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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교회의 타락이 불러온 모습라가츠의 현실 사회주의 비판 1
류장현 교수(한신대 신학부/조직신학) | 승인 2018.09.27 21:43

라가츠는 사회주의적 이상과 사회주의적 현실을 구별한다. 그는 사회주의적 이상이 현실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에 의해서 변질되었다고 이해한다. 사회주의적 이상은 라가츠에 의하면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신앙에서 유래한다.

물질적 세계관과의 결합

“도대체 사회주의적 이상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확실히 자본주의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사회적 불의에 대한 사회주의적 분개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 어쨌든 아주 확실히 기독교와 함께 이 세상에 들어온 저 인간이 만든 의식에서, 하여튼 아주 확실히 정의의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신앙에서 유래한다!”(미주 26)

사회주의는 이 세상에서 정의와 선의 나라이며, 특별히 가난한 자들, 억압당하는 자들과 굴욕을 당하는 자들을 높이고 구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다림을 의미하는 유대적 메시아주의의 정치적 또는 사회적 형태이다.(미주 27) 그러므로 사회주의는 철저하게 종교적 또는 도덕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그것은 도의적, 윤리적 또는 이상주의적 세계관이 아니라 신정론적 인식에 기초한 ‘종교적’ 세계관을 의미한다. 그 종교적 세계관은 살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을 전제한다.

도덕적 세계관에 기초한 사회주의의 본질과 원리는 물질적 정신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와 대립한다. 자본주의는 최후에는 인간을, 문화를, 물질의 정수를 종속시킨다.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자본을 지배하지 못하고, 자본이 거꾸로 인간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완전히 “인류의 저주라는 것이 증명되어진 신의 버림받은 생명 없는 문화 체제”에 속한다.

라가츠는 결론적으로 자본주의를 “이기주의, 동물, 기계론, 물질주의, 비인간성, 무신성”으로 특징짓는다.(미주 28) 자본주의의 본질이 사적 화폐경제이며, 그의 원리가 순수한 개인주의 또는 맨체스터 학파적 자유주의라면, 사회주의는 반대로 개인주의에 대한 공동체의 권리와 의무를, 즉 물질의 공동 생산과 공동 소비 및 인간의 공동체적 삶을 강조한다.(미주 29) 하나님의 아버지됨 안에서 인간의 하나님의 자녀됨과 인간의 형제됨의 경제적 사회적 적용을 의미하는 개인주의와 공동체가 사회주의에서 한 짝을 이룬다.(미주 30)

라가츠의 사회주의에 대한 종교적-사회적 해석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이 지배하고,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그것에 의해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던 시대의 주된 경향과 관련되어 있다. 라가츠는 종교적-사회적 해석을 통해서 그들과 투쟁한다. 그는 이 위기를 깊이 인식하며, 그것의 극복을 종교적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로 생각한다.

▲ 라가츠와 그의 동료들. First International Meeting of the International Fellowship of Reconciliation, Bilthoven, The Netherlands, 1919 ⓒWikipedia France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는 라가츠에 의하면 본질적으로 메시아주의적 영혼과 학문적-물질주의적 육체의 내적 모순에서 발생한다.(미주 31)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은 도덕적 세계관과 대립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은 19세기 자연주의적 사고 방식을 통해서 그의 이상주의적, 곧 종교적 영혼을 상실했고, 동시에 학문을 통하여 교의화 되었다. 그것이 사회주의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미주 32) 이러한 사회주의의 변질은 사회주의의 “비극”이며,(미주 33) 본질적으로 “그 자신으로부터 타락의 길”이다.(미주 34)

라가츠는 그 안에서 사회주의가 자유주의의 유산이며, 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물질주의, 반종교성(또는 무신론), 학문 그리고 폭력과 깊이 연결되었음을 보았다.(미주 35) 그러므로 라가츠의 사회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회주의적 관념론”을 통한 “부르주아화된 사회주의”의 극복만이 아니라(미주 36) ‘종교적’ 사회주의를 통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치료이다. 우리는 이제 현실 사회주의의 자본주의적 요소들인 무신론, 물질주의 그리고 학문을 고찰해야 한다.

