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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아니라 악을 찾기에 골몰했던 교회의 역사선과 악, 원수(마 5:44-45)
이성훈 | 승인 2018.09.24 08:59

어느 집단이든지 그 집단이 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 추구점은 목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집단의 방향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추구점이 있다면 당연하게도 지양하는 점도 생겨납니다. 추구점의 반대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바를 한 단어로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사랑을 쫓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랑의 반대에 있는 ‘미움’이라든지, ‘질투’라든지 하는 것들을 경계하며 지양해야 합니다.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사실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사랑을 포함하고 있는 ‘선’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가 지양해야 하는 바는 ‘악’이 됩니다. 교회는 과거로부터 선을 추구하도록 촉구하였으며 악을 따르지 않도록 경계해왔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에 속해 있으면서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악에 대해서 지금까지 어떤 자세로 대해왔는지, 또 교회들은 이를 어떻게 대해왔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교회가 말해온 ‘악’

기독교의 추구점이 ‘선’이라고 말하면 그 개념이 상당히 애매합니다. 선이나 악은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이것을 추구하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구체적인 예시가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추구점이 ‘사랑’과 ‘구제’였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남을 돕는 삶을 예수님께서 직접 몸으로 행하시며 우리에게 선에 대한 예시를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에 반대하여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악의 예는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노략’, ‘착취’, ‘소외’ 등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모든 것들을 아울러서 말할 수 있는 것이 강한 자에 의한, 힘이 있는 자에 의한, 가진 자에 의한 폭력입니다.

폭력이라는 말도 어떻게 생각하면 추상적일 수 있겠지만, ‘악’이라는 말 보다는 구체적으로 느껴집니다. 또한 폭력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우리가 머리에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구체적인 예시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 이후의 교회들이 이 지양해야만 하는 ‘폭력’에 대해서 어떻게 대해 왔는지, ‘악’에 대해서 어떻게 대해왔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후의 내용들은 교회 전체에 관련된 내용은 아닐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에 있어서 모든 교회가 이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배워갈 때, 한 번쯤은 듣게 되는 내용들이고, 저 스스로 왜 이런 일들이 교회에서 벌어지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이에 대한 반박은 당연히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단지 큰 흐름 속에서 함께 생각해보자는 의미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폭력에 반대합니다. 강자의 폭력에 반대하는 말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서신들은 때론 그 폭력에 머리 숙일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폭력에 잠시 머리 숙이고 있자는 맥락도 있습니다만, 전체적인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만히 있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초기 서신들과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폭력 자체에 반대했습니다. 전반적인 폭력 행위 전체를 반대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해감에 따라서 이 폭력이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일반적인 폭력에의 반대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폭력, 패권주의적 폭력에 대한 반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제국을 ‘악’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물론 구약성경에서도 맥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많은 내용들을 정리하다보면, 제국이 된 국가가 행하는 일들로 정리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구약성경은 나라가 비대해지고 강대국이 되는 일을 막습니다. 지나친 풍요는 결국 죄를 낳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만큼의 풍요만을 허락하십니다.

이런 구약성경의 맥락 속에서 제국의 폭력을 반대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직접적으로 제국 자체가 악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 지나친 풍요 속에서 사람이 행하는 행동이 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에 대해서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이들이 유대교를 ‘악’으로 생각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선교를 그만두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유대교를 적으로 인식하지도 않았고, 유대교를 ‘악’이라고 규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지주의를 경계했습니다.

