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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변혁운동으로서의 기독교 사회주의칼 카우츠키, 『새로운 사회주의의 선구자들』 - 루터와 뮌쩌를 중심하여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8.10.10 19:59

우연히 올 봄 어느 날, 이 책 번역자와 출판사 사장을 함께 만났다. 그 자리에서 818페이지에 달하는 엄청 두꺼운 이 책을 선물 받았다. 이미 이보다 후대에 나온 동저자의 『그리스도교의 기원(1908)』을 읽었기에 이름도 내용도 낯설지 않았다.

유물사관에 근거하여 기독교를 재해석 했고 이어서 유럽 중세 및 종교개혁기의 역사를 같은 시각에서 새롭게 파헤친 책이다. 새로운 사회주의로서 공산주의 기원을 원시 기독교에서 보았고 그로부터 나온 기독교 사회주의의 제 역사적 형태를 마르크스의 생각과 연결 지워 썼다. 유럽의 기독교적 중세 및 토마스 뮌쩌와 재세례파들이 새로운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 차원에서 본 책의 핵심 내용이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이렇듯 원시 기독교를 비롯한 유럽 역사 전체를 마르크스적 시각과 통합시킨 카우츠키는 사회주의의 이론적 완성자라 불리기도 한다. 『새로운 사회주의자들』은 본래 4권으로 기획된 것인바, 818쪽의 본 책은 첫 권의 1부에 해당한다. 조만간 2부에 해당되는 프랑스 대혁명 까지를 다룬 『토마스 모어와 프랑스 대혁명』이 출간된다 하니 그 방대한 계획에 새삼 놀란다. 이하 2-4권은 독일 안팎에서 발생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핵심주제로 삼았으나 기획한대로 모든 책들이 출판되지는 못했다.

그의 저서들은 카우츠키의 삶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평생을 오스트리아, 스위스 그리고 독일 등지에서 사회주의자로 활동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만나 교감하며 이들 사상 보급을 위해 살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한 탓에 소련의 독재 및 히틀러의 전체주의에 맞서다가 낯선 외지(암스테르담)에서 사망하였다.

1.

필자가 본 책을 공들여 읽은 이유를 먼저 말하겠다. 한 때 필자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차용한 민중신학과 논쟁한 적이 있었다. 철학은 현실을 해석하는 것만이 아니고 바꾸는 것이란 명제와의 씨름이었다. 현실이 사유(신학)을 만든다는 주장을 일리(一理)로 여기면서도 온전히 수용할 수는 없었다. 사유, 상상력이 현실을 바꿀 수도 있다는 믿음 탓이었다. 양자의 가능성을 함께 인정하는 신학의 길을 가고 싶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필자의 무게 중심은 항시 후자에 있었기에 앞선 명제를 충족하게 살피지 못했다. 4년 전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필자는 신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고 현실의 중요성을 몸으로 다시 깨달았다. 마르크스의 명제 앞에 다시 정직하게 서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상상력(사유)의 중요성을 내칠 수 없었음에도 말이다. 현실에 바탕 할수록 새로운 상상력이 솟구칠 것이란 믿음이 생겼고 그 원형을 예수의 하느님 나라라 여겼던 탓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종종 ‘체제 밖 사유’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학 서적들 속에 난무하는 뭇 언어들은 목하 현실과는 동떨어진 관념의 유희로 보였다. 종교개혁 500년을 맞으며 루터의 세 개의 ‘오직’(sola) 교리와 대결-메타 크리틱-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현실이 달라지면 언어도 달라지는 것이 순리이고 그것을 신학의 본성이라 여긴 것이다. 카우츠키의 책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 오히려 현실 억압적이었음을 적시했다. 신앙의 이름하에 현실, 더욱이 민중의 현실을 외면했고 탄압한 역사를 적시한 것이다. 그렇기에 개념적 신학언어를 절대화하며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로 여겼던 누(累)를 여기서 그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본 책 역자도 밝혔듯이 당대의 물적 토대와 무관했고, 의도적으로 그를 무시한 신학담론을 철저히 의심해야만 했다. 따라서 경제적, 과학적 토대 나아가 당대 예술과의 연계 없는 신학언어(교리)의 무용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본 책을 읽게 만든 내적 동기였다.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일지라도 그것이 당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 시달린 생산계층들의 저항을 담을 수 없었다면 그를 내쳐야 마땅하다.

