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하나님의 약속은 깨지지 않는다(창세기 12:10-20)장일선, 『구약성서와 설교』 5
에큐메니안 | 승인 2018.09.11 21:15
지난 시간 장일선 교수님의 『구약성서와 설교』에서 구약성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민담”에 대한 신학적이고 설교학적인 이해를 살펴보았습니다. 장일선 교수님은 이 민담의 특성이 바로 가족 이야기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이 가족 이야기는 정치적인 역사나 집단의 이야기보다는 두 세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가족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 가족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현재화 되고 그 신앙 또한 전승된다고 설명하십니다.
이러한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은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아브라함 이야기에 대한 설교를 살펴봅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인격에 먹칠을 하는 엉뚱한 이야기가 성서에 실린 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아브라함이 정말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바로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는 그 댓가로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12:16)를 얻었다는 말인가?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이 같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벌 주는 대신 오히려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는 것은 또 모슨 어처구니없는 뜻인가? 모두가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성서의 기록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만 아니었더라면 어느 건달이 예쁜 아가씨를 누이라고 속여 아라비아 토후의 등을 쳐먹는 이야기 정도록 웃어 넘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이고, 더구나 우리가 존경해 마지 않는 아브라함 자신에게 일어난 이야기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수모 사건 이야기가 성서에 실린 것은 여러 세기 동안 전해 내려오면서 신앙 공동체가 이 이야기에서 그럴 만한 의미를 찾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아브라함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면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어떻게 다루신다고 보았는가 하는 물을 묻게 된다.

▲ 가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 ⓒGetty Image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것은 우선 그 땅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12:10). 흉년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은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통해 어렴풋하게 알듯하지만, 모든 것을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하는 고대 농경 문화권에서는 엄청난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앉아서 굶어 죽는 대신 나일강물을 끌어올려 농사를 짓는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가 다른 이방 사람을 순수하게 받아 줄 것인가 하는 두려움도 앞섰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든 면에서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이 생각해 볼 점은, 12장 첫 부분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의 고향에서 미지의 땅으로 불러 내시어 자손과 땅을 약속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어 할 수 없이 애굽으로 정처 없는 길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실질적인 어려움 속에 깊이 빠졌을 때 성서의 아름다운 약속이 무슨 의미와 희망을 주느냐 하는 회의이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깊은 회의에 빠졌을 것이다. 여러 세대에 걸친 신앙 공동체는 평범한 사람들이 당하는 일상 생활을 통한 공포나 회의를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녀도 없는데, 아내를 빼앗겼다면 큰 민족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아브라함은 그가 처한 상황에서 그의 판단에 가장 현명한 길을 택한 것이다.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12:13). 임기응변적인 처세술이든지 심사숙고한 결단이든지간에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살아날 최상의 길을 모색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은 영원히 막혀버린 것이다.

수치스러운 인간의 결단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획을 뒤엎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배후에 숨어 계시며 그의 약속을 지켜 나가신다. 아브라함이 공포와 회의에 사로잡혀 뒤엎어 놓은 실수를 하나님께서는 올바로 세워 놓으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시킨 창피한 이 한 토막의 에피소드에 의미가 있는 것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창세기 12장에 약속된 후사의 축복이 23장에서 최종적으로 실현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과 시험의 단계가 있었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에게는 언제나 막다른 골목이며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 모든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 싶으나 종국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완전과 불신실성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펴 나가시는 것이다.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에게 달려 있었다. 사라가 영원히 바로의 후궁으로 남았더라면 이삭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에게 애굽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죽이고 그의 예쁜 아내를 바로의 후궁으로 삼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아브라함이 짜낸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망쳐 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의 군대에게 쫓겨 바다에까지 다다른 이스라엘 백성은 진퇴양난, 그야말로 독에 든 쥐와 같았고, 그들이 살아날 길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고 하셨던 것이다. 죽을 뻔했던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구해 내고 훗날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바로와 온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명상하게 되었다(신 7:19). 신명기 역사가는 좀더 자세하게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야훼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4-35)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민족에게서 구원받은 이야기는 아브라함 한 개인이 바로의 손에서 구원받은 이야기가 공동체의 체험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자손의 축복은 애굽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아브라함 이야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 족장으로서 갖는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아브라함과 바로의 이야기가 역사적인 에피소드보다는 하나의 민담으로서, 즉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한 토막의 이야기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의 실수가 하나님의 계획을 뒤바꾸어 놓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켜 나가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실수와 잘못이 피범벅이 된 우리 삶의 현장 속에 하나님은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게 활동하고 계시는 것이다.

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에큐메니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충정로 2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생명의집 204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윤인중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8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