어 도시들은 국가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왕국은 신아르 지방의 바벨과 에렉과 아카드와 칼네에서 시작되었다.”(창10:10, 가톨릭 역)

천주교가 번역한 이 문장은 “왕국”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히브리어 <마믈레케트 מַמְלֱכֶת>를 정확하게 번역한 것이다. <마믈라카 מַמְלָכָה>는 <말라크>, 즉 왕이 통치하는 도시국가를 가리키며 노아 홍수 이후에 역사는 퇴행을 거듭하여 니므롯 같은 엘리트들의 폭력이 증대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도시국가의 형태를 띤 왕국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러한 도시국가들은 수메르 지역을 넘어서 가나안 지역 전체에도 널리 퍼졌다.

도시국가의 왕들은 전쟁을 벌여서 영토를 확장하고 노동시장을 장악하였다. 도시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하여 권력이 한 도시의 왕에게로 집중되어 제국이 출현하였다. 이 과정을 지중해 문명권은 오랜 세월 동안 목격하였다. 제국의 행렬은 이집트 제국과 아시리아 제국과 바빌로니아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과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으로 이어졌으며 폭력의 제국은 고대노예제사회라는 체제를 기반으로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도시국가와 제국의 무서운 폭력과 착취에 희생된 계급은 노예집단이었다. 모든 사회적 생산을 담당한 노동력을 노예의 몫이었다.

노예문예의 맹아로서의 토라

문자를 매개로 발달한 학문과 기술과 문예는 역사서술과 더불어 도시국가의 엘리트들의 손에 장악되었다. 노예들에게 문자로 표현되는 정신의 세계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노예들이 자신의 역사를 서술할 수 있는 권리는 제국의 시대에 내내 박탈당하였다. 문자는 지배자의 것이었으며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은 원천에서 봉쇄되어 있었다.

노예들에 관한 문예도 금지된 상황에서 노예의 해방이라는 주제는 감히 광장에서 터놓을 수 없는 쟁점이었다. 노예에게는 인권이 없었으며 노예에 대한 철학도 노예에게서 영혼을 박탈하여 노예의 강제적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모든 왕국의 제도적 종교들과 그 종교들이 배태한 사상들이 노예체제를 옹호하였다. 고대노예제사회를 떠받쳤던 이데올로기는 바로 종교와 신화와 학문이었던 것이다.

▲ ‘에리두’ 도성 흔적 ⓒWikipedia

노예를 해방하여야 한다는 선언이 문자를 매개로 역사 속에 등장했다. 이것은 마치 빅뱅과 같이 제국의 역사 한 가운데에서 선포되었다. 그 문예의 결정체가 ‘토라’였다. 페르시아제국의 유화적 정책 하에서 비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마을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는데 이들이 노예의 해방을 옹호하는 토라를 작성하고 탐독하고 그것을 예전과 교육에 사용하였다. 이들은 토라를 통해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였고 토라를 강령으로 삼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토라의 핵심되는 내용은 신(하나님)은 야훼 한 분밖에 없으며 그 분이 바로 만물을 존재하게 만드신 창조주이신 동시에, 노예를 해방시키시는 구원주이라는 문예적 역사 서술로 결정되었다. 고대노예제의 제국에서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획기적인 문예였는데 체제 자체를 근본에서 뒤흔들어 놓는 일대 혁명적 역사관이었다. 역사를 디아스포라 노예가 스스로 기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체제에서 철저히 고난 받는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고대 도시국가의 세계를 평가하기 시작한 쾌거가 소위 ‘토라’로 등장한 것이다.

언약의 백성을 인도하는 모세의 변화

‘토라’를 실천하며 살아서 고대노예제 사회에서 엘리트 중심이 아닌 민중 중심의 새로운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어 내겠다는 결의가 ‘언약’이란 사상으로 표출되었다. 언약의 백성은 야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야훼 하나님의 보편성을 지상에 실현하는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새로운 역사의 꿈을 꾸는 공동체를 토라는 <마믈레케트 코하님 מַמְלֶכֶת כֹּהֲנִים>이란 용어로 제시하였는데 “제사장 나라”라고 번역되어 있다(출19:5).