이런 연유로 본 책의 내용 중 종교개혁자 루터와 농민전쟁을 이끈 뮌쩌의 대립각에 주목하게 되었다. 평가가 엇갈리겠으나 누가 진정 신학자인가를 다시 묻고자 한 것이다. 방대한 내용을 이렇듯 약술하기에 놓치는 부분이 많겠으나 이해를 구하며 유물론적 시각으로 바라본 유럽 기독교 속의 사회주의 역사를 일견 해 보았다. 이 과정에서 뮌쩌와의 연계 속에서 재세례파에 대한 저자의 시각도 배울 수 있었다.

2.

저자 카우츠키에게 있어 새로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를 일컫는다. 원시 기독교를 공산주의라 보며 중세의 수도원 운동과 여러 조합운동들 역시 그에 기초한 공산주의 종파로 보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비연속적인 연속선상에 위치한다. 원시 공산주의인 기독교와 중세 공산주의 제 종파는 생산수단을 공유, 중시하는 근대적 -마르크스적- 차원과 달리 분배에 역점을 둔 소비 공동체적 성격을 지녔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시 기독교와 중세 수도원 그리고 세속적 조합운동을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연계시킨 저자의 유물론적 역사관으로부터 배움이 컸다. 원시 기독교가 공산주의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다. 공유하여 필요에 따라 나누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고 그를 하느님 나라의 실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 수도원 운동과 조합형성을 공산주의적 시각으로 본 것은 새롭지만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가 볼 생각이다. 이를 위해 카우츠키는 중세로부터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는 수공업의 발전과정, 그 과정 속에서 생겨난 조합 및 직인(職人)제도 그리고 임금 노동자를 탄생시킨 자본과 노동의 분리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중세 수도원들 역시 이런 바탕에서 기독교 전통을 해석한 결과라 본 것이다. 금욕주의와 신비적 에토스 그리고 혁명정신이 더해진 역사적 실체로서 수도원이 공산주의의 일반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본 책은 근대의 종교개혁이 가톨릭교회의 외형적 부패만이 아니라 중세적 빈부갈등의 차원에 뿌리 두었음을 힘써 보여주었다. 면죄부로 대표되는 가톨릭교회의 타락이란 실상 당대 경제적 모순구조의 반영이란 것이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런 모순을 신학적으로 은폐시켰다. 최종적으로 군주들 편에 섰던 탓이다. 반면 저자는 그를 비판한 토마스 뮌쩌를 사회 개혁운동을 이끈 공산주의자로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원시 기독교 공산주의의 발전된 형식으로서 말이다.

3.

말했듯 본 책은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는 수공업의 발전 과정과 그에 따른 임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조직체계들을 상세하게 서술했다. 종교개혁을 논함에 있어 하부구조의 역할을 강조할 목적에서였다. 그로써 중세 수도원 운동, 뮌쩌의 농민혁명 그리고 이어지는 재세례파 사조들을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의 기독교적 선구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주지하듯이 노예들의 몫이었던 수공업이 자유로운 도시 수공업 시장체제로 바뀌면서 조합이 생겨났다. 영주들과 귀족들로부터 자신들 권익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조합은 매 직종마다 마이스터(匠人)와 직인(職人) 그리고 도제(徒弟)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중세가 깊어지면서 마이스터 되는 길이 점차 어려워지고 그가 자본을 겸하면서 직인들과의 갈등이 불거졌다. 노동의 대가에 대한 착취가 생겨난 것이다. 영주들의 지원 하에 직인들에 대한 억압도 시작되었다. 이런 조합에 저항하며 직인들 역시 단체를 조직했던 바, 교회와 주점이 그 초창기 형태였다. 이곳이 직인들 이익을 위해 그들만의 모임장소가 된 것이다.

조합과 국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도시적 생산양식을 담지 한 직인조직은 유지, 존속되었다. 오히려 이들 임금 노동자들에게 도시는 의존될 수밖에 없었다. 직인들 가운데서 마이스터에 버금가는 노동자 귀족층도 생겨났다. 그럴수록 곤궁에 빠진 노동자들 수도 많아졌고 결과적으로 갈등과 대립의 사회로 전락했다. 중세 후반에 광산업이 발달 하면서 노동자 귀족층을 대신한 영주가 부를 독점하게 되었다.

여기서 수공업을 능가하는 자본주의적 대기업이 생겨났다. 희귀한 광물에 대한 욕망이 기술을 발전시켰고 더 많은 생산물을 대량으로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 과정에서 임금 착취로 인한 광산 노동자들의 희생이 커져만 갔다. 루터 시기의 농민봉기에 앞서 광부들의 봉기가 수차례 있기도 했다.

