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구약성서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장르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여러 가지 문학 장르를 구체적으로 연구하기에 앞서 몇 가지 성서문학의 특성을 알아보려고 한다. 우선 구약성서의 그 관점 자체가 어디까지나 현세적이라는 점이다.
어느 학자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구약성서는 “shameless, earth-loving book”이다. 여기서 “shameless”(수치를 모르는)란 말은 인간의 간계, 시기, 질투, 음흉, 잔인, 권력 행사, 직권 오용, 성직 모독 등 도덕적, 성적, 그리고 종교적 타락 등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 묘사된 적나라한 인간 고발을 의미한다. 그 한 예로 창세기 기자는 소돔 사람들의 부패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그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소돔 시민의 늙은이 젊은이 할것없이 온통 밀려와 롯의 집을 둘러싸고 롯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오늘 밤에 집에 온 자들이 더이 있으냐? 그 자들과 재미를 좀 보게 끌어내어라.”(창 19:4-5). |
또한 롯은 자기를 찾아온 손님들 대신 “아직도 남자를 모르는” 두 딸을 그 시민들에게 내어 주겠다고 했지만, 끝내 불붙는 듯한 그들의 욕망을 제지시키지는 못했다. 그 후 도성이 멸망 당하기 직전 산으로 도망친 아버지와 두 딸의 이야기를 그 기자는 이같이 묘사한다.
| “그 이튿날 언니가 아우에게 말하였다. 간밤에는 내가 아버지 자리에 들었으니 오늘은 네 차례다. 아버지께 술을 대접하고 자리에 들어라. 같이 아버지의 씨를 받자. 그들은 그날 밤에도 아버지에게 술을 대접하고 이번에는 아우가 아버지 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이 언제 들어왔다가 언제 일어나 나갔는지 통 몰랐다. 이리하여 롯의 두 딸은 아버지의 아기를 가지게 되었다.”(창 19:34-36) |
희랍의 소포클레스는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자기 아내로 맞아(자신도 모르고 한 것이지만) 자식이 생긴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비극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창세기 롯의 이야기에는 아무런 수치심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이 가식 없이 있는 날것 그대로의 인간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또 한편으로 볼 때, 구약의 저자들이 철저하게 “earth-loving”. 즉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있는 이 지상의 삶이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 에스겔서와 다니엘서의 일부를 제외하면 신비주의라는 것도 거의 없고, 또 내세를 위한 준비나 동경보다는 현세적인 삶을 위주로 한다.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는 모습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 “멋지게 잘 사는 것은 하늘 아래서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비록 짧아도 하나님께 의탁 받은 것이니 그렇게 살 일이다. 이것이 인생이 누릴 몫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만 바라시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 말라.”(전 5:18-20) |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비교해 볼 때, 독자들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발견하게 된다. 신약성서는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듯한 젊은이의 의기양양하여 희망에 부풀고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면, 구약성서는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다 보고 인생의 황혼길에서 겨울을 맞이하려는 듯한 늙은이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기에 감각적으로 신약은 밝고 명랑한데 비해 구약은 어둡고 침침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느 학자는 이것을 시적으로 표현하여 신약은 마침 동녘 하늘에서 새벽을 깨고 비치는 첫 햇살과 같다면, 구약은 석양의 마지막 햇살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빛이 붉은 피로 물들여졌다고 본다면, 신약은 신(神)의 피로 물이 들고, 구약은 인간의 피로 물이 든 것은 아닐까 싶다.
한국교회에서 구약이 경원시 되고 신약 일변도로 치중되어 있는 것은 처음부터 선교사들이 불공(佛供)들여 극락세계에 간다고 하는 한국 민족의 내세지향적인 세계관에 근거해,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신약만을 가르쳐 주었고, 우리 역시 자연이 마르키온(Marcion)이나 하르낙(Harnack)과 마찬가지로 구약이 인간 영혼 구원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책으로 간주한 탓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판단에는 앞서 서술한 대로 구약성서가 인간의 피로 물들여진 인간의 책이란 전제가 있다.
그러나 결국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우리는 이제 다시 구약성서로 우리의 눈길을 돌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며 먼 미래가 아닌 지금의 이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역사 속에 활동하시는 순간인 만큼, here and now가 우리의 궁극적인 초점이며 관심이기 때문이다.