무신론

종교는 엥겔스에 의하면 자연적·사회적 힘들의 “환상적 반영”이고,(미주 37) 마르크스에 의하면 “민중의 아편”이다.(미주 38) 마르크스의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은 레닌에 의하면 종교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세계관의 초석을 형성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재의 모든 종교들과 교회들을, 모든 종교적 조직들을 착취를 변호하고, 노동 계급을 우둔하고 몽롱하게 만드는 항상 부르주아적 반동의 도구들로 고찰한다.”(미주 39)

왜 마르크스주의가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무신론과 반기독교와 결합되었는가? 근본적인 원인은 라가츠에 의하면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분리,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 사건과 민중 사건의 분리에 있다.

“우리의 역사 발전의 비극은 하나님을 믿으나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를 믿지 않는 자들의 선과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믿으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선이 역사에서 서로 분리되어 달리는데 있다.”(미주 40)

첫 번째 선은 우선 기독교에, 두 번째 선은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적용된다. 최초의 잘못은 그리스도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상실한 기독교에 있다. 그러므로 무신론 운동과 종교 증오는 기독교의 “사회적 과실”과 “사회적 비양심”에서 유래한다.(미주 41)

이 엄청난 사회적 과실은 좁은 의미에서 복음의 사회적 진리에 대한 거부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성서적 메시지의 상실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 나라를, 즉 “세상의 희망”과 “세상의 구원”을 선포하지 않았다. 그것은 “태만죄”와 “유기죄”이다.(미주 42) 사회주의의 종교 비판과 종교 증오는 바로 그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는 종교에 반대해야만 했고,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불러야만 했고, 종교를 그의 철천지 원수로 극복해야만 했다.”(미주 43)

세상의 무신성은 하나님의 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곳에, 즉 하나님의 세계의 근본 진리와 인간의 형제됨을 침해하는 경제 질서에, 맘몬의 지배를 고무하는 우리의 기독교에, 아직도 폭력만을 고려하는 우리의 정치에 존재한다. 라가츠는 이와 관련해서 사회주의의 종교 비판과 종교 증오를 “경건한 무신성”에 대한(미주 44) 실천적 대립으로 이해한다. 그의 관점은 역설적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요청적 무신론”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무신론은 성서적 전통 속에 있으며, 본질적으로 “물신”에 대한 비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미주 45)

그러므로 종교 증오는, 여기서 라가츠는 특별히 러시아 공산주의를 생각한다.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참회의 요구”이다.(미주 46) 또한 그것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를 떠나 세상으로 가는 하나님 나라의 역설적 질서를 의미한다.

끝으로 무신론은 라가츠에게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세상의 무신성은 기독교의 새로운 이론적 견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과 능력의 실천적 증명을 통해서 정복될 수 있다. 공동체는 그것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새로운 방법으로 선포하고, 대리해야만 한다.

공동체는 현 세상의 큰 우상인 맘몬과 폭력에 과감히 맞서야만 한다. 모든 개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의 원초적 의미에 상응한 방법으로 대리해야만 한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이 생활, 행위와 고백이 되어야 한다.

무신론은 라가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론적 원리, 곧 몰트만이 말한 “삼위일체론적 십자가의 신학”을(미주 47)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담지자들인 개인과 새로운 공동체의 대리적 행위를 통해서 선포되어지고 실현되어지는 것을 통해서 극복되어질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의심, 우리 시대의 악마의 폭력 그리고 무신론의 쇄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새로운 제자직을 통해서만 극복되어진다. 그것을 위해서 오직 다른 전향이 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잘못된 폭력의 공산주의 대신에 그리스도의 공산주의를 대리하는 것은 모든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시간 또한 무신론 운동의 근본 의미에 속한다.”(미주 48)

 