이어 유럽 중세는 직조업을 발달시켰다. 이것이 유럽 국가들의 핵심 수출 산업이 되었다. 초기 수도원이 이런 산업을 주도했었다. 하지만 광업 이상으로 큰 기술을 요했던 직조 업은 분업을 통해 규모를 키웠고 자본주의적 성격을 더해갔다. 마이스터를 비롯한 당대 모두가 자본가가 되려했고 상인으로 활동코자 한 탓이다. 그럴수록 직인들은 착취를 당했으며 카우츠키의 말대로라면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의식을 최초로 소유한 자들이 되었다.

4.

카우츠키는 이런 프롤레타리아 의식이 중세 수도원에서 움을 터 성장했다고 말하였다. 제국적 기독교 체제 속에서 포기된 줄 알았던 원시 기독교 공산주의가 수도원의 형태로 새롭게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정통 교회사(史)가 수도원 운동을 신비적 은둔 및 금욕적 성향으로 본 것을 유물사관으로 뒤집어 읽은 결과다. 기독교 수도원들이 중세기에 빠르게 증가했다. 사적 소유를 부정했고 개별 혼(婚)을 허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공동생활(살림)을 시도한 것이다.

카우츠키는 이런 수도원 생활을 종교적 옷을 걸친 사회개혁 운동이라 보았다. 말했듯이 수도원의 생산조합은 직조 업을 융성, 발전시킬 만큼 대단히 우수했다. 하지만 수도원 역시 생산조합에서 착취자 조합으로 변질되어갔다. 타자의 노동으로 수도원 경영이 이뤄진 탓이다. 이는 수도원에 부(富)가 쌓이기 시작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동시에 금욕을 강조하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을 창시하려는 노력도 함께 생겨났다. 프란체스코 탁발 수도회가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이들은 수도회가 착취적 집단이 되는 것에 사력을 다해 저항하였다. 당시 교황청도 이런 수도회 창설을 은근히 즐겼다. 부유한 성직자들의 탐욕을 이들이 보완, 만회해 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엄청난 부가 쌓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이들이 청빈을 내건 이 수도회에 재산을 희사했던 결과였다. 하느님도 모를 만큼 엄청난 재산 공동체가 되고 말았다. 요아킴 휘오레가 성령의 시대를 말하며 사유재산의 전적 포기를 전제한 수도회를 재창시한 것도 동 시대의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중세 교회는 가장 부유한 집단이 되었다. 오늘 우리가 증권시장의 지배하에 있듯이 당시는 모든 면에서 교회와 교황의 지배하에 놓였었다. 중세기의 빈부대립이 심각했으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사회 전체에 위협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는 궁핍이 미덕으로 여겨진 때였다. 구걸 역시 어엿한 권리로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부한 교회를 향한 투쟁이 점차 싹트고 있었다. 원시 기독교의 가르침이 다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적 지배권을 지닌 당대 교회가 자발적 가난을 말한 원시 기독교를 왜곡한 결과였다. 이런 가난과 금욕적 에토스에 신비주의가 더해졌다. 새 미래를 향한 묵시적 환상이 작용한 것이다. 시대적으론 후대이나 뮌쩌의 천년 왕국설 역시 이런 바탕에서 생겨났다.

“믿음이 임하면 육신을 지닌 땅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사람 되심에 의해 신이 되고 그래서 그와 함께 하느님 제자가 되고 하느님 자신에 의해 가르침 받으며 신으로 떠받들어 지는 일이 진행된다...”

원시 기독교 공산주의에 행위가 부족했다면 중세는 일층 혁명성을 담보했다. 그래서 전쟁도 불사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지에서 여러 형태의 봉기들이 항존 했었다. 14세기에 이미 독일을 앞질러 이탈리아, 체코 등지에서 농민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공산주의적 사회개혁 운동을 통해 교회 분열이 된 곳도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신학 및 교회사에서 배우지 못했던 종교개혁의 전사(前史)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 조금 깊이 들어가면 가톨릭 신학 안에서의 보편과 개체 논쟁, 혹은 프란시스 교단과 도미니칸 간의 신학 논쟁 차원에서 종교개혁의 발단과 원인을 배웠으나 카우츠키는 이를 유물사관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재조명했다. 원시 공산주의에 대한 열망이 교황청을 향한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을 야기했고 그것이 종교개혁의 밑거름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자 루터는 이 열망을 거부했고 뮌쩌는 이를 완성시키려 했다는 것이 이어지는 본 책의 내용이다.

5.

