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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찾아 기억해야할 이 땅의 신앙 스승들임낙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8.09.12 21:02

책(『우리 영성가 이야기』[미주 1]) 모두에 쓰여 있듯이 사람의 삶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몸을 위한 것이고 후자는 정신적 삶의 영향사를 일컫는 것이라 하겠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달라지고 그 쓰임새가 크게 변화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 왔으나 촌놈 목사의 경우 이런 모습이 너무도 확연하다. 우선 그의 작은 체구 속에 이렇듯 많은 분들의 삶과 사상, 신앙적 유산이 녹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것을 기억해 내어 남들 자는 이른 새벽, 고된 몸을 이끌고 오늘과 같은 큰 책을 만들어 주었으니 이 또한 경이롭다. 그의 일상이 노동의 연속이며 이 저곳 발길 옮겨야 할 때가 적지 않았을 터인데 긴 시간 공들여 자신을 들여다보고 신앙의 어른들을 찾아냈으니 그의 수고가 고맙고 그 공로를 많이 치하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이 책의 가치는 예수를 만나 달라진 한국인의 신앙양식을 여실히 살핀데 있다. 어느덧 이 땅의 교회 강단이 우리들 전통을 잊고 서구적 인물과 사건만을 예화로 선포하고 있으나 이 책은 한국적 심성 속에 뿌리내린 신앙이 얼마나 견고하고 철저하며 삶 지향적인 것인지를 무언으로 항변하고 있다.

‘오직 믿음’이란 종교개혁 원리가 중세의 면죄부보다 더 타락했다는 말이 회자되는 현실에서 믿음과 삶을 하나로 엮어낸 이들 신앙 스승들이 한국 교회에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이들의 삶을 한국교회에 알려 이 땅의 교회를 달리 만들고 싶은 것이 글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저자의 마음이리라. 물론 책 중 인물 중 유영모, 이현필과 같이 이미 유명해진 분들도 없지 않다. 글을 남기고 좋은 제자들을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책 속의 여럿 인물들은 이들을 심비(心碑)에 새긴 임낙경의 증언이 없었더라면 땅에 묻힌 보화로 머물고 말았을 존재들이다. 하늘이 이렇듯 많은 스승들을 만나 다층적인 삶을 살게 했던 까닭에 ‘우리 신학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니 촌놈 목사 역시 예사로운 존재는 아닐 듯싶다.

1.

본래 저자는 본 책 제목을 『이 땅의 신학자들』로 정하려 했었다. 스승 이야기, 우리 신앙이야기 정도면 좋을 내용임에도 말이다. 그러나 곱씹어 다시 읽어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진다. 오래전 저자는 필자에게 이세종 같은 인물을 제자들 시켜 석사논문 주제로 다뤄 줄 것을 부탁했었다. 그 약속을 지금껏 지키지 못해 죄송하나 당시부터 그는 예수를 만나 자신의 삶을 전혀 달리했던 이들 스승들 속에서 한국 고유한 가치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복음과 한국적 심성이 만나 표현되는 삶의 양식의 독창성, 창조성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즉 서양인의 합리적 신학과 이들 한국인의 심성 속에 언표 된 신앙양식이 얼마나 다른가를 찾고자 한 것이다. 이점에서 그가 본 책에 ‘우리 신학’ 이란 말을 쓴 것이 너무도 적절하고 뜻 깊다. 오히려 이를 토착화 신학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쏟아 놓은 증언을 토대로 본격적인 신학적 작업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몫일 수밖에 없다. 그의 역할은 ‘우리 신학’이란 자의식 하에 경험으로 축적된 원자료를 가감 없이 제공하는데 있고 그래서 이 책의 가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처럼 가공되지 않은 천연석을 갈고 닦아 귀중한 보화, 곧 ‘우리 신학’으로 체계화하는 것이 향후 우리 신학자들의 과제여야만 한다.

그간 저자와는 잦은 만남은 없었으나 중요한 시점에는 늘 함께 있었다. 예순 환갑잔치에 화천에 갔었고 나의 거처인 횡성 시골집에도 두차례 발걸음 했으며 대화 문화 아카데미 창립 날, 한겨레 조현 기자가 주관하는 ‘휴심정’ 연말 모임을 통해서도 만났다. 회갑 잔칫날을 기해 옛 가요에 대한 단상과 소회를 밝힌 『돌파리 잔소리』의 서평도 필자 몫이었고 지금 『우리 영성가 이야기』도 쓰고 있다.

