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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서 신촌까지 아주 기쁘고도 신나게 걸어갔다생존본능이 사울 알린스키를 만나다
김정택 | 승인 2018.10.12 20:50

1970년 전태일 사건도 몰랐고, 71년 김대중 씨가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대통령 선거도 기억에 없다. 광주대단지사건도 얼핏 너무들 배고파서 아기를 삶아 먹었더라는 소문들은 것만 기억에 떠오른다. 다른 대학에서는 교련반대로 시끄러웠다는데 감신대에서는 그냥 교련도 하나의 수업이구나 하고 받았을 뿐이다.

▲ 한국 민주화 운동의 큰 어른이셨던 감리교 김동완 목사 ⓒGetty Image

71년이 그토록 우리나라 역사의 격변기라는 것을 나는 체험하지도 못했고 인식하지도 못했다. 다만 김동완 4학년 선배가 학생회장된 것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준 정도다. 그야말로 내 머리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백지임에 틀림없었다.

당시 감신대는 목회자가 되는 신학과만 있었고 한 학년이 50명이었다. 그러니까 다 합치면 200명 정도였다. 남자들은 충정로 남자기숙사에서 모두가 숙식을 해결했다.

한 달이 지나 기숙사비를 낼 날짜가 되면 나는 바빠졌다. 어디서 벌든지 그렇지 않으면 얻어 오든지 해야했다. 그래도 이럭저럭 기숙사비를 마련하여 때로는 늦게 내어 쫓겨날 것 같은 상황도 벌어졌지만 잘 버텨냈다.

1학년은 거의 마쳐가고 또 숙식이 걱정되는 겨울방학이 다가왔다. 감신대 기숙사는 방학이 되면 모두가 다 퇴실해야 한다. 허긴 있게 해도 별로 있을 학생들도 없었다.

서울 친구들은 별로 없었고 대부분 지방에서 왔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또 다시 “어디서 지내지?” 하는 풀기 힘든 숙제가 떨어졌다. 이 때 김동완 선배가 나에게 다가왔다. “한 달간 합숙훈련이 있는데 숙식과 교육이 일체 무료야.” “사울 알렌스키라고 미국의 유명한 조직가의 대중조직론을 학습하는 것인데 아주 도움이 될 거야”라고 한다.

“으음, 사울 알렌스키?, 대중조직론?” 그게 나에게 그때 무슨 관심을 일으킬까? 1달간 숙식이 가능하게 된다는 말만이 나에게 확 들어왔다. 나는 더 생각하지도 않고 “예! 합숙훈련에 참여하겠습니다. 선배님”하고 시원하게 답변하였다.

겨울방학과 함께 합숙훈련은 시작되었다. 처음 모인 장소는 서강대 예수회 회관이었다. 지도교수로는 개신교는 신상길 목사, 가톨릭은 정일우 신부가 기억난다. 훈련생은 가톨릭 신학생들이 3-4명이 되고 개신교 신학생들은 5-6명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분명히 기억나는 개신교 신학생으로는 김동완(감신), 이규상(한신), 김진홍(예장)이다. 하루는 실내에서 훈련하고 일주일은 가톨릭 신학생과 개신교 신학생이 2인조로 편성되어 현장에서 생활하며 훈련받는 방식이었다. 현장은 노동과 빈민으로 나누었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가톨릭 신학생과 함께 김진홍 전도사-당시에 활빈교회에서는 김진홍을 전도사라 불렀다-가 활빈교회를 지어 활동하는 청계천 판자촌에 배치되었다. 활빈교회 집사님 가정의 방 한 칸을 얻어 식사도 같이 하였다. 지금의 내 기억으로는 밥은 먹어본 기억이 없다.

매일 밀가루 수제비만 먹은 기억만 난다. 때로는 수제비 맛을 내기 위해 뚝방길을 거닐며 냉이를 캐서 냉이수제비를 맛있게 해먹은 기억은 아주 선명하게 떠오른다. 더러운 청계천가에 여기저기서 주어 모은 중고자재로 지은 판자집이 즐비한 지역이니 외부인들은 잘 오지도 않는다.

다만 환자들이 많아 봉사심이 훌륭한 의사, 간호원들이 가끔 진료 차 오는데 상주하지는 않았다. 저녁 이후에는 물론 없었고. 대한수도원에서 폐결핵에 걸린 김낙인 친구 엉덩이에 주사를 놓아주면서 터득한 주사 실력이 진가를 발휘했다.

▲ 미국 대중조직운동의 대부 사울 알린스키 ⓒGetty Image

판자촌 환자들에게 나는 그야말로 꼭 필요한 존재였다. 김진홍 전도사도 내가 맘에 들은 모양이다. “나하고 같이 여기서 생활하면서 목회하면 어떻겠느냐?”고 나를 설득한다. 알렌스키 대중조직론을 체득했으면 내가 얼마나 체득했을까? 그렇지만 청계천판자촌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 것은 분명했다.

어느 날 나는 서강대 훈련 장소에 갈 날이 되어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서강대 가는 버스가 도착해서 타려고 하는데 갑자기 어떤 깨달음이 강하게 오면서 나를 멈춰 세웠다.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버스를 타려고 버스표 1장을 꺼냈는데 그 순간 “버스표 1장이면 한 식구 한 끼 수제비 값인데” 하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버스를 탈 수 없었다. 그리고는 연이어서 강력한 결의 같은 것이 나에게 내려졌다. “이제부터 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1학년인데 신학책을 봤으면 얼마나 봤을까? 문득 예수가 떠올랐고 “가난한 자!”와 “예수!”가 겹쳐지는 것이었다. 나는 청계천에서 신촌까지 아주 기쁘고도 신나게 걸어갔다. 걸으면서 찔금찔금 눈물이 나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김정택  kjt94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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