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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목회와 교회를 생각한다사회적 목회를 말한다 1
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 승인 2018.09.09 21:45
2013년부터 ‘생명평화마당’이 매년 개최해 온 작은교회 한마당이 올해는 지역을 중심으로 열렸다. 지난 9월6일에는 인천부천 작은교회 한마당 준비위원회와 생명평화마당 교회 네트워크 위원회 및 기독교 사회적 기업 지원센터가 공동으로 주관한 인천부천에서 <작은교회운동, 마을과 사회적 경제>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그리고 10월11일에는 현장탐방을 중심으로 한마당을 개최하게 된다.
지난 9월6일 부천 새롬교회 달토 카페에서 진행된 <인천부처 작은교회 심포지엄>은 김영철 목사(생명마당 교회 네트워크 위원장)의 사회로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성돈 교수가 “사회적 목회론”으로, 부천새롬교회 이원돈 목사가 “작은교회와 마을 목회”로, 마지막으로 기독교 사회적 기업 지원센터 이준모 목사가 “작은교회와 사회적 경제”라는 제목으로 각각 발제에 나섰다. 그리고 가온교회 오세욱 목사(그물코평화연구소)가 논찬을 진행했다.
에큐메니안은 이날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발제문들을 연속해서 게재한다. 먼저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성돈 교수의 “사회적 목회론”을 나누어 게재한다.

요즘 목회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전통적 목회의 틀을 벗어나서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예를 들면 소통형 목회, 복지형 목회, 지역사회형 목회 등이 있다. 소통형 목회는 대표적으로 교회에서 카페를 통해서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나누는 형태이다.

기존 교회당을 벗어나서 주중에는 카페를 주일에는 교회를 감당하는 것이다. 카페뿐만 아니라 다른 모습도 있다. 여기에는 아이들 놀이방과 같은 것도 있다. 복지형 목회에는 지역아동 센터, 방과후학교, 노인돌봄 등의 목회이다.

또 지역사회형은 지역사회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며 때로 지역사 회에 주어지는 정부의 사업을 감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목회가 다양해진 것은 먼저는 시대적 변화 때문일 것이다. 기존의 예배당 중심의 목회가 이제 유지되기 어려운 시대가 되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둘째는 같은 맥락이기는 하지만 목회자의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자구책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목회는 그 방향이 달라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그 근본에서부터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자칫 개인의 호구지책으로 변하기 쉽고 교회의 변화나 사회의 변화는 이끌어내지 못하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

사회적 목회란?

먼저 사회적이란 말을 이해해야할 것 같다. 사회적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 소셜(social) 또는 독일어로 조찌알(sozial)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이 단어는 라틴어 소시우스(socius)에 그 어원을 대고 있다. 소시우스는 ‘공동의, 연대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좀 더 응용한다면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살아감의 의미를 지니고, 동시에 더 나아가서 개인의 이기주의를 넘어서 남을 돌아보고, 돌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공동체의 개념을 갖는 ‘사회적’이라고 하는 단어는 연약한 자들을 돕고 경제적 자원에 참여나 인간적인 현존을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것을 이룰 수 없고,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러한 상황에 있지 않기 때문에 공동체가 도와야하는데 그것을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미국에서는 사회복지를 소셜 웰페어(social welfare)라는 단어로 표현한 다. 여기에는 공동체, 연대라는 의미가 강하게 포함되며 더 나아가서는 연약한 자들을 도 와 함께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도 ‘사회’ 내지는 ‘사회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공동체 내지는 연대라는 의미이다. 그러한 연대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자신들의 불편함이나 불공평으로 인해서 함께 하지 못하는 자들을 돌아보고, 도와서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지난 9월6일에는 인천부천 작은교회 한마당 준비위원회와 생명평화마당 교회 네트워크 위원회 및 기독교 사회적 기업 지원센터가 공동으로 주관한 인천부천에서 <작은교회운동, 마을과 사회적 경제>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인처부천 작은교회 한마당 준비위원회 제공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이라는 단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신앙공동체이며 동시에 국가공동체로서 그 사회의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된 자’들에 대한 배려를 가지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희년의 제도를 통해서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래서 자신의 소유를 잃었던 자들이 다시 자기 것을 찾아가는 축복의 해를 만들어 놓았다.