2.

앞서 말하였듯 촌놈 임낙경은 자연치유가로서 인간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좋은 먹거리를 찾고 민간 치유법을 되살렸으며 풍수 지리적 환경이 나쁘지 않은 곳에서 생활하라 했고 그 역시 화천에서 장애인들과 더불어 농사짓고 자신의 방식대로 대안, 창조, 희생적 삶을 살아낸 의자(醫者)이자 생명운동가라 하겠다.

그러나 오늘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런 임낙경이 있기까지 그를 키웠던 정신적 자양분이 무엇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그가 만났고 그를 만든 신앙적 스승들의 이야기를 기억과 경험에 근거하여 날것으로 우리에게 하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크게 보아 저자 심중의 8할 정도는 이현필과 이세종 그리고 유영모의 영향사로 구성되어 있다. 서서평 선교사와 최흥종 목사 그리고 가장 최근 만났던 강원용 등이 그 나머지 부분을 채웠다.

주지하듯 유영모와 이현필은 저자에게 한국이 낳은 두 인물로 추앙된다. ‘서울의 유영모와 광주의 이현필’ 이라는 저자의 말이 그것이다. 본 책 역시 이들에 관하여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두 분의 예수 믿는 방식이 크게 달랐으나 동광원을 중심으로 지금껏 삶의 흔적들이 중첩되어 있으니 놀랍도록 신기하다. 자신의 재산을 한국식 수도원인 동광원에 기증한 유영모와 그를 신앙관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곳 강사로 불러 세운 이현필과의 관계는 <성서조선>을 매개로 비정통 기독교인인 多夕과 정통주의 신앙을 고집하던 김교신의 사제지정과 비교해도 좋겠다.

임낙경이 다석에게서 배운 것은 하루 일식하는 것과 삶과 죽음의 날 수를 계산하며 인생을 사는 태도였고 새벽을 깨워 다스리는 삶의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몸(잠)을 줄여 마음을 크게 늘리는 것’이 신앙이었으며 기독교의 본질인 것을 배운 것이다. 따르는 제자 한 사람을 옆에 두지 않고 스스로 서는(自立) 인생을 가르친 것 역시 다석이란 스승을 통해 깨달은 바였다. 다석은 저자에게 진실로 ‘예수 믿는 이’였고 끊임없이 생각하는(念在神在) 존재였다. 그가 이승훈과 안창호 등과 교제하며 함께 일한 것도 예수를 자신의 따라야 할 스승으로 삼았던 탓이다.

하지만 그것은 제도적 교회 안에서 세례 받고 교인이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십자가로 덕을 보는 대속이 아닌 그를 짊어지고 따르는 자속의 삶을 살고자 했던 까닭이다. 살아서 죽음을 없이 하는 것을 종교의 본령이라 생각했기에 하루하루는 그에게 죽음연습의 장(場)일뿐이었다. 식색(食色)을 초월했던 것이 그의 구체적 실상이자 예증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신앙적 입장 역시 존중했기에 믿는 방식에 관한 시시비비 논쟁을 다석은 즐겨 하지 않았다.

살아생전 저자는 거의 20년간 다석 선생을 찾아뵈었다 하며 자신이 그의 끝물 제자인 것을 깊이 감사하며 살고 있다. 오늘의 임낙경이 있기까지 그의 영향이 골수까지 미쳐있다는 말이다.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필자로서 그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평소 알지 못했고 글을 통해 느낄 수 없었던 유영모의 진면목을 새롭게 접할 수 있어 감사했다.

3.

저자의 직계 스승 이현필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이세종 목사를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임낙경 목사는 이세종을 토착적 기독교의 효시라 불러도 좋다고 자신한다. 부자였던 자신의 호칭 ‘李公’을 그리스도를 만난 후 ‘李空’으로 바꿔 불렀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無化시켜 생명의 역환을 발생시킨 것이다.