미주

(미주 26) L. Ragaz, Von Christus zu Marx - von Marx zu Christus. Ein Beitrag, Rennebach: Furche-Verlag, 1972, S. 77. 라가츠는 우리에게 일본, 중국, 인도의 혁명적 사회 운동을 참조하도록 지시한다.
(미주 27) Weltreich Bd. 2, S. 368 f. 메시아주의는 유대적 휴머니즘과 사회주의의 특별한 형태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메시아주의는 라가츠에 의하면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1) 종교적 형태: 구스타프 란다우어, 마르틴 부버, 쿠르트 아이스너 등이 이 메시아주의를 주장한다. “여기서 사회주의는 신적 생명의 유출이며, 그의 가장 깊은 토대는 사랑이다. 사회주의는 참된 인간적 공동체이다.” 2) 철학적 형태: 이것은 이스라엘의 희망이 칸트의 철학과 결합되고, 그것에 근거를 두고 있는 메시아주의이다. 마부르크 철학 학파, 헤르만 코렌, 파울 나토르프와 막스 아들러 등이 이것을 주장한다. 3) 정치적 사회적 형태: 이것은 유일한 인류의 희망으로, 그의 토대는 정의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여기서 프롤레타리아의 지배가, 그의 토대는 계급투쟁에서, 그러나 마지막에는 극단적 테러에서 나타나는 폭력이 된다. 그러므로 라가츠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계급 투쟁론을 “범유대적 폭력과 증오의 메시아주의의 현대적 형태”라고 부른다(vgl. Weltreich Bd. 2, S. 369-370).
(미주 28) A.a.O., S. 19.  Vgl. Evangelium und sozialer Kampf, S. 7. 라가츠는 현대 자본주의의 정신은 칼빈주의의 바탕에서 가장 강하게 발전하였고, 자본주의는 내세적 금욕주의의 자녀라는 막스 베버의 이론을 비판한다.
(미주 29) Evangelium und sozialer Kampf, S. 15 f.
(미주 30) A.a.O., S. 19 ff.
(미주 31) Von Christus zu Marx, S. 13-14.
(미주 32) A.a.O., S. 84.
(미주 33) A.a.O., S. 14.
(미주 34) A.a.O., S. 85. 111.
(미주 35) Evangelium und sozialer Kampf, S. 13-14. Sergej N. Bulakov, Sozialismus im Christentum? (Hrsg.) von Hans-Jürgen Ruppert, Göttingen, 1977, S. 39: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적 설교를 통해서 민중의 영혼을 가난하고 공허하게 만든다.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가 정신적으로 투쟁했던 자본주의의 독으로 꽉 차 있다. 그는 자본주의의 암흑면이다.”
(미주 36) Von Christus zu Marx, S. 38.
(미주 37) F. Engels, Anti-Dührung, S. 294.
(미주 38) K. Marx,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S, 378. 마르크스는 무신론자들을 유물론자들과 일치시킨다(vgl. K. Marx, Flüchtlingsliteratur 1874, MEW Bd. 18, Berlin 1962, S. 531 f). 무신론자는 현실적 세계에서 “이 감추어진 비실제적 인간의 술어와 상징”으로서 “실재적 인간”이다(K. Marx, Ökonomische-philosophische Manuskripte 1844, EB 1, Berlin, 1972, S. 584).
(미주 39) W. I. Lenin, Über das Verhätnis der Arbeiterpartei zur Religion, Werke 15, Berlin 1972, S. 404.
(미주 40) Von Christus zur Marx, S. 16.
(미주 41) Über Religion, S. 67. 라가츠는 여기서 파울 드레브(Paul Drew)의 말을 인용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무엇을 교회에게 바라는가? 모든 것을! - 교회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없음”
(미주 42) A.a.O., S. 70.
(미주 43) Von Christus zu Marx, S. 17. 무신론은 로흐만에 의하면 그 시대의 교회의 우세한 태도에 대한 반응이다(J. M. Lochman, Erfahrung im Dialog von Christen und Marxisten, in: Helmuth Flammer (Hrsg.), Kirche und Sozialismus, Gütersloh, 1980, S. 78).
(미주 44) Vgl. Über Religion, S. 75-76. 라가츠는 하나님 없는 하나님 나라를 믿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무의식적 신앙”,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볼셰비즘을 잘못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라고 부른다(a.a.O., S. 68). 그러나 하나님 나라 없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의식적 신앙”도 언제나 위험하다. 의식적 신앙은 블룸하르트처럼 라가츠에게도 “경건한 무신성”이다(a.a.O., S. 89).
(미주 45) Max Josef Suda, Der atheistische Hintergrund der Offenbarung. Eine Auseinandersetzung mit der Religionskritik von Karl Marx, BThZ 3. 1986, S. 102. Vgl. Arnold Pfeiffer, Einleitung, in: Arnold Pfeiffer (Hrsg.), Religiöse Sozialisten, S. 19.
(미주 46) Über Religion, S. 70. 라가츠는 러시아의 무신론 운동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종교에 대한 투쟁으로 인식한다.
(미주 47) 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S. 239.
(미주 48) Über Religion, S. 103.

류장현 교수(한신대 신학부/조직신학)  jena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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