우리는 간혹 초대교회가 박해받는 이야기들을 보면서 유대교가 그들을 신고하고 그들을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실제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로마였고, 유대교인들은 때때로 그 로마인들에 의해서 함께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마에 의해 자행된 기독교인 학살은 1920년대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 자신들이 지양하는 폭력을 가진 존재는 로마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일반적인 폭력의 개념은 제국주의에 의한 폭력이라는 개념으로 인식되었고, 이는 ‘로마’라는 한 나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적은 ‘로마’였고, 로마는 멸하여 없어져야 할 존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존재가 됩니다. 많은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멸망의 대상이 로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악’이었던 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해버립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들을 ‘악’으로 생각했던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적, 악의 대상은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악’이 더 이상 ‘악’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새로운 악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유대인’입니다.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자 기독교의 적, 기독교에 있어서 ‘악’은 유대인이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인식은 지금 우리에게도 조금은 남아있습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스라엘이라는 끊임없이 이웃 나라를 핍박하는 나라는 기독교의 모체라는 동질감을 가지면서도, 유대인이라고 하면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던 악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이라는 명칭까지 더해지면 예수님을 대적한 악당들로 인식됩니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유대인들은 유럽 사회에서 끊임없는 박해를 받습니다.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던 마틴 루터의 경우,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라는 책을 써서 유대인 학살에 명분을 주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루터의 이런 생각은 독일 기독교인들의 사고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히틀러에 의해 자행되었던 홀로코스트는 독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기독교가 유대인을 악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 중세의 마녀사냥을 다룬 삽화, 19세기 경의 한 책. ⓒWikipedia

조금 시간을 되돌려서 중세에는 인류의 지식이 한층 발달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류가 알지 못하는 영역들, 깨닫지 못하는 자연의 힘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시대에 암에 걸린다면 우리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때때로 병원 치료를 받지 않고 산 속에 들어가서 암이 완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자연치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치유는 확률이 상당히 낮기 때문에 병원은 이를 방치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100% 암을 완치할 수 있는 자연치유법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의 병원은 그 치료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무면허 의료시술로 법정에 고발할 것입니다.

그 존재를 그냥 놔둘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의 치료 방식을 과학적으로 밝혀낼 수 있다면 병원에서도 그 방식을 채택하겠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를 잘못된 존재라고 말할 것임은 자명합니다.

중세에 이런 일을 행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일반적인 지식 외의 지식을 갖고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마녀’입니다.