하여 저자는 이세종을 한국의 예수와 같은 분이라 칭했다. 다석 보다 조금 이른 시기(1883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이세종은 천성적 근면 탓에 부를 쌓았으나 자식이 없어 무당의 산당을 지어 그곳에서 지성을 다해 빌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무당이 먼저 죽자 그곳을 예배당으로 만들어 예수쟁이가 되었다. 자식을 얻기 위해 빌던 사람이 하느님 섬기는 일에 더 열심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세종은 성서의 말씀 그대로를 살았다.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을 넘어 그대로 살았다는 말이다.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복을 얻기 위해 그는 자신의 재물 일체를 버리고자 했다. 자신의 돈을 빌려간 차용증서를 빚진 사람 앞에서 불사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옷 한 벌만을 걸치고 가난하게 거지처럼 살았다. 한마디로 의식주 문제를 성서 말씀에 근거하여 초월했던 것이다.

자신의 신앙적 삶을 이해 못해 부인이 몇 차례 집을 나간 적도 있었다한다. 이런 삶을 일컬어 성서와의 동시성을 이룬 삶이라 말할 수 있겠고 신학자 본회퍼의 말대로 영적 해석학이라 이름 붙여도 좋겠다. 하느님 온전하심을 그대로 자신 속에 실현시키는 것을 신앙의 오롯한 과제라 생각한 것이다.

엄두섭은 이런 이세종을 ‘호세아를 닮을 성자’라 칭한 바 있다. 감신대 교수로서 최초의 조직신학자로 알려진 정경옥 역시 이세종을 만났고 그를 ‘자기를 이긴 사람, 참된 사랑의 사도’라 칭했다는 놀라운 사실도 발견했다. 이런 선생을 좆으며 신앙을 배운 이가 바로 동광원의 창시자 이현필이었으며 책에 서술된 이세종에 대한 글 대다수가 3년간 동광원에 머물면서 이현필에게서 듣고 배운 것이라 저자는 밝히고 있다.

4.

저자 임낙경은 본 책에서 유영모를 일컬어 ‘큰 스승’이라 했고 이현필을 향해서는 ‘나의 옛 스승’이라 불렀다. 본 책에 언급된 모든 이들이 신앙의 스승들이겠으나 스승으로 명기한 이들은 이 둘 뿐이다. 여기서 ‘큰’이 사상적 차원에서의 평가라면 ‘옛’은 삶의 친근감 내지 친화도를 적시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하여 생전에 꼭 다시 뵙고 싶은 이가 이현필이고 다음이 유영모라 한 것이다.

이처럼 이현필은 임낙경에게 있어 구체적 삶의 스승이었다. 동광원에서 3년간 같이 살았던 공동체적 경험 탓일 것이다. 이세종의 산당에서 성경공부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했던 이현필은 1940년대 말 그를 따르던 몇몇 중요 인물들과 함께 개신교 수도(독신) 공동체인 동광원을 세웠다. 스승의 권유를 무릅쓰고 결혼했던 이현필이 다석은 물론 이세종처럼 해혼(解婚)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현필은 늘상 산에서 기도하다 새벽을 맞을 만큼 새벽을 사랑하였다. 육을 괴롭게 하여 영이 맑아 질 수 있다면 그는 기도를 통해 어떤 고통도 인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기에 겪어야 할 고통은 그에게 문젯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가 한번 집회를 하고나면 집을 떠나 출가하는 수도자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나 교회와 가정이 그를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언급하였듯 이현필과 동광원은 나뉠 수 없는 관계로 얽혀져 있다. 지금까지 이현필은 동광원 사람들에 너무도 큰 인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도 동광원에는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거주하며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추위에 떠는 거리의 고아들을 위해 자신의 이불을 수차례나 갖다 주며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기억하는 까닭이다.

이현필에게 그리스도 사랑이란 ‘내가 추워 떨고 있을 때 사랑하는 제자가 아궁이에서 밥 먹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그는 구원과 무관한 교리를 갖고서 그를 율법처럼 지키는 신앙적 태도를 용인치 않았고 그 스스로 그 선을 넘기도 했다. 법과 원칙을 존중하되 그것의 노예로 사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스승처럼 한 벌의 옷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성서적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임종 시 ‘아! 기쁘다 기뻐’란 말을 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있다.

