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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사회주의, 하나님 나라의 양날개하나님 나라와 종교적 사회주의 1
류장현 교수(한신대 신학부/조직신학) | 승인 2018.09.13 20:10

라가츠의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은 이미 그의 초기 시절에 나타난다. 그는 하인젠베르크의 목사로서(1890-1893) 1892년 성 갈렌 강연에서 사회주의에 대하여 처음 언급했으며, 그후 같은 해 투시스에서 개최되었던 목회자 협의회의 “사회주의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라는 주제 토론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쿠어 시절에는 사회주의자들과의 만남을 시도했다. 그는 그 당시 특별히 로버트손(F. W. Robertson)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라가츠의 사회주의에 대한 확실한 신념은 바젤 시절에 형성된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시절에 라가츠의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었고, 그는 그것을 철저하게 연구했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와의 만남은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단계”를 형성한다.(미주 1)

해방을 향한 절박한 심정 때문에

라가츠는 자서전적 저술인 “나의 정신적 발전”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연구는 나에게 강력하고 ‘종교적인’ 감명을 주었다.”고 고백한다.(미주 2)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의 동기와 원인은 그 당시에 극적인 사회적 상황과 변혁을 통한 사회적 구원에 대한 희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나를 쿠어에서 보다 바젤에서 더 강하게 사회주의로 밀어붙인 것은 특별히 ‘하나의’ 동기가 있었다. 나는 마음을 괴롭히는 우리 사회의 상처들이 오직 완전한 사회적 변혁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그곳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인식했다.”(미주 3)

라가츠의 사회적 문제와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은 혁명적인 동인과 해방의 절박한 동인에 기인한다. A. 린트의 라가츠의 사회주의에 대한 정신사적 해석은 이 실천적이고 사건적인 동인을 통해서 보충되어야만 한다.(미주 4) 라가츠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교조적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로부터” 종교적·사회적 의미를 찾는다.(미주 5)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의 척도는 역사 속에서 역사를 넘어서 통치하는 살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세상을 위한 그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라가츠의 사회주의에 대한 분석 방법은 ‘종교적-사회적 해석’이다. 라가츠는 그 해석 방법을 “가장 최상의 관점”이라고 부른다.(미주 6) 그러나 종교적-사회적 해석은 사회적 현상의 정치적 경제적 조건들을 부인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경제적 사회 분석의 보충과 경제적 분석이 전혀 설명할 수 없는 도덕적 차원의 강조이다.

“경제적 조건들은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오직 이 자본주의 세계의 도덕적 모순을, 이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반항의 힘을 설명할 수 없다.”(미주 7)

하나님 나라에서 흘러나와 사회주의로

라가츠의 사회주의에 대한 종교적-사회적 분석과 사회 운동은 “하나님으로부터-하나님에게로”의 관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이율 배반적 본질, 더 정확히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의 양극성에 기초한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모든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며, 사회주의가 하나님 나라의 깊은 원천에서 흘러나와서,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거꾸로 사회주의자들에게 선포한다.”(미주 8)

사회주의는 라가츠에 의하면 원초적으로 기존의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대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는 “기독교적 부르주아적 세상의 유산과 과실”이다.(미주 9) 하나님 나라의 규칙이 이 경우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의 공동체에서 발생한 공동체를 통해서 일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즐겨 ‘낯선 곳에서’,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부른 낯선 맹금류를 통해서 이 공동체를 각성시키는 일을 하신다. 그리고 그는 또한 그의 적대자를 통해서 일한다. 그것은 그의 친구들에게 수치가 된다. 그는 그들이 그의 자유와 아들들의 영광의 메시지를 상실한 곳에서 니체를, 그들이 그의 사회주의를 상실한 곳에서 마르크스를, 그들이 그의 공산주의를 상실한 곳에서 레닌을, 그들이 그의 무정부주의를 상실한 곳에서 프루동과 바쿠닌을 부른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모든 종류의 방법으로.”(미주 10)

그것이 곧 “신적 통치의 방식”이며,(미주 11) “하나님의 인식과 하나님의 통치의 거대한 확장”(미주 12)이다. 그 때문에 라가츠는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기독교의 타락의 표징” 및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도래의 약속”으로 인식한다.(미주 13) 라가츠는 쿠터와는 달리 이 사회민주주의의 적극적 평가를 결코 절대화하지 않는다.

