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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아니라 동생을, 강자가 아니라 약자를장일선, 『구약성서와 설교』 6
에큐메니안 | 승인 2018.09.18 22:06
지난 시간에 이어 고 장일선 교수님의 유작, 『구약성서와 설교』에서 구약성서 특히 창세기에 등장하는 족장들에 관한 “민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교문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창세기의 족장사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사를 보여주는 살펴보신 내용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이루어가시는 장면들에 대한 신학적 이해이자 설교입니다. 또한 이 아브라함 계약이 구·신약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창세기 21:1-20

오경의 중심 주제는 야훼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땅과 자손의 축복을 내려 주셨고, 이 축복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어 가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땅에 대한 약속은 나그네와 같이 떠돌이살이를 하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묻을 수 있는 막벨라 동굴을 소유함으로써 그 후손이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통하여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창 17:8)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비록 흉년이 들어 그 후손이 일시 이집트 땅에 머물게 되었지만,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자손의 축복은 야훼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어 낼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창 12:2) 하는 약속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후 아브라함과의 계약에서 “내가 너로 심힌 번성케 하라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리라”(창 17:6)라고 재천명된다. 창세기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15:5) 약속된다.

그런데 이 같은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있어야 한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80세가 되기까지 자식이 없었다. 그의 아내 사라가 임신을 하지 못했다. 비록 후손의 축복을 약속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볼 때 그 축복이 실현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타협책을 구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의 몸종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는 합법적인 수단이다. 그리하여 이스마엘을 얻게 된 것이다. 적어도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비록 종의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주인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같은 방법을 통해서라도 이름을 이어보려고 애쓴 것이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불신앙과 인간의 얕은 꾀를 나타내는 것이다. 성서 기자는 독자에게 오경에서 하나님의 후손의 약속이라는 계획이 이스마엘의 탄생으로 좌절되는가 하는 안타까운 조바심을 심어 준다. 창세기 16장에서 이스마엘이 탄생했는데 창세기 17장에서 13년 뒤, 즉 아브라함의 99세 때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또 다시 후손의 약속을 들려 준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이가 100세이고 아내의 나이가 90세이니 어떻게 자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 생각할 때 야훼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 다음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의 천사는 마므레 상수리나무에 나타나서 내년에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보리라고 말한다(창 18:10).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그래서 사라는 그 말을 듣고 웃어버렸다. 성서 기자는 독자에게 아브라함이 정말 자기 자식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창세기 19장과 20장은 중간에 끼어든 에피소드이고, 21장에 가서야 이삭 탄생 설화가 계속된다. 그렇지만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과 모압과 암몬의 비정상적인 탄생이 언급되고, 20장에서는 애굽에 내려간 아브라함이 아내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이야기 도중 사라 때문에 아비멜렉 집에서는 모든 태가 닫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창세기 21장에서는 사라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하여 이삭을 낳는 기사가 이어진다. 독자는 드디어 기적이 발생했구나 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된다. 예전 우리나라에서도 나무나 돌에 기도를 드려 자식을 구한 예들이 많이 있다. 필자가 뉴질랜드에 유학 갔을 때 구한말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은퇴한 어느 영국 선교사의 회고담을 들은 적이 있는데, 예전에 어느 시골에서 서울 동대문에 가면 아이를 얻는다는 말을 듣고 어떤 할아버지가 먼 길을 찾아 와 매일 동대문 앞에 자리를 깔고 절을 하며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 본 동대문 옆 이화여대 병원의 어느 외국 의사가 수상히 여겨 그 사연을 알아본 뒤 마침 양자로 보내야만 할 처지에 있는 어떤 갓난아이를 밤 사이에 동대문 앞에 갖다 놓으니 그 할아버지는 동대문이 아이를 주었다고 기뻐하며 집으로 안고 갔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경우를 신이 준 아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틀림없이 신이 준 자식이다.

그런데 나이가 더 든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이스마엘과 그 어머니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다. 이스마엘의 축출로 아브라함의 재산 상속 문제와 또 별처럼 많아지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의 구현에 놓인 장애 요소가 제거되고 이제는 모든 것이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되게 되었다. 야훼 기자는 “야훼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야훼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창 21:1)라는 표현 속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는 인간적인 불신에서 이루어진 결과인 이스마엘이 아무런 자리를 차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쫓겨나야 하는 것이다. 야훼 기자는 21장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종의 아들”이라는 표현만을 사용하고 있다.