또 여인이 남편을 잃으면 그 가족들이 아내와 자녀들을 돌아보도록 하고, 밭에 떨어진 나락을 거두지 않음으로 이러한 약자들도 먹고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제도들에서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와 같이 사회적 책임이 가능한 공동체였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목회를 이해해야 한다. 사회적 목회는 교회를 통해서 이런 사회적 목적을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가 교회 내적인 공동체성만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회의 공동체성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한 사회적 참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더불어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적 고찰: 타자를 위한 교회

교회는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이다. 이스라엘이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인류를 구원 하기 위해 부름 받은 것처럼 새로운 이스라엘, 교회 역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르신 공동체이다. 교회는 존재로서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구로서 이 인류의 구원에 쓰임 받을 때 그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priestly kingdom)요 거룩한 백성(holy nation)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으로 나타난다. 출애굽기 19:5-6은 이것을 이렇게 드러낸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 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에 대한 의미를 은준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니어 (Donald Senior)와 슈툴뮬러(Carroll Stuhlmueller)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을 세상의 고난을 대변하는 원심적(centrifugal) 형식이라고 불렀으며, 거룩한 백성은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성별된 신앙과 생활을 심화해야 하는 구심적(centripetal) 형식이라고 해석한다. 원심은 세계와의 연대성(solidarity)을 의미하며, 구심은 정체성과 현존을 의미한다. 역사-종말론적 공동체로 태동된 이스라엘은 이제 세상의 고통을 대변하는 제사장 나라로, 동시에 성별된 민족으로 역사 안에 현존해야 하는(그것은 원심적인 것과 구심적인 것의 변증법적 관계 안에서) 책임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현존성의 목적은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증언과 섬김이었다.”(미주 1)

이스라엘의 부르심은 제사장 나라로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완성,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며 그에 대한 증언으로, 또 섬김으로 드러난다. 이는 다시 이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하며 우리는 그 가운데 제사장으로, 다시 말해 중재자로서 부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오심을 선포하며 그 시작을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고 한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실 때 그 동안 노역 가운데 고통 당하고 하나님께 벌을 받아 쓰러진 백성들에 게 위로를 선포하라고 하신다. 메시야가 오시는 때 선지자가 해야 할 일은 먼저 그 백성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동일하게 전달되는 명령이다. 이 세상을 향해 위로를 전하며 그 종말의 때에 증언과 섬김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교회는 이 사명 가운데 동일한 부름을 받고 있다.

존재 자체로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제사장 나라로 그 원심적 역할을 감당하라는 부르심 앞에 서는 것이다. 이 세상의 위로자로 증언과 섬김의 사역을 감당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고 한다. 교회를 보전하고 유지하는데 관심을 쏟지 말고 세상을 향해 제사장 나라로서라는 것이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이를 신약적 표현으로 이렇게 쓴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 그러나 교회에만 속한 사람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때로 의와 자비와 진리를 간과한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느냐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느냐를 생각한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세상이 교회를 변학시킬까 박 염려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어떻게 하면 교회가 세상을 변학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미주 2)

이를 20세기의 선지자라 할 수 있는 본회퍼는 그 유명한 문구인 “교회는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만이 교회이다(Die Kirche ist nur Kirche, wenn sie für andere da ist)”(미주 3) 라고 한다. ‘타자를 위한 교회’는 교회의 존재목적을 그 자체에 두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 가운데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공동체로 부르신 그 하나님의 뜻 가운데 둔다. 그것은 결국 오늘날 이 역사 가운데 교회가 제사장 나라가 되어 이 세상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같은 책에서 만인제사장설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제사장직은 그저 교회 내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사요 종이다. 제사장의 일은 사람들 앞에서 하 나님의 대리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대리자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 로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고 세상을 하 나님께로 이끄는 사명을 받았으며 또 능력을 입었다. 이 역시 이스라엘이 열국 앞에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된다고 하는 구약에 연원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전령이자 종이며,세상의 짐과 염려들을 모아 기도와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전달하는 임무 를 맡았다.”(미주 4)

 

미주

(미주 1) 은준관, 『실천적 교회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15.
(미주 2) Howard Snyder, 권영석 역, 『참으로 해방된 교회』(서울: IVP 2005), 11f.
(미주 3) Dietrich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DBW Band 8, 560.
(미주 4) Snyder, 245.

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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