정당으로서 사회민주주의는, 쿠터와는 다르게, 신적 사상의 직접적인 담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채찍”일 뿐이다.(미주 14)

“우리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고백은 사회주의, 사회와 특별히 기독교의 과실에 대한 고백이었다. 그것은 항의와 신앙고백이었다. 우리의 사회민주주의로의 길은 정치적 정당으로의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직의 길이었다.”(미주 15)

우리가 라가츠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파악하려면, 특별히 그의 언어사용에 주의해야만 한다. 그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란 개념을 이중적 의미로 사용한다. 사회주의는 근본 개념적으로 경제적·정치적 체제인 현실로 존재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도덕적 이상”-현실 사회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체제는 단지 그것의 현실화와 방사의 한 종류이다-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복음의 요구와 실현으로서 공동체의 형태”를(미주 16) 의미한다.

“복음의 사회적 이상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이다.”(미주 17)

모든 사회주의는 라가츠에 의하면 형제성을 가리킨다.

“사회주의의 의미가 형제성에서 만발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꽃봉오리는 시들고 가치 없이 떨어진다.”(미주 18)

우리는 공동체 형태의 종교적·사회학적 적용이, 이미 말한 것 같이, ‘새로운 공동체’라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인간의 하나님의 자녀됨과 인간의 형제됨이 하나님의 아버지됨 안에서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원리의 정치적 경제적 적용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라가츠는 이 사회주의를 “이상적-윤리적 사회주의”가(미주 19) 아니라 “성서와 하나님 나라의 사회주의”(미주 20) 및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종교적 사회주의”로(미주 21) 특징짓는다.

기독교는 새 하늘의 진리, 그리스도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새 땅의 진리

기독교가 하나님 나라의 양극성 중에서 새 하늘의 진리로서 한 극을 형성한다면, 그리스도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새 땅의 진리로서 다른 한 극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단어의 최상의 의미와 사회 변혁의, 다르게 표현하면, 정의와 형제성의 압박 속에서 사회주의는 살아 있고, 창조적이며, 세상 초월적이고, 세상을 극복하는 하나님과 그의 현실성 그리고 계속적인 창조에 대한 신앙에서 유래한다.

“모든 참된 사회주의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삶의 의미성은, 모든 상승에 대한 정서와 힘은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현실성의 세계로부터,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완전한 일치로부터 흘러나온다.”(미주 22)

라가츠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유대적 휴머니즘의 정치적·사회적 형태와 메시아주의의 종교로 이해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종교는 오래되었고, 오래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메시아주의이다, 즉 세상에서 억압당하는 자들과 제한 당하는 자들에게 분배되어져야 하는 정의의 나라에 대한 신앙이다.”(미주 23)

이 메시아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영혼이며, 학문적 형식은 그의 육체이다. 바로 이 관점이 라가츠의 마르크스주의 이해를 위한 열쇠이며, 또한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의 출발점이다. 그의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적 검토는 특별히 사적 유물론과 계급 투쟁론에 집중되어 있다.

라가츠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자,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참으로 종교적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또한 그것에 상응한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라가츠의 살아 있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신앙은 그를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 인도했다. 시대적 상황은 그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길로 이끌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모든 인간적 공동체 생활의 새롭고 결정적이며 완전한 규정을 원하며, 하나님 나라는 그의 본질에 따라서 곧 인간과 인간의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자연적 관계 속에서 형태를 취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 길, 그리스도 제자직의 길

라가츠는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의 길을 그리스도의 제자직의 길로 인식한다. 그것은 라가츠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와 만나야 했던 이데올로기적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간 가운데 거주를 현재의 경제적 질서들과 함께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 경제적 질서들은 상호 착취의 세계를 의미하나, 그리스도의 세계는 사랑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사회는 약탈자의 원리로 움직이나-하나님 나라의 이상은 형제됨이다.”(미주 24)

그러나 사회주의로의 길은 라가츠가 하나님 나라를 사회주의와 동일시하거나 혼동했다는 것을, 또는 하나님 나라를 이데올로기화하였다는 것을 절대로 의미하지 않는다. 라가츠는 분명히 사회주의에서 하나님 나라의 근본 진리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진리가 아니라 단지 일부분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주의 보다 더 크다.(미주 25)

