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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체험, 다양한 그릇구약성서에 대한 문학적 이해 2
이정훈 | 승인 2018.10.07 21:55

영국의 문학가 루이스(C. S. Lewis)는 인간을 두 발은 땅에 붙이고 두 손은 하늘로 지켜 올려 별을 잡으려고 애쓰는 이중적인 수륙양서(水陸兩捿: amphibian)적인 동물이라고 했다. 루이스의 이 말은 인간의 일부는 지상의 육체에 속해 있으면서도 구름 넘어 피안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이상을 버리지 못하고, 캄캄한 밤하늘에 반짝 빛났다가 사라지는 혜성 같은 영적 세계에 대한 매력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는 뜻이다.

구약성서 문학이 담고 있는 것들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의 체험과 표현을 통해 영원한 진리에 대한 계시를 보여주었고, 후대인들로 하여금 보다 깊고 넓은 삶의 신비를 찾도록 암시해 주었다. 세계문학의 걸작들은 그 같은 체험과 정신을 담아 놓은 것이다. 이 같은 작품들은 오는 세대로 하여금 인류 공동의 기본 감정인 희로애락(喜怒哀樂)에 공감을 느끼게 하며 삶의 의미를 다시금 찾아보는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이것은 비록 개인뿐 아니라 한 민족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 민족은 그들 특유의 체험으로 온 인류에게 정신적 유산을 남겨 놓은 것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 같은 문학작품의 결정체를 발견할 수 있다. 성서는 인간 감정의 감수성, 인간의 의식과 상상에 큰 자국을 남겨 놓았다. 성서는 서양 세계에 서사시, 서정시, 풍자시, 비극, 희극, 웅변 등 각종 문학작품의 주제와 영감을 제공해 왔다. 그리고 많은 작품에 이미지(Image)와 연상(聯想)을 제공하고, 또 성서의 운율과 시형은 많은 시에 영향을 끼쳐왔다. 왜냐하면 성서는 여러 저자가 여러 세기에 걸쳐 여러 주제와 형태로 체험한 이야기를 엮어 놓은 하나의 종합 전집이기 때문이다.

구약성서가 묘사하는 인물들은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신실한 자와 악덕한 자, 인심이 후한 자와 인색한 자, 실의(失意)에 빠진 자와 희망에 부풀어 오른 자, 가련한 자와 마음에 여유가 있는 자, 잘못을 저지른 자와 죄가 없는 자, 꾀 많은 사기꾼들과 그 같은 꾀에 속아 넘어가는 자, 슬픔에 빠진 자와 피로한 자, 열의에 찬 젊은이와 늙은이, 어쩔 줄 모르는 처녀들, 사랑에 도취된 젊은 남녀, 우정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거는 친구, 버릇없는 어린아이들과 자신의 주인에게 담대히 조언을 하는 소녀 등이다.

다양한 체험, 다양한 장르

그리고 구약성서에는 인간 체험이 다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없다. 하나님, 자연, 사랑, 대인관계, 죽음, 악, 구원, 심판, 가족 간의 용서 등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런데 구약성서가 보여주는 인간의 체험은 역설적이다. 신의 주권과 인간의 반항, 정의와 사랑, 법률과 자유, 인간의 왜소와 장엄, 개인과 사회, 하늘과 땅 등 이 같은 인간 체험은 역설과 대조 가운데 하나님과 인간 간의 양극을 보여준다.

▲ 구스타프 도레, “삼손의 죽음” ⓒGetty Image

구약성서는 이 모든 다양한 인간 체험을 여러 가지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해와 달은 어떻게 생겼으며, 남자는 왜 땀을 흘려 농사를 지어야 하며, 여자는 왜 해산의 고통을 치러야 하는가 등의 고대인의 의문에 답을 주고 있는 창조신화와 그리고 오아시스와 초원을 따라 가족을 이끌어 유랑하는 목동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을 세워가며 조상의 비담을 주고받는 족장설화가 있고, 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즉흥적으로 노래한 라멕의 “칼의 노래”, 미리암의 “바다의 노래”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발라드(ballad)를 방불케 하는 “드보라의 노래” 등 히브리 초기 민요도 실려 있다.