▲ 독일 뮐하우젠에 있는 토마스 뮌쩌의 동상 ⓒWikipedia

카우츠키는 종교개혁이 지금껏 신학적 관찰 방식에 한정되어 소비된 것을 질타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난 한국교회도 루터 르네상스를 말할 뿐 미완의 과제로 남겨진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토론하지 않았다. 신학적 지식에 의존한 루터 이해는 비역사적이며 결코 온전치 못하다. 오히려 기성체제가 된 종교개혁은 중세의 새로운 사회개혁 열망을 사장시킨 몰역사적으로 역할 했기 때문이다. 새 세상을 꿈꿨던 당대 재세례파들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무자비한 강경책들이 이를 반증한다.

15세기 독일은 상대적으로 여타 민족보다 로마 교황청 의존도가 높았다. 민족의식을 충분히 발현시키지 못한 탓도 있겠으나 광업을 발달시킨 독일의 부(富)를 로마가 주도면밀하게 탐했던 까닭이다. 당시 독일 성직자들은 독일 아닌 여타 민족들의 차지가 되었다. 교회 직위는 돈 많이 내는 사람들에게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성직매매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이들 성직자들은 독일 민중을 찬탈했고 많은 돈들을 로마로 보냈다. 이로 인해 부유했던 독일은 점차 가난해졌으며 독립과 저항정신을 키울 수 있었다. 물론 인쇄술의 발달과 교통수단의 획기적 개선 등의 이유가 더해졌겠으나 독일 종교개혁은 바로 이런 토양에서 시작되었다. 루터 역시 독일민족과 교황청간의 대립에 터해 자신의 입지를 세웠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이자 그 도시의 주임 신부였던 루터는 자신을 향한 교황의 칙서를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기독교 귀족들이 루터를 감싸 보호했던 결과였다. 이런 루터를 향해 뮌쩌는 조롱했다. ‘독일 귀족들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들 입에 꿀을 먹여준 대가’라 한 것이다. 실제로 루터는 자신의 보호자인 작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의 열망을 도외시 한 채로, 다소 굴곡은 있었으나 1517년부터 1522년까지의 루터의 언사는 대부분 군주 편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카우츠키는 이런 루터를 승리자 편에 선 기회주의자라고 혹평했다. 봉건 제후들 역시 프롤레타리아의 적, 이들을 착취하는 자란 사실을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탓이다. 뮌쩌는 루터와 함께한 동시대의 설교자였다. 루터가 외면한 직인(職人)들이 바로 뮌쩌의 청중들이었다. 이들 직조공들과 교회간의 소요가 발생했을 때 전자를 편들었다는 이유로 그는 프라하로 추방되기도 하였다.

‘오직 성서’를 말한 루터와 달리 뮌쩌는 요아킴 휘오레를 따라 인간 내면을 일깨우는 성령을 중시했고 그 바탕에서 범신론과 신비주의를 차용하였다. 이교도 인들도 기독교인들보다 나쁘지 않다는 종교적 관용도 선포하였다. ‘모든 민족은 자신의 생각대로 종교를 가질 수 있다’고도 말했다. 루터가 유대인을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소 돼지와 같은 존재로 폄하한 것과 크게 대조된다.

나아가 뮌쩌는 성서에 의거하여 당대 사회의 혁명의 필요를 강변했다. 군주들이 동참하지 않으면 민중들이 그를 밟고 나아갈 것이라 호소할 정도로 말이다. 많은 직인들이 그를 따르자 루터는 뮌쩌를 더욱 불신하였다. 뮌쩌에게 질투의 독침을 쏠 정도로 루터가 광폭해 졌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이다. 하지만 하느님과 부를 함께 섬길 수 없고 명예와 재산은 하느님 앞에서 티끌과 같다고 함으로 뮌쩌는 군주들과 맞섰고 루터를 불편케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교회혁명을 넘어 정치·사회적 혁명이 중요했으며 화급했다.

1517년 이후 이제 뮌쩌는 교황이 아니라 군주를 주적이라 여겼다. 복음은 모호하지 않고 누구도 홀로 슬프지 않고 홀로 배부르지 않는 공산주의로 표현된다는 것이 뮌쩌의 확신이었던 것이다. 루터와 뮌쩌의 이런 갈등이 바로 농민 전쟁을 통해서 명확하게 적시된다.

6.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군주에 대한 독일 민중들의 종속은 더욱 심화되었다. 종교권력 대신 국가권력이 등장한 탓이다. 군주들과 자본가들이 세상의 새 주인들이 되었다. 그럴수록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들에게 지워진 부담이 컸다. 용병으로 차출되어야 했고 관료제를 떠받치는 하부구조로서 기능했기에 말이다. 이렇듯 종교개혁으로부터 하층계급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삶이 더욱 무거워 졌을 뿐이다.