5.

본 책에서 이낙경 목사가 크게 주목하는 다른 스승들로는 선교사였던 서서평과 그와 함께 일했던 최홍종 목사이다. 선교사들 중에서 예수를 잘 믿고 그처럼 살았던 이로서 서서평 만한 존재가 없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라도 지역에 파송된 독일계 미국 장로교 선교사였던 서서평(1880-1934)은 간호학 전공자로서 한일 장신대의 모체가 되는 성경학교를 세웠고 그곳에서 여성 및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수많은 나환자들의 친구로 일생을 함께 했다.

혹자는 이런 서서평을 가톨릭교회의 그 어떤 성녀들 보다 훌륭한 존재라 평하기도 한다. 그녀는 이웃사랑을 실천했을 뿐 여타의 사람들처럼 사회사업을 하지 않았던 탓이다. 이런 서서평 선교사를 일컬어 임낙경은 예수를 정말로 잘 믿은 사람이라 소박하게 평하였다. 예수처럼 산 사람이 바로 예수를 잘 믿은 사람이란 것이다.

다행히도 그녀의 전기가 출간되어 읽혀질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그의 전기를 쓰신 분이 본 책에서 저자가 자신을 ‘타락시킨 존재’라 이름 붙인 백춘성 장로였다. 소소한 일상과 담쌓고 살았던 자신에게 일상의 기쁨을 되찾아 주었던 탓이다. 그로써 저자는 종교생활이 자칫 금기를 지키는 것과 동일시되는 오류를 벗을 수 있었다. 성속(聖俗)의 일치를 꿈꾸며 자유롭게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을 임낙경은 크게 고맙다 하였다.

저자가 이런 서서평 선교사를 알게 된 것은 최흥종으로 인함이었다. 본래 주먹깨나 쓰며 일신상 호의호식을 일삼던 그였으나 기독교를 만나 민족의 문제에 눈뜨게 되었다 한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큰 땅을 병원부지로 기증하는 역사도 일궈낸 장본인이었다. 나환자촌에서 서서평과 만나 동갑내기로서 평생을 함께 활동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에게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과 달리 나환자 역시 조선의 백성이요,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존재들이었던 까닭이다.

이런 삶을 위해 최흥종은 자신에게 오방(伍放)이란 호를 부여하였다. 다섯 가지 욕심, 즉 명예욕, 물질욕, 식욕, 성욕 그리고 수면욕까지 버리겠다는 마음의 발로였다. 혈육에 메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되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나서지 않고 교파를 초월하여 살겠다는 다짐으로 풀이되기도 했다.

김구와의 만남에서 정치 참여를 권유받기도 했으나 그마저 초월했던 큰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의 장례식이 서서평 선교사에 이어 광주에서의 두 번째로 열린 사회장이었다는 것은 그를 향한 세상의 평가를 가늠할 수 있다. 이점에서 임낙경은 82세 되신 최흥종 목사와의 만남을 그 어떤 스승과의 만남 이상으로 중히 여기며 살았다. 그가 돌파리 의사가 된 것도 동양인의 병은 동의보감으로 고친다는 그의 통찰에서 연유한 것이라 고백한다.

6.

마지막으로 저자가 크게 의미를 둔 것은 의외로 자유, 진보주의 신학자이자 목사인 강원용과의 만남이었다. 보수 신학의 산실로 평가받은 평양 신학교 출신 목사들과 만났던 저자였으나 종전과는 달리 한국 신학대학 출신으로 크리스챤 아카데미 활동을 주도한 강원용을 스승이라 칭한 것이다. 1976년 수원 아카데미에서의 첫 만남이 운명적인 사건이 되어 저자의 삶에 또 다른 단층을 형성할 수 있도록 했다.

