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하나님, 가짜뉴스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거짓으로 영광을(롬 3:7-8)
이성훈 | 승인 2018.10.14 20:45

얼마 전에 한겨레신문에서 가짜뉴스의 발원지를 찾았다는 기사를 냈습니다. 한겨레에서 찾은 가짜뉴스 발원지는 보수 기독교 단체 중 하나인 ‘에스더 기도 운동’이었습니다. 이 기사와 동시에 가짜뉴스가 퍼져나가는 것으로 보이는 카카오톡 단톡방 서른 한곳에 기자가 가입한 후, 그곳에 올라오는 이야기들을 전부 모아서 사용된 단어의 빈도수를 조사하여 기사를 냈습니다.

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가짜뉴스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하나님’이었습니다. 4만 2천 여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많이 사용된 단어인 ‘미국’이 18,409회인 것을 보았을 때, 4만 번 이상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은 정말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물론 한겨레의 조사가 전부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들이 단톡방에 올라온 내용 전체를 다 꼼꼼히 살펴서 문장 하나하나에 사실과 거짓을 구분 했을리는 없고, 전체적인 빅데이터를 분류했을 것이기 때문에, 개중에는 멀쩡한 글, 혹은 단순한 신앙의 글들도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하는 이야기가 다 거짓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희는 사실을 넘어 진실을 쫓고 믿으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약간의 오해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정치, 사회, 문화적 이유로 너무나 자주 사용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심지어 그 중 많은 이야기들은 거짓을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기반으로 다시 생각해보자면, 기독교인들이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확산하고 있거나 가짜뉴스를 만들고 확산시키는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합리적 의심

어떤 이들이 기독교를 사칭하거나 이용해서 가짜뉴스를 퍼뜨린다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비판하고 경계해야겠지만, 이와 동시에 기독교인 내에서 가짜뉴스가 퍼져나가는 점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찾아보고 이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이유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고, 제 생각이 미처 닿지 않는 지점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동의할 수 있을만한 이유 두 가지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사회에 널리 만연해 있는 ‘아니면 말고’식의 생각들입니다.

사실 예전에는 정말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남을 비방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왔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뒷담화가 사피엔스라는 종을 지금의 위상으로까지 끌어올렸다고 말합니다만, 뒷담화를 넘어 남을 비방하기 위한 거짓말들은 결국 남을 끌어내리고 자신을 위로 올리기 위해서 사용됩니다.

예전에는 그런 거짓말들이 그저 거짓말에 불과했기에 조금만 전후관계를 따져보면 거짓임이 들어났고, 거짓을 말한 사람에게 잘못을 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거짓말 앞에 한 가지 단서를 붙입니다.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지금 하고 있는 거짓말은 자신이 그냥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따져보니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방식입니다.

‘합리적 의심’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합리적 의심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정말 합리적인가를 따져본다면 합리적이지 않을 때가 더 많아 보입니다.

‘합리적 의심’이 붙은 거짓말은 결국 ‘아니면 말고’로 끝납니다. ‘나는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의심을 던졌을 뿐이지, 그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그렇기에 아니면 그만이다.’ 하는 식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런 방식의 거짓말들, 합리적이지 않은 ‘합리적 의심’에 의해서 의심을 받은 사람은 피해를 보지만, 의심을 한 사람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욱 신나서 ‘합리적 의심’을 해댑니다. 누군가 피해를 입는다 할지라도 자신은 피해를 안 입기에, 자신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그저 ‘합리적 의심’을 했을 뿐이기에, 또한 ‘아니면 그만 아니야?’,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면 그만이잖아’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남에게 피해를 주고,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면서도 이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은 거짓말을 ‘거짓말이 아닌 것’으로 포장하기에 기독교인들 역시도 십계명 제9계명 ‘거짓 증언하지 마라’를 어긴다고 생각하지 않고 마구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사회 전반에서는 이런 이유로 거짓이 쉽게 확산되고 있겠지만, 기독교 내에서는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고 봅니다. ‘믿으시면 아멘’이라는 기독교 특유의, 아니,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믿음’을 기반으로 합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나는 기독교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겠어서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근본적으로 믿지 못하면 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Rawpixel

작년에 개봉했던 실화 바탕의 영화 ‘예수는 역사다’에서 주인공인 기자는 예수가 사기임을 밝히기 위해서 모든 자료를 모으다가 결국 그것이 진실임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 자체는 훌륭한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말씀드리고자하는 점은 이 기자가 자료 수집, 바꿔 말해 지식 습득을 먼저 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기독교인이 된 순간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종교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종종 그 믿음을 확인하려 합니다. 믿음을 확인하는 종교의 기능까지는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내가 믿던 안 믿던 그건 사람들 개개인의 선택 문제이고 믿음에 기반하고 있기에 그 믿음을 굳게 하는 일은 종교의 기본 기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개신교의 많은 목사들이 특정한 ‘믿음’을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믿으시면 아멘’하시라고 강요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질문이 얼마나 불합리합니까?