또한 이솝의 우화 못지않은 삼손의 수수께끼와 요담의 우화는 정치적인 풍자이기도 하고, 자신의 딸을 희생시켜야만 했던 입다의 이야기는 오랜 동안 외적의 침입으로 시달린 히브리 민족의 영웅설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희랍의 헤로도토스보다도 500년이나 앞선 다윗 왕조 궁중 역사는 다윗과 밧세바의 비밀스러운 사랑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조잡하고도 추한 집안 이야기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그와 비슷한 아합과 이세벨의 비참함 최후도 가리지 않고 그려져 있다. 그밖에 한 폭의 전원적인 그림을 보는 듯한 낭만적인 풍치로 펼쳐진 룻의 사랑 이야기와 음모와 간계와 권력으로 뒤범벅이 된 에스더의 소설도 읽을 수 있다.

그 외에 다윗의 인물됨을 그린 전기와 예레미야의 활동을 서술한 바룩의 전기 등도 있다. 또한 Omar Khayyam(오마르 카이얌)(미주 1)과 같이 세상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한 날의 괴로움은 그것으로 족하고 더 이상 인생 고통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전도서가 있는가 하면,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정반대의 결론에 이른 욥기도 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것을 가르친 젊은이의 인생 안내서라고 볼 수 있는 각종 격언과 금언을 수록한 지혜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 무엇보다도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각종 시들이다. 초기 민요뿐 아니라 담대한 여남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 조국의 멸망을 슬픔으로 노래한 애가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역설한 각종 신탁(神託) 그리고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울리는 가락인 시편이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 전체를 다 하나의 동일한 문학 장르로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의 모든 책이 다 동등한 문학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법률문서나 신학적 논설 같은 것 등도 있다. 그리고 욥기 같은 책은 단지 어느 하나의 문학 장르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서에 들어 있는 본문들에 대해 문학 장르로 규정하는 작업은 인위적일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 몇 가지로 추려 본다면 신화, 설화, 민요, 비극, 욥기, 히브리 시, 서정시, 단편, 에세이, 전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전기와 연설문 등도 삽입되어 있다.

이렇게 인위적이라고 할지라도 구약성서의 본문들을 문학 장르로 구분해 보는 것은 그에 따라 읽고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신화나 설화, 비극을 읽는데 시를 읽듯이 읽고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뜻이다. 신화나 설화, 비극 등은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읽어야 하고, 시는 암송하기도 하고 운율을 생각하면서 읽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주 1) 1048년 5월18일 페르시아(오늘날의 이란)에서 태어난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그리고 슐탄의 명령으로 꽤 정밀한 달력을 제작한 천문학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만든 달력은 16세기경에 나온 그레고리 달력보다 더 정확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3차 방정식의 기하학적 해결을 연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서구 유럽에서 그는 시집 『Rubaiyat of Omar Khayyam』으로 인해 시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카이얌의 이 시집은 19세기 영국의 무명 시인이었던 Edward FitzGerald(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중년에 재미 삼아 페르시아어를 익혀, 우연히 카이얌의 시를 읽은 뒤 75편을 번역해 소책자로 발간한 것이었다(1859년). 이 시집으로 카이얌은 서구 유럽에 시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시집이 윌리엄 모리스, 존 러스킨 등 당대 영국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을 매료시켰고, 급기야 유럽과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이다. 그의 시를 몇 편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오마르 카이얌/에드워드 피츠제럴드, 『루바이야트』, 이상옥 옮김[서울: 민음사, 1975])
“보라, 허물어진 세월의 여인숙에/ 밤과 낮이 엇갈리며 출입하누나/ 대대로 내려오는 술탄의 영화 또한/ 숙명의 시간이 다하는 날 사라지리”(17편)
“사랑하는 이여, 어서 이 잔을 채워/ 지난 회한과 내일의 두려움을 씻게 해다오/ 닥쳐올 날이야 무슨 소용 있으리/ 내일이면 이 몸도 칠천 년 세월 속에 잊혀질 것을”(21편)
“아, 이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쓰자꾸나/ 우리 모두 언젠가는 한 줌 흙이 되어질 몸/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 쉬니/ 거긴 술도 노래도 없이 한없이 넓은 곳”(24편)
“오늘만을 위해 사는 이 있고/ 내일을 지켜보는 사람 있지만/ 암흑의 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바보여, 그대의 보답은 어디에도 없으리”(25편)
특히 카이얌의 시 21편과 24편은 언급한 바와 같이 마치 전도서를 읽는 듯한 착각을 주기도 한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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