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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정말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까사랑하기 때문에(신명기 7:8-10)
이성훈 | 승인 2018.09.09 21:37

1984년에 제니퍼 러쉬가 발표한 ‘the Power of Love’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cause I’m your lady~’ 로 시작되는 후렴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곡입니다. 셀린 디온이 다시 불러서 우리나라에 더욱 유명해졌고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 100위 안에 든다고 합니다.

제목 그대로 ‘사랑의 힘’이라는 노래인데, 이 노래 가사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어려움에도 맞설 수 있고, 가보지 못한 곳, 알지 못하는 곳까지도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하늘의 별도 따다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물론 하늘의 별을 딸 수는 없겠지만, 정말로 사랑이 있으면 무언가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그런데 저는 원체 회의주의적인 사람이고, 만사에 비판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과연 사랑이 있으면 불가능이 가능해지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니면 어떠한 다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다고 여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래서 먼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막연하게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을 넘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고, 그 사랑을 우리 삶에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만약 그것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 역시 삶에서 사랑을 실천함으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신약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요한복음과 사도바울의 편지에 많이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 한 절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사랑도 요한복음의 사랑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지난번에 바울의 율법인식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이미 이야기했다시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은, 구약성경의 율법적인 관점이 더 추가되어 있습니다. 물론 요한복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약성경과 완전히 별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죄로 인해 구원받지 못할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맥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길게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전에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고린도전서 13장과 같은 사랑은 실천하기 상당히 어려운, 정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 다 적혀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을 하셨으니 우리도 이렇게 사랑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기에 오늘 우리가 찾고자 하는 바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요약하자면, 죄인인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셨음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표현하시는 방식으로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고, 이로 인해 영원히 죽을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사랑이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삼으심으로 우리를 구하셨다’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비판하셨던 몰렉 제사, 인신 제사를 행하셨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당신의 마지막 방법, 더 이상 죄로부터,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마지막 방식을 택하신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노력하신다는 이야기를 성경은 전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자식을 버릴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 같은 것으로 엮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과 연결되어서 나타납니다. 시편 108편 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사랑이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이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38장 17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물론 이 앞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죄를 심판하시는 일로 드러나고, 그 심판으로 사람의 죄를 씻으셨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최근에 여러 차례 말씀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합니다. 예레미야 30장 18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써놓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그 폐허가 된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그 보루는 규정에 따라 사람이 살게 되리라”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 구원하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몇 주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원칙적으로 법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의 법을 따르는 이들에게 복을 주시고, 자신의 법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런 법의 틀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로 인해 사람을 심판하셨다는 이야기는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선포한, 심판 이후에 나타나는 구원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구원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 안에 있을 때에, 법대로 살아갈 때에 이루어져야 맞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법입니다.

심판 이후에 사람들은 죄를 씻어내기는 했지만, 아직은 선인지 악인지 구분할 수 없는 그냥 죄가 없어진 상태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우십니다. 예레미야에 따르면 사람들이 다시금 성읍을 건축하도록 도우시며, 그들이 다시금 거처를 삼을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것은 법에 저촉되는 점은 아닙니다만, 법과 상관없는 복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 읽은 신명기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가 말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에 조상들과 맺은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상들과 맺은 약속은 창세기 46장 4절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맺으신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맺으셨던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도이고, 이런 모든 법을 지키시기에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과 맺으신 약속은 야곱의 자녀들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자녀들은, 비록 요셉이 자신의 뼈를 가나안에 가져가달라고 당부하기는 했습니다만, 애굽에 정착하는 편을 택합니다.

▲ Salvador Dalí, Christ St. John of the Cross, 1951. ⓒGetty Image

야곱의 자녀들이 먼저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했고,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하나님간의 관계에서 이 약속은 아직도 유효한가? 하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애굽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야곱의 자손이고, 창세기의 약속이 야곱의 바로 아래 자녀가 아니라 자손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약속은 유효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400년이 지나며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미 이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방법도, 하나님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들도 잊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애굽에 살면서 애굽의 신들을 섬겼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야곱과 맺으셨던 약속을 행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였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간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신명기는 이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신명기는 생각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23장 5절에 보면,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그 저주를 복으로 바꾸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실 민수기에 나오는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일은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그들이 전혀 모르는 가운데 벌어진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을 막으시고, 그가 저주가 아닌 복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르는 사이에 자신들에게 내려질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신명기는 이 역시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α를 주시는 것입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안 해도 되는 것까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 사회에서 ‘기브 앤 테이크’는 당연한 말로 여겨집니다.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주거니 받거니 하는 상황에서 내가 1을 준다면 상대방도 1에 합당할 만큼을 주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1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도 1을 주십니다. 돈의 액수가 아니라, 법을 지키면 복을 주신다. 혹은 법을 어기면 벌을 주신다는 개념에서 동일한 가치가 오간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1에 +α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트나 편의점에 가보면 1+1이나 2+1 많이 봅니다. 이제 추석이 다가오니까 9+1이나 5+1 이런 딱지들이 많이 붙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마트 같은 곳에서 이렇게 파는 이유는 그렇게 파는 일로 인해 자신들에게 어느 정도의 이익이 더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트의 1+1 같은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지만, 본래 마트 측에서 제품을 우리가 생각하는 반값 이하로 들여왔다가 평소에는 이를 두 배 이상으로 불려서 팔고, 때때로 1+1으로 내놔서 사람들이 싼 값에 산다고 착각하게 만든다고도 합니다. 원가를 얼마에 들여오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자신들의 이익이 있기 때문에 1+1을 하던 2+1을 하던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α를 주시는 일은 하나님에게 이득이 생기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시는 일입니다. 제가 몇 주 동안 하나님의 법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면 딱딱한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바가 있어야 복을 주시는 하나님, 법에 묶여 계신 하나님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도 말합니다. 동일한 가치를 주고받는 분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 더 얹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랑

저는 여기에서 사랑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지 않을 법한 일’,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을 행하기 때문에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하지 않을 일’을 하게 됩니다. 귀찮아서,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몰라서 하지 않았던 일을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나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을 일이 사랑이 있기에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하지 않을 일을 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조차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 더 얹어주시는 그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시기에 불가능해 보였던 일조차도 능히 행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마저도 사랑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온전히 하나님의 법도 안에 서시게 될 것이고, 그런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1이 아닌 +2, +10의 사랑을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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