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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기독교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5)
조헌정 | 승인 2018.09.06 21:08

1930년대 초 만주의 항일유격근거지에서 일제에 의해 희생된 숫자보다 혁명조직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해서 죽인 숫자가 더 많았던 소위 ‘민생단 사건’을 주제로 하여 작가 김연수가 쓴 <밤은 노래한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안중근의사의 시대와는 30년의 간격이 있지만, 안중근의사가 가졌던 그 실존적 고민을 잠시나마 떠올리기 위해 소설의 한 부분을 오늘 하늘뜻펴기 머리글로 대신합니다.

밤은 노래한다

고개를 들어보니 고동색 군복에 각반을 찬 일본 병사들이 구령 소리에 맞춰 내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죽음이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듯... 죽음이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인 곳에서는 누구나 임종을 앞둔 노인일 뿐이다. 총성이 그치지 않는 만주에서 우리는 누구나 노인일 뿐이다. 이 세계가 청년들에게 가혹한 세계라면, 죽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청년들마저도 노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세계라면 내가 몇 명을 조금 일찍 죽인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누구도 주인이 아닌, 노예만의 세상에서 폭력은 예술이다. 단 한 명이라도 죽어가는 노예가 있는 한, 세계를 바꾸기 위한 폭력은 불가피하다. 나는 폭력이 사라진 세계를 믿지 않게 됐다. 어느 세계에나 죽어가는 노예는 있을 테니까 어느 세계에서나 폭력은 예술이 될 것이다. 결국 유토피아란 없다.
- 김연수, 『밤은 노래한다』(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6), 290쪽.

 

요즘 우리는 오늘의 청년들이 겪는 암울함과 좌절의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헬조선’, ‘흙수저’, ‘뱁새’, ‘알바세대’, ‘SKY’ 등등의 용어들이 저들이 겪는 상황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오늘의 장년 노년세대들의 청년시절이 더 행복했을 것이다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1970, 80년대를 산 오늘의 4, 50대들 또한 정신적으로는 박정희의 살벌한 군부독재시대 압제 아래에서, 경제적으로는 수출주도의 산업사회에서 장시간의 노동에 짓눌려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그 이전 세대의 사람들은 어떠했는가? 1950, 60년대를 살아간 청년들 그들은 형제들을 향해 총칼을 들었던 시대적 이념과 전쟁의 희생자들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고 굶주림과 방황으로 더 큰 암울과 좌절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 1930, 40년대를 살아간 청년 세대는 어떠했을까?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더욱 악랄해지면서 우리말은커녕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꿔야 했고, 남자는 전쟁의 총받이로, 여자는 성노예로 그리고 남은 사람은 탄광, 군용공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집안의 먹던 놋그릇 숟갈까지 빼앗기던 시대였으니 그 무슨 희망이라는게 남아 있었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다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 고통이 가장 크다고 느끼고 과거를 미화하기 때문에 그렇지 실상 누구에게나 좌절과 고통의 깊이는 같은 것입니다.

『밤을 노래한다』라는 소설이 없다고 하더라도 1930년대 만주 벌판에서 나라 잃은 채 살아가는 조선의 청년에게 당연히 희망이란 없었습니다. 작은 먹이를 눈앞에 두고 제국주의가 서로 맞붙은 전쟁의 광기와 혼란 속에서 개인이 살아간다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세상에서는 폭력만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작가 김연수가 말하는 슬픈 진실은 과연 1930년대 조선반도만의 일일까요? 지금도 시리아와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서는 외세와 이념과 신앙의 차이와 종족 대결로 끊임없이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들은 직접 총을 들고 나선 청년들입니다. 꼭 총을 들고 서로를 죽여야만 폭력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언어폭력, 성폭력, 지위와 돈에 의한 갑질 또한 폭력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엊그제 남북이산가족 만남에서 남쪽의 68세 된 아들이 90세의 북쪽 아버지를 태어나서 처음 보면서 한 말인데, 이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인 사회인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예수와 로마제국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약간 달리 해석하지만, 마태, 마가, 누가 세 개의 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죽음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신 다음 채찍을 들어 성전을 숙청하신 사건에 의한 결말임을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흔히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일을 복음서 저자들이 스가랴 예언에 연결시켰기에 겸손이라는 개인적 신앙 차원으로 혹은 평화의 왕으로 그래서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현실로 인정하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이는 당시의 역사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매우 잘못된 해석입니다. 새끼 나귀를 타신 일이 로마 제국과 황제를 풍자하는 민중의 정치적 상징성을 간과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개인의 값싼 은혜로 전락하게 됩니다.