만약 마녀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돌렸다면, 이들은 기독교의 성인이 되었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그들을 그냥 놔둘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일,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는 일을 행하면 그것은 ‘기적’이었고, ‘기적’은 오직 교회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들의 기적은 거짓 기적이라고 말하였고, 이들을 ‘악’으로 규정한 채 사냥하기 시작합니다. 훗날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게 되는 ‘마녀 사냥’입니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 이외의 종교, 특히 너무나 거대해지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위험을 느끼고 이슬람, 타종교는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이 악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십자군 전쟁입니다. 물론 십자군 전쟁은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이용한 침략 전쟁이었지만, 일반 신앙인들에게 ‘타종교는 악이다’, ‘이슬람은 악이다’라는 마음을 갖게 하였고, 그들이 악을 물리치러 나아가게 했던 전쟁입니다.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모습들은 거의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저는 저희 교회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곤 합니다. 우리가 진화론과 창조론을 이야기할 때, 물리학이라는 과학 체계는 믿으면서 왜 진화론이라는 과학 체계는 못 믿겠다고 말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물리학은 분명 성경과 배치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물리학에 배치되는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 중에 지구에는 ‘중력이 없다’고 말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크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조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화론이라는 생물학 이론보다는 진화론을 주장하는 진화론자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자들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그들과 대적합니다. 그들의 이론이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가지 악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보수 교회들에서는 좌파 빨갱이들은 악이라고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전부 ‘좌파 빨갱이’이고 이들은 악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진보적인 성향이 교회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애시당초 자신들이 과거 악이라고 규정했던, 사탄의 도구인 키보드, 기타, 드럼을 예배당, 그것도 강단에 버젓이 올려놓고 있는 교회들이 ‘진보’를 ‘악’이라 말하는 점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들이 진보를 ‘좌파 빨갱이’라고 말하는 점에서 우리는 이들이 규정하는 ‘악’을 하나 더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공산당을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렇기에 북한은 악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평화를 이끌고 있는 대통령이 아니라 ‘악’과 함께 걸으며 ‘악’과 함께 시시덕거리는 똑같은 ‘악’이 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동성애자들도 성경이 규정하는 악이라고 말합니다. 동성애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신 분들과 이야기해보면, 동성애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여기에서 의아한 점이 생깁니다. 동성애가 병이라면 동성애자는 그들에게 있어서 아픈 사람, 병든 사람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해야 할 행동은 그들을 반대하며 쫓아내는 게 아니라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항상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 치유해 달라고 간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동성애는 병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병든 사람들을 쫓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아무튼 병이든 병이 아니던 이들의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는 끊임없이 ‘악’을 규정하고 그 ‘악’에 해당하는 대상을 지목해왔습니다. 어떤 때는 유대인, 어떤 때는 마녀, 어떤 때는 이슬람교, 지금에 와서는 공산당이나 동성애자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악’, 적대자를 지목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느끼셨겠지만, 지금까지 교회는 ‘악’을 규정함에 있어서 성경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정치적 상황이나 민족적 상황에 따라 ‘악’을 규정해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춘 성경 구절을 따왔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어떤 집단이 추구하는 점이 있다면 당연히 경계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지향하는 바가 있다면 지양하는 바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지양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지양해야 할 것을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 듯 합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 유명한 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일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반대하셨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대하셨던 것은 어떠한 실체적 대상이 아니라 추상적 대상이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을 경계하고 지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 폭력은 대상화 되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 ‘집단’으로 대상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폭력 자체가 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나 집단이 악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마음’이 경계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악한 마음을 품고 악을 행한 ‘사람’이 경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경 말씀을 따르지 않는 행위 자체보다는 말씀에 반하는 행위를 한 ‘사람’이 악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지양해야하는, 경계해야 하는 악이 대상화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로 투영되어 버렸을 때, 예수님의 말씀은 그 본질이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폭력을 경계하고 폭력을 지양하라는 것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남 욕하라고, 남을 비판하라고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악을 행하지 말라고, 또 반대로 내가 선을 행하라고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행하고 행하지 않기보다는 뚜렷하게 악을 행한 사람을, 뚜렷하게 선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비판하는데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또 여기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목적이 더해지면서 ‘우리가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자’라는 본질은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규정하고, 악을 규정하게 되었고, 그를 미워하면, 그를 대적하면 내가 선하게 된다는 방식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방식을 취하였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이런 방식을 선동한 이들은 뒤에 앉아서 자신만의 이득을 취하였습니다.

말씀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선은 내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후에 악을 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악에서 벗어나길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그에게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회개를 촉구한다 하더라도 그를 악인으로 바라보며 ‘너 잘못했으니까 반성해!’ 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의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악을 대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회개를 외치라고 명령 하시면서도 또한 우리에게 남을 정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를 촉구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죄입니다. 그렇기에 이 둘은 전혀 반대되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그 의미는 반대되지 않습니다. 회개 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상대방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회개하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그들을 받아주지 않는 마을에서는 그냥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론

지금까지 기독교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선을 행하고 내가 악을 멀리하는 일보다는 남이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남이 악을 행했다고 비판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죄인 취급하며 멀리하고 비난해왔습니다. 또 핍박해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니가 먼저 선을 행하고 니가 먼저 악을 멀리해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에게 다가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양해야 할 것은 악이고 죄입니다. 기독교가 지양할 것은 사람이나 집단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또 어떤 분들은 절에 가서 스님 손잡고 사랑한다고 회개하시도록 기도하겠다고 이러는 분들도 계신데, 이런 행동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변합시다. 그리고 사랑하며 기도합시다. 특정 대상을 지정해서 미워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정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선을 이루어가는 교회가 됩시다. 그러면 세상으로부터 ‘개독교’라고 욕먹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선을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채워가는 교회가 될 줄 믿고,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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