지금껏 신학은 바로 이점을 간과했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발발한 농민전쟁에 의미를 두지 않은 탓이다. 그럴수록 농민들은 자신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되었다. 1525년의 농민 봉기는 그래서 시작되었다. 이를 이끈 뮌쩌의 복음 이해가 당시 정황을 적시한다.

“복음, 그것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상황에 맞게 분배되는 일이다. 군주나, 백작, 영주에게 이를 진지하게 알려주었음에도 행치 않으면 그의 목을 매달아야한다”.

이런 뮌쩌를 루터는 반박했다. 그의 입을 막고자 끝없는 반박문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뮌쩌의 생각은 분명했다. “지상에서 가중 무서운 일은 누구도 궁핍(가난)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것”이라 말하며 위정자들과 각을 세운 것이다. 그렇기에 위정자와 타협하는 루터를 오히려 불경하다 여겼다.

이런 생각이 이후 스위스 등지의 재세례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평등과 자유를 앞세운 재세례파 운동을 뮌쩌와 연계시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들이 유아세례를 거부한 것은 오로지 종교를 국가의 권위로부터 해방시킬 목적에서였다. 종교개혁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재세례파 운동을 오늘날 재평가할 필요가 크다.

하지만 정작 뮌쩌는 무력봉기를 선도했다. 수도원에서 대포도 만들었다. 성서에 칼로 쟁기를 만들라는 말과 쟁기를 칼로 만들라는 말이 동시에 있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무기를 갖고서 하느님의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 神을 위한 고난이라 여길 정도로 말이다. 한마디로 농민전쟁을 주님을 위한 싸움으로 추동한 것이다.

이에 대해 루터는 설령 전쟁으로 군주들을 내칠 수 있겠으나 농민들 역시 영혼의 상처를 입고 지옥에 떨어질 것이기에 칼을 포기하고 군주에 반항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뮌쩌가 말하듯 전쟁으로서의 고난이 아니라 복종하는 것이 십자가 고난이라 설득했던 것이다. 종래의 신학은 이점을 부각시켜 루터의 정당성을 입증코자 하였다.

하지만 루터는 최종적으로 농민을 부정했고 이들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다음 말이 이를 적시한다.

“얼마 전 까지 반란자들을 ‘님’들과 ‘형제’들이라 불렀으나 이제 그들은 단지 때려 죽여야 마땅한 강도, 살인자, 미친개들이다.”

마치 일하는 당나귀가 매를 맞아야 하듯이 민중은 무력으로 통치 받아야 할 존재라고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농민의 폭력을 부정하기 위해 통치 당국의 폭력을 신학적으로 합법화시킨 루터를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중세를 벗고 근대 국가주의 탄생을 위한 신학자로서 일정 부분 좋게 여기는 일도 과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뮌쩌의 다음 말이 거듭 중요하다.

“군주들은 무엇을 합니까? 다스리는 일을 맡았으나 돌보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정의를 말하지 않고, 거리를 깨끗이 하지 않고, 살인과 강도를 막지 않고 범죄자도 불손한 자도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군주 편에 서서 민중을 향한 폭력을 승인한 루터를 향한 항변일 것이다. 이점에서 카우츠키는 루터를 부르주아적 종교개혁자로 보았다. 반면 뮌쩌는 원시 기독교 공산주의와 소통하는 이단적 공산주의자로 평가되었다. 근대 공산주의와도 맥이 통하는 사회개혁 운동가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카우츠키는 지난 세월 뮌쩌에 대한 주류 신학자들의 편견과 왜곡을 바로 잡고자 이 책을 썼다. 예컨대 『새로운 사회주의의 선구자들』에서 저자는 루터의 동역자인 멜랑히톤에 의해 왜곡 날조된 뮌쩌를 상당 부분 교정하였다. 이어지는 재세례파 운동들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들 역시 공산주의의 한 형태로서 달리 읽어 낸 것이다.

이를 다룰 지면이 없어 애석하나 카우츠키가 다룬 재세례파 운동을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기독교를 꿈꿀 수 있다. 우리들 역사 속에 숨겨지고 잊혀진 길들이 이처럼 많다. 가시화된 역사적 형태의 기독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단 내지 비주류로 내쳐진 기독교 역사를 재조명 하는 일이 기독교의 미래이지 살길일 수도 있다. 뮌쩌가 요아킴 피오레의 성령 이해를 근거로 새 세상을 꿈꿨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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