저희가 회의를 할 때면 자주 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가(可)하시면 예 하십시오’라는 말을 씁니다. 동의와 재청 뒤에는 꼭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 ‘예’하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의장은 그 뒤에 반드시 ‘부(否)하시면 아니오 하십시오’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는 경우에는 이 질문이 나오기 전에 이미 의견다툼이 있기 때문에 이 질문까지 가면 보통 ‘예’로 끝납니다. 논쟁이 끝나지 않은 안건은 ‘더 연구해본다’라는 식으로 가기 때문에 결국은 ‘예’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끝까지 ‘아니오’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묻는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회의에서는 반드시 가부(可否)를 묻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목사님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믿으시면 아멘’은 들어봤지만, ‘안 믿으시면 아니오’하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부흥회 같은 때에는 ‘아멘’ 소리가 작다고 더 크게 ‘아멘’하라며 ‘믿음’을 강요합니다. 이는 믿음의 무조건적인 강요이자 강압입니다.

우리의 ‘아멘’은 성경책을 읽은 후에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무조건 ‘아멘’으로 듣기보다는 마음에 곱씹으면서 들어야 합니다. 이상한 점이나 모르겠는 점이 있으면 예배 후라도 목사님께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도 똑같은 사람 아닙니까? 목사님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도 한 사람의 목사로써 말씀을 해석하다가 잘못 해석할 수도 있고,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 또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자신의 생각을, 자신이 가진 사고방식을 그대로 적용해서 성경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때, 무조건 아멘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목사가 한 말이 성경의 이야기가 아닐 경우에, 오히려 성경과 동떨어진 경우에 그것은 분명 성경적으로 ‘거짓’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멘’을 외친 순간, 우리는 그 거짓을 믿는 게 됩니다. 거짓 위에 우리의 믿음을 쌓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우리의 사명으로 인해 ‘그 거짓’을 전파하게 됩니다.

너무 과격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한 가지 예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동성애 문제는 이미 예전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다른 문제를 들자면, 기독교가 ‘공산당은 악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분명 거짓입니다. 문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성경엔 ‘공산당’이 안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술, 담배 문제에서 담배도 성경에 안 나옵니다. 이런 방식은 좀 유아적인 설명이고, 우리는 사회주의의 원형이 사도행전에 나온 초대교회임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교회가 지금 보수 야당이 주장하는 대로 ‘현 정권은 사회주의 체계를 일으키려는 좌파 정권이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이를 잘못이라고 규정하게 된다면,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와 더 나아가 누가복음을 기록한 공동체를 ‘악’이라고 규정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종교인으로써 우리의 경전 내용을 ‘악’이라고 규정하는 이들의 말은 ‘거짓’이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는 교회는 스스로 자신의 경전을, 아니 우리의 경전을 ‘악’이라고 말하는 ‘거짓’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거짓’을 전파하여 자신들의 교회를 높이려 합니다.

사회주의 체계가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사회주의 체계는 국가 시스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전반에서 나타나는 금전적 강박만 보더라도 이 시스템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하는 말과 ‘사회주의는 악이다’, 좀 더 자주 듣는 표현으로 ‘공산당은 악마다’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들은 후자의 말만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거짓이 영광으로

오늘 읽은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저희가 읽은 이 본문의 말씀은 약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이 난해하게 되어 있어서 우리말 보다는 오히려 헬라어 성경이 이해가 편합니다.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에서는 제대로 번역을 했습니다만, 사도 바울의 편지 중에서 ‘그러나’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데(δέ)’는 때로 누군가의 말을 인용할 때 사용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데’의 사용법은 구절에 따라 상당히 논란이 됩니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데’ 앞에 if의 뜻을 가진 ‘에이(εἰ)’가 붙어서 더 확실하게 인용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은 ‘그러나’ 뒤에 나오는 말 모두 바울의 말이 아닌 사람들이 하는 말의 인용입니다. 7절은 ‘내가 거짓말을 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영광에 충만해진다면, 내가 왜 죄인으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8절은 7절보다 더 정확하게 인용이 드러나 있습니다. 7절과 같이 말한 사람들이 ‘선을 위해 악을 행하자’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한다고 비방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5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을 하겠느냐?’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8절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는 이들에게는 ‘마땅한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거짓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지 못합니다. 악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를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사고가 박혀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의 거짓이 있더라도, 약간의 잘못이 있더라도, 복음을 전파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믿게 되면, 교회의 빈자리가 차게 되면, 교회가 성장하게 되면, 우리는 당연히 복을 받으리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전하는 내용에 대해서 의심도 하지 않고 판단도 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거짓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악으로는 선을 쌓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결과를 낳았던지, 정말로 그들의 거짓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했을지라도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믿고 내가 전하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지금과 같이 가짜뉴스를 무조건적으로 퍼나르는 행위는 하지 않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가는 말

가짜뉴스가 한겨레 기사에서 말하듯이 꼭 보수적인 집단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라도 거짓이라는 달콤한 조미료에 혹할 수 있고, 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판단 없이 교회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또 누군가에게 전한다면, 그 역시도 가짜뉴스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거짓 위에 세운 탑은 결국 무너지고 이 탑을 세운 이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탑을 세웠던 간에 결국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그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참된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참된 복음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곳에 거짓이 사라진,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게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