서기 33년 어느 따스한 봄날 아침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기 이틀째 같은 시간대 예루살렘성 동쪽과 서쪽에서는 각기 다른 두 행렬이 있었습니다. 서쪽에는 빌라도 총독을 앞세운 위풍당당하고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로마군대의 행렬이 있었고, 동쪽에는 예수를 앞세운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들어오는 갈릴리 민중들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말을 타고 긴 창과 칼을 들고 들어오는 군대 행진은 당시 어디에서나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었고, 로마 군대가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에 주둔하는 것은 하나의 관행이었습니다. 그것은 순례자들로 인해 평소의 열배이상 사람이 모여 치안문제가 생기고 때때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행렬에는 로마 권력에 아부하는 헤롯일당과 로마 권력을 인정하는 사두개파 사람들과 지주들이 참석했으며 그들은 로마여 영원하라는 Pax Romana!를 외쳤습니다.

반면 동쪽에는 가혹한 식민지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소원하는 가난한 민중들이 예수를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며 환호하였습니다. 이 행렬 또한 일종의 관행이었습니다. 로마정부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일종의 바보들의 축제였고 이를 통해 백성들의 과격한 저항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혀내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 하층계급들은 탈춤과 판소리의 풍자를 통해 양반들의 비리와 허위를 폭로하고 비웃었던 이치와 같습니다. 물론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를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다고 해서 난(亂)이라고 부릅니다. 임꺽정의 난, 홍경래의 난 등등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항상 오흘로스라고 불리는 억압받고 천대받는 가난한 갈릴리 민중들이 함께 하였는데, 이들이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하루살기가 버거운 이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곳 예루살렘 수도에까지 왔을까요? 물론 유월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가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율법이 정한 규정이었지만, 희생제사는커녕 성전세 조차 낼 수 없었던 가난한 민중들 저들은 이미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받은 더러운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딴 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나귀 타신 예수를 뒤따르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자주와 독립을 유지했던 다윗왕국의 회복을 염원하는 말입니다.

‘새끼 나귀’에 담긴 민중 저항

그런데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가 건장한 30대의 청년을 태웠다면 그 무게로 인해 비틀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비틀비틀 거리는 예수의 모습은 자연히 길거리에 서 있던 민중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 예수는 이런 행동을 했는가?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 행동은 제1성서의 예언자 스가랴의 예언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여기서 말하는 겸비는 개인의 겸손이 아니라 전쟁무기를 없애버리는 사회 공의 실천과 세계 평화가 전제된 낮아짐입니다. 곧 이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백만 민중의 촛불로 박근혜정권을 무너뜨린 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전 숙청의 진실?

입성 다음날 아침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채찍을 휘두르시며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치시며 성전장사꾼들을 쫓아내십니다. 이 장사꾼들은 그냥 상인들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도장이 찍힌 희생제사용 동물을 파는 상인들이었고, 로마황제의 초상이 들어가지 않은 성전용 화폐를 취급하는 환전상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전권력을 배경으로 한 독점상인들로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재벌과 권력의 유착관계를 생각하면 됩니다.

▲ Jacopo Bassano, Expulsi&#243;n de los mercaderes del Templo(1568), Prado National Museum. ⓒWikipedia

예수께서는 이를 뒤집어 엎은 것입니다. 단지 탁자만을 뒤집어 엎으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성전지배체제를 뒤집어 엎은 것이고, 상인들만 내어 쫓은 것이 아니라 그곳에 제사장들과 성전 종사자들인 레위인들마저 내어 쫓은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한 구절이 나오는데 “또 물건들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도 금하셨다.” 당시 성전에는 이백여명의 제사장들이 있었고, 그들을 돕는 또 다른 수백 명의 레위인들이 있었고, 또 치안을 담당하는 성전 경비병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군대까지 입성한 다음날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물건’은 성전제사용 도구를 말하는데, 이는 제사마저 금지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성전 뜰은 오늘날 대형교회의 앞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순례자 수만 명이 모일 수 있는 축구장 세 개 크기에 해당하는 넓은 광장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조차 금하셨다’는 말은 예수와 이에 동조한 순례자들의 힘으로 이 모든 적대세력을 제압하였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가 아닌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마태나 누가는 이 구절을 삭제하였습니다만, 만약 이것이 실제 사건의 기록이라면 일시적이나마 예수의 성전 숙청은 민중혁명으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피하고 싶은 진정한 잔