▲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임낙경은 서양 교육을 출중하게 받고 남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지녔음에도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 솔직 담백한 강원용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지금껏 보아온 성자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으나 현실 문제에 대한 정치적 판단과 신학적 이해가 한편으로 치우친 자신의 삶에 중용을 선사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위한 중간집단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한 유명 인사들이 아카데미 출신인 것을 보면서 저자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 지평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곳에서 종교간 대화의 구체적 모습이 가시화된 것을 본 것도 임낙경의 자유혼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었다. 법정, 김수환, 오재식과의 만남과 사귐도 의미 깊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임낙경이 일방적으로 이런 정황을 수용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농부인 자신이 인텔리 진보 목사 강원용을 만난 것도 영광이지만 그가 자신과 같은 무지렁이 농부를 만난 것도 축복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강원용과의 만남은 저자에게 양가적 감정을 갖게 했다.

하지만 그의 임종 시 임낙경은 노동자, 농민이 주관하는 추모 예배를 주관했다. 이름 속 한자어가 말하듯 용(龍)처럼 살고 가셨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 없었던 탓이다. 이처럼 강원용은 임낙경에게 다른 기독교의 모습을 각인시킨 또 다른 스승이었다.

이외에도 한국 기독교 역사에 두루 기억될 무수한 인물들이 저자의 스승으로 언급되었으나 일일이 다 언급할 수 없어 유감이다. 70세를 맞는 임낙경 목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에 언급된 모든 이들을 읽고 생각하며 우리들 속에 체화시켜 내야 할 필요가 있다. 짧은 기독교 역사 속에 이렇듯 자신의 삶을 불사른 기독교 스승들이 있었다는 현실이 너무도 감격스럽다. 그간 이름도 빛도 없이 존재감을 잃은 채 존재했었으나 이 책을 통해 그들의 혼을 다시 불러내어 오늘을 사는 우리 속에 작동케 하는 것이 이들을 기리는 방식이 될 것이다. 예수를 닮고자 했고 그와 같은 삶을 살아냈던 신앙의 스승들이 이처럼 많이 있건만 도대체 오늘의 교회, 기독교는 왜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지도 긴 호흡으로 되물을 일이다.

7.

이제 마지막으로 본 책 『우리의 영성이야기』의 출판이 주는 신학적 의미를 짧게 정리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의 출판으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이며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탓이다.

우선 앞서 언급했듯 본 책은 그간 한국사 및 한국 교회사 교과서에 충실히 소개되지 않은 살아있는 기독교 역사 속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지대하다. 비록 그들은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았으나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역사를 회복시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둘째로 한 사람의 인격이 형성됨에 있어 이렇듯 많은 신앙의 스승들이 필요했음을 우리는 경이롭게 지켜보아야 한다. 다양한 사상이 어우러져 새로운 세계가 창발 되는 모습이 임낙경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들어난 것을 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진보와 보스를 아울러 새 인격을 들어내는 신비한 역사 앞에 머리를 조아릴 일이다.

셋째로 한국 기독교의 초창기 역사가 민족과 함께 했고 항시 민중 곁에 가까이 있었음을 재차 환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오늘처럼 교회생활에 충실한 것과 크게 달랐음을 기억할 일이다.

넷째로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예수 곧 예수 믿기는 성서와 동시성을 사는 일이었던 것을 기억할 일이다. 자신의 이름을 ‘空’으로 바꾸었다면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내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긴 것이다. 이점에서 그들은 참으로 예수의 제자들이었다. 그들로 인해 오늘의 교회가 존재했건만 오히려 우리는 지금 제자 됨을 잊고 있다. 이점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지 못하는 교회는 예수를 한갓 신화나 이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란 지적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로 이들 초기 기독교 스승들은 예수에 전념하면서도 결코 좁은 울타리를 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교리가 아니라 삶으로 신앙을 들어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이를 일컬어 현대신학은 수행적 진리라 하는 바, 이미 앞선 시대에 우리는 서양의 미래를 살아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들 속에서 한국적 기독교, 토착화된 기독교의 전형을 생각할 수 있다. 서양의 기독교와 다른 한국 기독교의 포용성, 실천성 그리고 공동체성에 대한 각별한 이해와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예컨대 동광원의 존재는 우리에게 신학적 연구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설립 역사, 그곳의 정신세계, 공동체적 삶, 종교간 포용성 등은 한국 고유의 기독교성을 알리는 지표가 될 것이다.

미주

(미주 1) 이 글은 본 책 말미에 조금 다른 형식으로 실려 있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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