▲ 사라가 이삭을 낳자 이스마엘과의 갈등이 일어난다. 또 다시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계약이 위협을 받게 된다. ⓒGetty Image

야훼 기자가 창세기 21장에서 아브라함이 자기의 혈육을 내쫓은 것은 22장에서 독자(獨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과 이어지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시행되는가 하고 기대했다가 22장에 와서 그를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야훼의 명령을 듣고는 깜짝 놀라게 된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차라리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스마엘을 내보내지 않았을 것을 하는 느낌마저 들었을 것이다.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때에는 인간이 안전 장치로 가지고 있는 모든 준비물까지 완전히 비어 버린 상태에서 새롭게 채워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을 다 쏟아 놓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그런 다음 이삭을 다시 돌려 주었고 그를 통해 약속의 실현을 다짐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섭리는 하나님만이 택하신 길이다. 인간적인 지혜나 준비는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대결은 그 아들 때에 와서는 야곱과 에서의 대결로 나타난다. 에서는 분명히 형이고 야곱은 동생이었으며. 그러기에 당시의 관습대로는 형이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아버지 이삭도 큰 아들 에서를 더 좋아했던 모양이고, 그가 사냥해 온 음식을 먹고는 장자의 축복을 해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구입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도움을 입어 아버지의 축북을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이다. 선지자 말라기는 이 문제를 야훼의 섭리로 해석한다. “나 야훼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 1:2)

하나님의 섭리는 형 이스마엘이 아닌 동생 이삭을,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신 것이다.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서 이와 같은 유형을 우리는 계속해서 찾아 볼 수 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장남 르우벤보다는 뒤늦게 태어난 요셉이 아버지의 총애를 더 받았다. 그런데 요셉의 두 아들 므낫네와 에브라임 중에서도 요셉은 장남 므낫세가 아버지 야곱의 축복을 받기를 원했으나 야곱은 오히려 그 동생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해 준 것이다. 에브라임이란 이름은 후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중요한 이름이 되었다.

다윗 왕도 여덟 형제 중 막내였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기 전 이새에게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훼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판단 기준이 다름을 시사하고 있다. 다윗의 장남 압논이 그 아버지의 대를 잇지 못하고 오히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형과 동생 중에서 오히려 동생 편을 드시는 하나님은 강자와 약자 사이의 대결에서도 약자 편을 드신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약자 자를 들어 장한 자를 넘어뜨린 것인다.

에서와 야곱의 대결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택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고치셨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극히 약한 백성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녀의 축복을 시행하신 것이다. 70명의 야곱의 후손이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얼마 후에는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출 1:7) 된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버리고 이삭을 택하셨을까? 우리가 위에서 본 대로 이삭의 두 아들 중 하나님께서는 에서보다는 야곱을 택하셨다. 그리고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유다에게서 다윗 왕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점점 좁아지면서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그의 구원의 뜻을 펴 나가신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에게 거슬로 올라가지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마 1:1-2) 하는 식의 서열을 구약과 신약을 잇는 하나님의 구원사이기도 하다.

왜 이스마엘 대신 이삭이 선택되었느냐 하는 문제는 신약 시대에 와서 구약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재해석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삭이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한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식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8).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를 대조시키고 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과는 상관 없이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 자연 질서의 소생이라는 뜻이고, 이삭은 하나님께서 미리 전부터 예정하시고 또 그를 통해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는 약속을 이행하실 보장의 구체적 실례라고 본 것이다.

창세기 21장에서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다는 언급은 없지만, 사라는 이스마엘이 장차 이삭의 상속 문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보아 내쫓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서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를 영육 간의 대결로 해석하면서 핍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고 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참된 자유가 이루어진다는 그의 교리를 구약성서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대결은 형과 아우의 대결이며, 이스라엘과 에돔의 대결이며, 또 육체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의 대결, 즉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대결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이스마엘 대신 이삭을 선택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소수의 무리를 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택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웃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를 지니라”(갈 3: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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