이것은 신정정치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토라 공동체는 폭력의 세상과 평화의 하나님 사이에 서서 세상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는 제사장으로서 존속할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회개를 통하여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내는 새로운 공동체여야 했다.

화해와 평화를 일구어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고 경영하는 주체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히브리인 노예의 해방을 통해 세워야할 사명을 받은 자가 바로 모세였다. 이집트 제국에서 막강한 권력의 실체를 삶으로 알고 있는 모세에게 노예를 해방시키라는 사명은 불가능해 보였다. 애굽의 권력자로 살다가 졸지에 도망자로 전락한 모세였으며 미디안이라는 작은 부족에게로 도피하여 그 족장의 사위가 되었다.

모세는 노예해방이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직면했을 때 실현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간주하고 끝내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을 수락하지 않고 거부하였다. 무려 네 차례나 야훼의 설득을 거부하였다. 마지 못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세에게 야훼 하나님께서 돌진해 오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 아내 십보라는 너무나 놀래서 엉겁결에 아들의 포피를 베어 남편의 발에 갖다 댐으로써 모세의 목숨을 살려낸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살면서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았다. 그는 노예가 해방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금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애굽의 왕궁에서 자라난 모세였으며 그의 역사관은 철저히 엘리트 사관으로 물들어 있었을 것이다.

엘리트의 역할과 능력에 역사의 희망을 두고 있던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난 야훼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신이었다. 그는 히브리 노예를 해방하라는 사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세의 가족은 할례의 백성으로 거듭나야 했다.

야훼 하나님은 모세의 가족을 새 사회를 겨냥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기 위해서 할례를 베풀게 만들었다. 밤중에 모세의 천막으로 돌진해 들어와서 짐짓 모세를 죽이려고 하심으로써 엉겁결에 믿음이 없는 이방여인 십보라로 하여금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게 하셨다.

아마도 아내가 미디안 여자였고 모세 자신도 미디안 족장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는 동안 모세는 조상들의 관습과 전례를 포기했던 듯하다. 아마도 암울한 애굽 제국의 역사 속에서 어쩌면 아무런 희망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가족을 돌보며 미디안 족장의 사위로 안일하게 살고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모세를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부르셨고 모세는 마지못해 애굽으로 가족을 데리고 내려간 것이다(출4:18). 야훼 하나님은 이러한 모세와 그 아내에게 충격요법으로 얼떨결에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게 하심으로써 그 온 가족을 언약의 백성으로 받아들였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이방인이었기에 야훼 하나님을 만난 체험으로 엄청 놀랐을 것이다. 그녀는 미디안 족속의 우상종교를 신봉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컸을 것이다.

애굽의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역사적 사명은 가족주의를 넘어서는 인류보편의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에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도록 갑자기 모세를 죽이려고 돌진하는 야훼 하나님을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엉겁결이나마 십보라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었다. 이로써 모세의 온 가족은 온전히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가 있었다.

나가는 말

세상은 엘리트주의를 교육하고 강요한다. 성경은 고난 받는 민중을 주체로 세우는 대안을 희망의 내용으로 제시한다. 토라는 힘없는 노예와 여성과 외국인노동자와 장애인과 병자들이 사회를 이끄는 권력의 주체로 등장해야 한다는 꿈을 꾼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꿈이기도 하다.

토라를 작성하고 실천해야 했던 유대교는 이러한 토라의 꿈을 좌절시켰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토라의 꿈을 삶으로 시현하였을 때 제국의 카톨릭 교회는 그 꿈을 좌절시켰다. 개혁교회는 그 꿈을 새롭게 꾸었으나 자본주의의 공격을 받아 또 다시 좌절을 경험하였다. 이제 한국의 민중에게 그 꿈을 꾸는 기회가 주어졌다.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토라의 꿈을 다시 선포되고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

이영재 목사(전주화평교회)  rheeyjae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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