바로 이러한 저항사건으로서의 새끼 나귀 타심과 성전숙청이라는 예수의 극단적인 행동을 바르게 이해할 때 비로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가 바르게 이해됩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피하시고 싶은 잔을 십자가 죽음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너무나 피상적인 이해입니다. 예수는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해왔고, 베드로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때에 그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는구나.” 하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께서 막상 죽을 때가 다가오자 죽기가 싫어 이를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자주 나약해지니까 예수님 또한 그러했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만, 이는 매우 아전인수적인 잘못된 이해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의로운 일에 뜻을 세우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인데, 설마하니 하느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인 예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셨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께서 피하게 해달라고 한 잔은 자신의 목숨이 아닌 ‘민중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따라온 제자들과 군중들은 실제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고, 이미 한때 성전을 장악한 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제사장들이나 바리새파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데 그때마다 민중들의 폭동이 두려워서 예수를 어쩌지 못합니다. 민중은 이미 예수의 편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복음 22장 26절의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 가지고 가거라.”는 말씀의 배경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힘에 의한 민중혁명은 당장에는 성공하겠지만, 이는 결국 엄청난 피의 대가를 불러올 것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건 이미 과거 역사 속에서 애굽,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라는 여러 제국들을 통해 수없이 경험하여 온 일입니다. 예수는 아마도 어린 시절 마카비 형제들의 영웅담을 들었을 것입니다. 성전에 독수리상을 세워 성전을 더럽힌 그리스 셀류큐스제국의 군대를 쳐부수고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했던 통쾌한 승리의 역사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로마제국에 의해 처절한 패망을 당했고 이후 로마군대의 엄청난 살육을 보며 자라났습니다. 그래 폭력에 의한 민중혁명을 피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혁명을 기대했던 제자들과 예수를 따라온 갈릴리 민중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가룟 유다의 스승 배반 사건도 달리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 일행의 재정을 관리했던 사람입니다. 매사에 분명한 사람이었고, 모든 이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가 3년이나 함께 했던 스승 예수를 당시 노예 한 명의 값어치에 해당하는 은전 30냥에 팔았다는 기록은 그가 단지 돈의 유혹에 넘어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스승 예수에 대한 실망과 분노의 표시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말로는 가룟이라고 번역된 그의 별명은 이스카리옷(Iscariot)파 출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카리옷은 단검을 뜻하는 단어로 당시 가장 과격했던 자객단 독립운동파를 말합니다. 난 모든 헬라어 성서나 영어성서에서 ‘이스카리옷’이라고 기록된 단어를 왜 ‘가룟’이라고 번역했는지 그 이유를 전연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목사들이 이를 가룟지방 출신이라고 해석하지만, 유대땅에 어디에도 가룟(Iscariot)이라는 지명은 없습니다.

또 다른 제자 시몬은 나라의 독립을 위한 폭력을 정당시했던 젤롯(열혈당원)파 출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별명이 단순히 제자들의 과거 경력만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운동에 담겨 있는 민중혁명성을 암시하고 있는지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루터와 종교제국

분명한 것은 예수의 갈릴리 하느님 나라 운동은 로마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에 그 핵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바로 ‘복음’(헬,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가 본래는 로마황제의 전쟁 승리를 뜻하는 언어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단어를 마가가 처음으로 예수에게 적용하였습니다. 곧 마가는 전쟁과 약탈에 근거한 로마제국의 유앙겔리오은 참 기쁜 소식이 아니고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예수의 행동과 말씀이 참 복음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곧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은 반제국 민중평화사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반대파를 완전히 섬멸한 다음 ‘하나의 로마’라는 기치 아래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임으로 인해 반제국로서의 하느님 나라 기본 성격이 사라지고 대신 Christendom(Christ + kingdom)이라는 또 하나의 ‘종교제국’을 꿈꿔왔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왕을 임명하고 폐위할 수 있는 중세 유럽 가톨릭의 교황 권력이었습니다. 이는 기독교의 타락이었고, 이 타락을 끊어내기 위해 말틴 루터의 개혁이 있었지만, 이것도 잠시 세계 선교라는 이름으로 종교제국 건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회퍼와 독일제국

본회퍼는 히틀러 독재정권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독일 고백교회를 상징하는 저명한 목회자요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21세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4세에 교수자격을 획득한 천재적인 신학자였습니다. 잠시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있을 때, 히틀러가 그 마각을 드러내자 그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국으로 돌아가 십자가의 길을 걷습니다.