성서문학이 일반문학과 다른 점은, 비록 그것이 인간의 책이라고 하더라도, 주인공 인물과 또는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종교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성서문학의 저자들은 인간적인 사건과 자연적인 사건 배후에 있는 신적인 의미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추운 겨울날 햇볕이 비치는 집 따뜻한 놀이터에서 철모르는 어린아이들이 신이 나게 놀다가도 해가 질 무렵 어머니가 부르면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처럼 인간 실존의 배후에 신의 섭리와 실체가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항상 인간 모두의 창조자가 되며, 인간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까뮈(Camus)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맹목적으로 닥쳐와 인간을 괴롭히자만 욥의 고통 배후에는 “그의 몸에만은 손을 대지 말아라”(욥 2:6) 하고 사탄에게 명령하는 신의 보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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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욥과 그의 친구들” in The Bible panorama, or The Holy Scriptures in picture and story(1891) ⓒWikipedia |
에밀 브론테(Emil Bronte)는 “우리 가슴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문구를 썼지만, 결국 우리의 삶은 비록 짧은 인생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생이 영원과 관련이 되었다고 하는 차분한 안도감과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다. 시편 기자는 그것을 이렇게 노래한다.
주여, 당신은 대대손손 우리의 피난처
산들이 생기기 전,
땅과 세상이 태어나기 전,
한 옛날부터 영원히 당신은 하나님
사람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사람아 돌아가라” 하시오니
당신 앞에서는 천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있는 밤과 같사오니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이옵니다
- 시편 90:1-5
성서문학의 또 다른 한 가지 특성은 명확한 가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 문학작품에 선과 악의 투쟁이 반영되기는 하지만 성서문학에는 특히 강하게 선과 악의 구별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성서문학 작가에게는 산과 악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큰 주제로 나타난다. 그러기에 항상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명확하다. 사물의 가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거룩한 하나님과 관련을 맺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은 그 자체보다는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 참 가치가 드러난다. 이것은 결국 선과 악은 세상의 실재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가치관은 대부분 성서문학이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그것은 저자가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대신 대부분 어느 한쪽에 치중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저자가 자기의 작품 속에 가끔 개입하여 여기저기 교훈적인 언급을 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섭리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며 또 사건 자체의 묘사를 교정하기도 했다는 뜻이다. 성서 저자들은 사건이나 인물은 보통 도덕적인 선과 악의 입장에서 판단을 한다. 그러므로 요셉을 “아주 깨끗하고 잘 생긴 사나이”(창 39:7)라고 기술하거나, 또 사울이 엔돌의 여인을 찾아간 것을 비판하는 것 등은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화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또 성서문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엄격한 의미에서 성서문학에는 연극이란 것이 없다. 그러나 많은 성서문학 작품에는 대화를 가장 효과 있게 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성서 이야기에는 서술문으로 사건을 설명하는 대신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욥기는 대화의 연속이며, 어떤 시들은 청중을 상대한 독백 같기도 하다. 대화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이것은 또 원래 성서문학이 구전으로 전승되었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은 자연이 기억에 의존하여 흥미 위주로 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는 희랍의 호메로스, 로마의 단테, 영국의 셰익스피어에 못지않은 세계적인 문학작품이다. 성서의 장엄성, 권위, 보이지 않는 다른 세상에 대한 감격 등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상에서 벌어지는 인간 삶의 변치 않는 기본 감정을 그려놓은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는 신학적인 교리서라기보다는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문학작품으로서 독자들에게 더 매력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서 인물의 체험과 그들의 말은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경외감을 느끼게 해 준다. 이 경외감은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하게 들려온다. 이 경외감은 마치 흘러가는 물 위에 모든 것이 떠내려가듯 변하고 사라져 가는 중에서도, 그 무엇인가 변치 않는 꾸준한 생명의 근원에 독자의 영혼의 닻을 내린 듯한 느낌을 안겨 준다.
물론 구약성서 자체가 우리들에게 내세의 행복을 약속하거나 또는 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장하거나, 또는 경건한 수도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경외감은 독자로 하여금 욥처럼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 던져져도 다시 살아 이 땅 위를 거닐게 하는 생의 집착성을 갖게 해 준다. 전도자의 다음 같은 관점에 공감을 하게 된다.
| “그렇다, 사람이란 산 자들과 지내는 동안 희망이 있다. 그래서 죽은 사자보다 살아 있는 강아지가 낫다고 하는 것이다. 산 사람은 제가 죽는다는 것이라도 알지만 죽고 나면 아무것도 모른다. 다 잊혀진 사람에게 무슨 좋은 것이 돌아오겠는가? 사랑도 미움도 경쟁심도 이미 사라져 버린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어떤 일에도 간섭할 길은 영원한 없어질 것이다.”(전 9:4-6) |
그러므로 구약성서는 우리가 단지 주일학교에서 들려주어야 하는 옛날이야기의 전집도 아니고 주일마다 팔 밑에 끼고 교회에 나가는 예배 의식서는 더더욱 아니다. 구약성서는 인간 생활의 체험을 돕고, 우리로 하여금 보다 깊은 삶의 의미를 찾게 도와주는 안내서이다. 인간의 생활은 언제나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하며 새롭게 전개되기 때문에, 성서는 그떄 그때마다 새롭게 인간의 영혼을 어루만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서를 새롭게 읽어 볼 수 있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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