미주

(미주 1) Markus Mattmüller, Leonhard Ragaz und Der Religiöse Sozialismus, Eine Biographie Bd. 1: Die Entwicklung der Persönlichkeit und des Werkes bis ins Jahr 1913(Zollik-zurich, 1957), S. 238. (이하 MW, Bd. I. 라고 쓴다.)
(미주 2) L. Ragaz, 『Meine geistige Entwicklung』, S. 243.
(미주 3) MW Bd. 1, S. 237. 
(미주 4) A. 린트는 라가츠의 일기에 근거해서 네 가지 원인과 동기를 확정한다. 1).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과 청년 나우만에 대한 문헌적 숙지, 2). 빌헤름 헤르만의 신학적 영향과 역사적 예수 문제에 대한 계속적인 노력, 3). ‘천박한 자유주의’에 대한 강한 환멸, 4). 슈렘프와 키에르케고르의 고무적 영향 (A. Lindt, 『Leonhard Ragaz』, S. 34).
(미주 5) MW Bd. 1, S. 237.
(미주 6) L. Ragaz, 『Der Sozialismus』, S. 191.
(미주 7) Von Christus zu Marx, S. 77.
(미주 8) L. Ragaz, “Unser Weg”, in: A. Pfeiffer(Hrsg.), Religiöse Sozislisten, Olten: 1976, S. 188.
(미주 9) L. Ragaz, 『Der Sozialismus』, S. 192. Vgl. Gleichnisse, S. 177.
(미주 10) Bibel 4, S. 79-80.
(미주 11) A.a.O., S. 79.
(미주 12) A.a.O., S. 78.
(미주 13) Weltreich Bd. 2, S. 15.  L. Ragaz, 『Der Sozialismus』, S. 191.
(미주 14) Briefe Bd. 1, S. 203. Vgl. H. Kutter, Sie müssen! Ein offenes Wort an die Christliche Gesellschaft, Zürich 1903, S. 261: 쿠터는 “하나님의 약속이 사회민주주의에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미주 15) Weltreich Bd. 2, S. 16-17.
(미주 16) Sozialismus und Gewalt, S. 5.
(미주 17) Weltreich Bd. 2, S. 61.
(미주 18) L. Ragaz, Unser Weg, S. 188.
(미주 19) A. Lindt, Leonhard Ragaz, S. 239.
(미주 20) L. Ragaz, Was ist der religiöse Sozialismus, S. 75.
(미주 21) Weltreich Bd. 2, S. 50. “사회주의는 종교적 사회주의로 존재해야만 한다.”
(미주 22) Theosophie, S. 74.
(미주 23) Von Christus zu Marx, S. 63. 1960년대 유럽에서 있었던 “저주에서 대화”로의 길은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고찰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대화와 협력의 결과는 라가츠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를 지지한다 (vgl. G. Girard, Christen für den Sozialismus-Warum?, Stuttgart: 1979, S.70). 그의 성서와 마르크스주의 에서 “메시아주의적 성분”의 재발견은 라가츠의 결론과 일치한다(vgl. J. M. Lochman, Marx begegnen- was Christen und Marxisten eint und trennt, Güterloher 1975. Iring Fetscher und Milan Machovec (Hrsg.), Marxisten und die Sache Jesu, München 1974, Milan Machovec, Jesus für Atheisten. Mit einem Geleitwort von Helmut Gollwitzer, Stuttgart 1972).
(미주 24) Weltreich Bd. 2, S. 7-8.
(미주 25) A.a.O., S. 11. 또한 S. 13, 15 50을 참조하라. Vgl. U. Teuscher, Gottesreichserleben und Geschichtsideologie bei Leonhard Ragaz, EvTh 23. 1963, S. 62-88. 그는 라가츠가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이데올로기화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라가츠의 예언자적 사상을 완전히 편파적으로 해석했다. 라가츠는 하나님 나라를 절대로 이데올로기화하지 않는다(Weltreich Bd. 2, S. 15).

류장현 교수(한신대 신학부/조직신학)  jena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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