▲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시온교회 교인들과 함께 ⓒGetty Image

처음에는 이들의 핍박을 피해 신학생들과 함께 은둔 수도 공동체를 운영하지만, 이 또한 철저히 파괴되고 맙니다. 그는 결국 중앙정보부원이었던 매형에 동조하여 히틀러 암살단에 가입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미치광이 버스 운전수가 승객을 태우고 인도로 질주할 때에는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강제로나마 그 운전수를 끌어내리고 버스를 세워야만 한다.” 그러나 암살시도는 실패를 하여 39세의 나이에 독일 패망 2개월을 앞두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옥중서신을 비롯한 그의 여러 저작은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의 용서, 싸구려의 위로, 싸구려의 성만찬을 양산한다. 그것은 대가나 값을 치르지 않고 받은 은혜다. 죄를 뉘우치지도 않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세상은 자신의 죄를 덮어 줄 싸구려 덮개를 싸구려 교회에서 얻는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 함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 함이다. 은혜가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 줄테니 모든 것이 케케묵은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말이다. 값싼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취한 은혜에 불과하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비움의)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에 불과하다.”(괄호는 필자 첨가)
- 에버하르트 베트게/김순현 옮김, 『디트리히 본회퍼』 (서울: 복있는 사람, 2014), 231-232쪽.

본회퍼 목사의 싸구려 은혜에 대한 비판은 생활과 유리된 신앙, 사회와 유리된 교회를 비판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독일교회가 침묵하는 일에 대해 비판하는 광야의 외침이었습니다.

“까마귀처럼 우리는 싸구려 은혜라는 시체 주위에 모여 시체의 독을 받아마셨다. 그 결과 예수를 본받는 삶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다. 은혜에 관한 교리가 비할 데 없이 신격화되어, 그 교리가 하느님 자체, 은혜 자체가 되어 버렸다.”

이는 사회 부조리와 악에 대해서는 눈 감으면서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만을 남발하는 오늘의 남한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입니다. 이미 거의 천개 이상의 교회가 다양한 형태의 세습을 이미 진행했지만, 지금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인 명성교회가 만들어진 교단법을 무시하고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세습하여 교단의 목사와 신학교수는 물론 사회로부터 엄청난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언론에는 목사에 의한 성폭력, 재산횡령 사건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은 물론 엊그제는 500명의 신자들이 교주 목사를 따라 피니섬에 집단이주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불법을 폭로하였습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본훼퍼 목사가 지적한 ‘값싼 은혜 기독교’ 타락상의 한 단면입니다.

본회퍼 목사의 그리스도 이해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으니...” 곧 하느님 사랑의 대상은 교회가 아닌 세상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아닌 이 세상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 한 가운데서만 그리스도일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 없는 세계 곧 이 세계의 하느님 상실을 종교적으로 은폐하거나 미화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세속적으로 살되 그 속에서 타인을 위한 하느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옥중편지에 나타난 그의 신학은 안타깝게도 여기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안중근과 일본제국

외교권을 빼앗기고 군대를 해산해야 하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려는 수많은 의병들의 저항과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기독교 인물로 안중근의사가 있습니다. 당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길선주 목사로부터 시작한 죄를 자복하는 회개운동에 매몰되어 갔지만, 안중근의사는 가톨릭신도로서 민족독립운동을 꾀했던 여러 선각자 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가장 활발히 펼쳐지던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지주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흔히 안중근 의사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독립투사로만 알고 있고 또 이토의 처단도 ‘암살’이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것은 정확한 평가가 아닙니다. 안중근의사는 청년기에 이미 선각적인 교육가였고, 고도의 지성을 겸비한 지식인이었으며, 스스로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항일 의병전쟁을 감행한 의병대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한 청년기에 이미 대학 교육을 시행해야한다고 판단하고, 대학교 설립안을 만들어 뮈텔 주교에게 제출한 적이 있었으며, 을사늑약 다음해인 1906년 27세에 자기 재산을 모두 털어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서 신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해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관서지방 지부장이 되어 부인의 패물까지 헌납하면서 나라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헌신적으로 분투하였으며, 일제가 군사무력으로 조국을 병탄하려는 것이 명백해지자 노령 연해주로 건너가서 동포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켜 1908년 4월, 약 300명의 의병부대를 지휘하여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대신과 만주 분할지배를 협의하려고 1909년 10월 만주를 방문하게 되자, 자기의 활동 지역에 들어온 적 수괴에 대한 의병 작전의 일환으로 이토를 처단하였습니다. 안중근의사께서 이토를 처단한 것은 암살이 아니라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의병활동을 한 것입니다.

