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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여전히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일에 힘쓰고자 하는가?북경 세계철학자대회를 다녀와서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 승인 2018.10.09 17:52
이 글은 원래 <새가정> 2018년 10월 호 특집주제를 위해서 쓴 글인데, 그곳에서 원래의 글이 임의대로 수정/첨삭되어서 본인의 의도가 왜곡되고 잘 드러나지 않아 원래의 글에 부제를 더 넣어서 에큐메니안에 싣습니다.(이은선 명예교수 주)

얼마 전 다녀온 북경 세계철학자대회의 표제어가 ‘학이성인’(學以成人)이었다, 즉 ‘공부와 배움을 통해 참사람이 되자’는 것이고, 그 일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지에 대해 여러 차원에서 살피는 것이 이번 대회의 주제였다. 이 표제어에는 동아시아의 오랜 유교 전통이 잘 나타나 있다. 유교는 세간적(世間的, secular) 영성으로서 우리의 지적 탐구와 세상에서의 모든 인간적인 노력, 즉 정치와 교육, 경제와 문화 등의 일을 통해서 인간과 우리 공동체적 삶의 궁극적인 의미(萬物一體)를 실현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유교 또는 유학을 ‘세속종교’(secular religion)라고도 한다.

유교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대화가로서 오늘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는 많은 퇴행들을 보면서 이러한 유교의 가르침으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교회가 신앙과 성령의 이름으로 철저히 반지성으로 돌아서는 현실에서 공부와 탐구(學)를 중시하고, 성찰(理)을 귀하게 여기는 예전의 유교 전통이 소중히 보였다. 또한 교회 안과 밖을 점점 더 세차게 이분하는 한국 교회의 보수성과 분리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 보다 더 보편적인 인간적 언어로 세계를 포괄하고 성속의 구분을 완화하는 유교적 언어가 줄 것이 많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이번 북경 여행에서 그러한 동아시아의 유교 전통이 중국 사회주의 공산당의 국가주의에 의해서 철저히 자신들 개별 국가의 것으로 만들어지는 위험을 보면서 과연 그렇게 세속적 학(學)의 차원에 머무르기 쉬운 유교가 참된 인간의 성숙과 바람직한 공동체성을 위해서 얼마나 역할 할 수 있을까를 묻고 싶어졌다.

이렇게 유교와 기독교의 현황을 모두 살펴보면 결국 오늘 우리가 어떤 교회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는지가 드러난다. 한국 사회가 왜 그 안에 이미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리 잡은 기독교 교회 공동체를 내치지 말고 소중하게 가꾸어나가야 하는지,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성도들을 밖으로 내모는 형국이어서는 안 되고, 아주 달라진 모습으로 그리고 그 달라짐을 위해서 자신을 더욱 세상과 시대를 향해서 열고, 이웃 종교의 실행들로부터 함께 배우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달라짐의 핵심을 나는 한 마디로 ‘지성’과 ‘인성’, ‘영성’의 세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공동체로의 성숙으로 밝히고자 한다.

▲ 북경 세계철학자대회 ⓒhttps://kknews.cc/news/z5yrb2l.html

그런데 사실 유교 전통도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信)을 불러일으키고, 거기에 더해서 그 믿음으로부터 행위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을 따르게 하려면 인간 의식의 세 차원이 모두 포괄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즉 ‘지(知)가 미친다 하여도 그것을 인(仁)으로 지킬 수 없으면 반드시 잃고 말 것이며, 인(仁)이 지켜지더라도 마침내 그것을 예(禮)로 하지 않으면 잘한 일이 아니다’, ‘높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라고 그의 <논어>나 <중용> 등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참된 믿음에 이르고 그 믿음을 온몸과 마음으로 따르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성이 그것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어야 하고(知), 또한 그 믿음의 내용이 따뜻한 인간적인 언어와 관계 맺음 속에서 나누어지고 서로 공유되어야 하며(仁), 그러나 마침내 그러한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 우리로 하여금 경외와 경건을 불러일으키는 거룩(聖/靈)으로 체험되며 그것을 규칙적으로 몸으로 수행하고 예배로 드리는 가르침으로 화하게 하지 않는다면(禮) 그 믿음과 그것을 나누는 공동체의 삶은 지속될 수 없다는 메시지라고 하겠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우선 한국 교회 내에서의 지성은 거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신앙적 질문과 의심을 거의 허용하지 않고, 허용한다 하더라도 이미 오래 전 매우 다른 처지와 상황에서 세워진 교리와 도그마에 문자주의적으로 집착하면서 그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새로운 성찰과 토론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국 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그들이 교회 밖으로 잠깐만 걸어 나가도 그렇게 중시되는 지성과 지적 물음이 어떻게 서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이 오래 되고,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서 그러한 지적 부정직이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면 그들을 그 교회 공동체를 떠난다. 오늘 한국 교회에서 젊을 세대의 부재가 이러한 연유와 많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한 믿음과 신앙 공동체가 지속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거기서 나누어지는 믿음과 신념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성찰되고 토의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지적 성찰과 더불어 그 신념들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생활에서 인간적인 관계를 통해서 나누어지고 공유되며 실천되는 일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또한 지속될 수 없다. 오늘 한국 교회는 오랜 동안 대형화와 외적 성장에 몰두하면서 그와 같은 긴밀한 인간적인 관계성을 크게 잃었다. 그래서 교회의 공동체성은 거의 외형적인 일에 그치게 되었고, 한국 사회에서 교회 수는 수없이 늘어났지만 오늘날 급속도로 공동체성이 해체되고 사람들의 삶이 점점 더 개인화되고 개별화되어서 나타나는 비인간화에 한국 교회가 그렇게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교회조차도 과도한 성장주의에 사로잡혀서 교회 공동체의 일이 또 하나의 노동이 되어버려 가족의 삶을 파괴하고 경제적으로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정황을 견디지 못하고 그 교회 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 교회 공동체가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더 어려운 처지로 내모는 것이다.

교회의 신앙 공동체는 그러나 여기에 더해서 ‘더 높은 것’(聖/靈)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신앙과 영성의 공동체는 인간 사회가 지금 여기에서 감각과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기준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을 지시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점점 더 말라가고 식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보통 상식과 법의 차원에서 내려지는 판단보다 훨씬 더 너머의 정의와 용서,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 우리가 성령과 영의 인도라고 이름하는 우리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 소중히 여겨지고 경청되는 곳, 구성원들의 마음과 판단이 전혀 ‘낯선 것’에 대해서 세상 어느 곳에서보다도 크게 열려져 있고, 그러한 더 높은 것, 더 낯선 것에 대한 열려짐의 인식과 태도가 구성원들의 각자의 삶과 몸에 구체적으로 체화되도록 좋은 리츄얼과 예배가 반복적으로 드려지는 곳, 그런 곳이 진정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그 교회는 ‘작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한국 교회의 대형화는 그 체제의 보수유지와 자신들만의 성장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걸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의 영적 교만에 빠져서 시대와 변화에 담을 쌓고, 이웃와 뭇생명이 당하는 불의와 고통을 외면하며 속으로는 철저히 세속화되고 물질화되어 있는 모습으로는 오늘의 위기를 넘을 수 없다. 나는 예수가 당시 참으로 영적이면서(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실 정도로) 동시에 진정으로 이세상에 대한 염려와 사랑으로 유대교회 공동체를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일갈했던 언어가 바로 그렇게 이세상과 저세상, 지성과 인성, 영성을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서 여러 모양으로 나누면서 온갖 이익을 취하는 이들에게 향한 분노였다고 이해한다. 그들의 영적 교만과 분파/분리주의는 참된 신앙과 믿음, 영성이 견지해야 하는 이 두 가지 또는 세 가지의 영역을 항상 같이 모으려는 신앙적 동시성의 긴장과 고통, 비의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 북경 세계철학자대회에 참가한 필자 ⓒ이은선 교수 페이스북

한국의 새로운 에큐메니칼 운동인 <생명평화마당>의 ‘작은교회’ 운동은 그에 대한 저항과 새로워짐을 향한 모색이다. 2013년부터 ‘탈성장, 탈성직, 탈성별’의 모토 아래서 여러 가지 의미의 ‘작은교회’ 운동을 펼치면서 ‘작은교회 한마당’을 열어왔다. 오늘 한국적 상황에서 시도되고 있는 여러 형태의 작은교회 운동의 공동체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서로의 존재를 알게 하며 연대하게 하고, 또 수많은 가나안성도들에게 대안의 교회 공동체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작년 종교개혁 5백주년을 맞이해서는 그동안의 실행들 속에서 여러 차원에서 행해진 탐색과 성찰들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한국적 작은교회론』이 그것이다.(미주 1)

여기에 소개된 작은 교회들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여러 가지 모습들을 선취해서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자본주의적 성장중심주의를 넘어서고 견고한 성직자중심주의의 틀을 깨고 구성원 각자가 평등하게 역할과 직분을 나누는 평화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지, 또한 오늘의 동성애 문제나 미투 운동과 더불은 시대의 변화에 교회가 어떻게 변화해 갈 수 있는지, 새로운 기후 생태 환경 등의 변화와 이주민 등의 낯선 것들의 등장에 대해서 작은교회들이 어떤 유연함과 긴밀성을 보이며 세상의 판단과 처리와는 다른 영적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지를 모색한 내용들이다.

인간은 그 한문의 ‘人’이라는 글자도 잘 표현해 주듯이 혼자서는 인간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부인하려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나는 ‘누군가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것이고, 내가 오늘의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인간이 되기까지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나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 거기에는 우리의 부모와 가족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다수의 존재들, 공동체, 우리가 물질과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 더 큰 언어로는 우주나 아니면 그리스도, 하나님이라는 타자의 상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개별성과 독자성만을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그 순간부터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오늘 이런 상황에서 점점 더 드물어지고 해체되어가는 각종 공동체들을 볼 때 한국 사회가 그동안 일구어온 교회 공동체는 그 어떤 문제에도 불구하고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우기는 어려워도 버리고 해체하기는 순식간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오늘 한국 교회의 변화와 새로워짐을 위해서 우리의 건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회복과 지속을 위해서 힘을 모아야 한다.

미주

(미주 1) 생명평화마당, 『한국적 작은교회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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