총을 든 생명 존중의 사람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일화가 있습니다. 300명을 끌고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의병시절 모든 면에 중과부족인지라 거의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일본군 포로 몇 명을 잡았습니다. 그의 동료와 부하들은 처형을 주장했고 그 또한 많은 부하를 잃었고 쫓기는 입장에 있었으니 얼마든지 처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라는 법은 없다. ...적들이 그렇게 폭행을 자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다함께 분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마저 저들과 같은 야만적인 행동을 해야만 하겠는가? 또 그대들은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는가?”라며 동료들의 항의를 잠재우고 포로를 석방시킵니다.

이는 아무나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모르지만, 본인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쫓기는 위기 속에서 포로를 풀어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반대할 때, 그리고 풀어주면 분명 다시금 자신들을 향해 총을 들이 대밀 것이 분명한 상황 속에서 총까지 돌려주며 그들을 풀어주는 일은 하느님의 공의와 인류 평화에 대한 굳은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이로 인해 자신들의 위치가 폭로되어 곤경에 빠지고 안중근 또한 독립군 내에서의 위치도 불편해지긴 했지만, 그는 확고한 평화의 원칙, 하느님의 공의의 원칙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점에서 저는 그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사살함으로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군인보다는 적의 생명까지도 존중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보는 것이고 그를 조선교회의 한 신앙의 뿌리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세우기 위해 총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 신앙과 민족 사랑

안중근 의사는 결단 전에도 그러했지만,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는 날까지 매일 아침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초기 신앙에 대해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성경을 받고 교리 토론 등을 하면서 여러 달이 지나자, 신덕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이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며 지내는 사이에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몇 년이 지나갔다. 교회의 사무를 확장하기 위하여 나는 빌렘 신부와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전도도 하였다.”

그리고 그가 행한 신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하는 까닭은 사람만이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혼(生魂)인데, 이것은 초목으로 생장하는 혼입니다. 둘째는 각혼(覺魂)인데 이것은 짐승의 혼으로 지각하는 혼입니다. 셋째는 영혼(靈魂)인데 이것은 사람의 혼으로 생장하고, 지각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도리를 토론하고, 만물을 맡아 다스릴 수 있는 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영혼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재인용 180쪽.

오늘날로 보면 별 주장이 아닌 것 같지만, 백 년 전 선교 초기에, 그것도 20대의 청년 시절에 이런 얘기를 하며 돌아다닌 사실은 그의 깊은 신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은 위계 질서가 분명하고 순명(順命)을 생명으로 합니다. 그는 한때 민족독립은 민족교육과 함께 병행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뮈텔주교에게 대학을 세울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뮈텔 주교는 ‘학문을 배우게 되면 신앙심이 약해질 우려가 있다면서 거절합니다.’ 그때 안의사는 조선인을 무시하는 이 처사에 분노하여 교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마음은 믿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프랑스어 공부도 중단합니다.

▲ 안중근 의사 ⓒGetty Image

이때부터 그는 기독교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천주교의 체제를 떠나 독립운동에 나섭니다. 이로 인한 그와 그의 가족들이 겪는 아픔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끝내 그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의거를 행하고 당당한 자세로 재판에 임해 일본인 검사는 물론 일본 간수들에게도 큰 감화를 끼칩니다. 사형 언도를 받자 그는 상소를 포기하고 한 달간의 말미를 요청하고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씁니다. <동양평화론>은 미완의 글로, ‘대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진 이치이다.’로 시작하여 ‘슬프다,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 나라를 해치는 자는 독부의 환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로 그칩니다. 그리고 사형날짜가 가까워오자 그때가 고난주간이어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성금요일에 처형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하루 연기되어 1910년 3월 26일 강제합병 5개월 전 32세의 나이로 그 생을 마감합니다.

여기서 어머님 조마리아 여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님이 의사에게 편지를 씁니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희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저는 바로 이러한 어머니 조마리아님의 고귀한 뜻과 아들 안중근의사의 십자가 결단이 우리가 반드시 이어가야 할 초기 조선교회의 중요한 신앙의 뿌리입니다.

동포에게 고함

애시 당초 거사 한해 전 11명의 동지와 함께 새끼손가락을 끊어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단지동맹을 맺었을 때, 생명은 이미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형 직전 찾아온 두 동생에게 말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의 유해는 만주 땅 어딘가에 묻혀 있고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으며 최근 문대통령은 815기념행사에서 이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하겠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작 찾아야 할 것은 그의 유해 찾기에 앞서 하느님의 공의구현과 남북통일을 향한 그의 투쟁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조선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000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조헌정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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