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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사님의 방문”사무치게 그리운 김구철 목사님 이야기
박철 | 승인 2018.10.19 19:26

김구철 목사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리 아버지 박응남(朴應男)권사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본래 황해도 분이셨습니다. 어찌하여 강원도 철원에다 삶의 터를 삼으셔서 거기가 고향 같은 곳이 되셨고, 거기서 지금의 어머니와 혼인까지 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6.25라는 참혹한 전쟁을 치루면서 형제들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서 소식이 두절되었고 막상 결혼을 했지만, 생활기반이 전혀 없으셨던 아버지는 곧바로 경찰에 투신하게 되셨습니다.

어머니를 처음 만나셨을 때에는 강원도 철원 장흥교회를 다니며 성가대도 하시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는데 결혼 후 경찰관이 되신 후부터 신앙과는 전혀 별개의 삶을 사셨습니다. 가장으로서 가정의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무책임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중풍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떻게 하든 살아야겠기에 어머니가 하실 수 있는 일을 찾으셔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눈곱만큼도 집안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집안은 언제나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서 어머니는 인고의 세월을 지내셨습니다. 아버지는 지방근무라는 핑계로 거의 집에 들어오시는 일이 없었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이나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갈 처지였습니다. 매우 가난한 생활이었습니다. 사실 가난이 뭔지도 몰랐지요.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우연히 하얀 밥을 보았는데, 처음 보는 쌀밥이었습니다. 쌀밥을 먹어보지도 못하고 처음 구경할 정도였습니다.

▲ 김구철 목사님과 아버지 박응남 권사 ⓒ박철 목사

그렇게 살다가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시고, 가장이라는 자리로 복귀하셨지만 아버지의 방만한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적응하기가 힘드셨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하시면 영락없이 아버지는 대폿집에 계셨습니다. 대폿집 유리창 너머로 김이 모락모락 나고 구수한 빈대떡 냄새가 주린 배를 자극하고 술집여자들의 헤픈 웃음소리 사이에 아버지는 계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아버지가 모처럼 집에 들어오셨는데 몸이 으슬으슬 춥다고 하시더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우셨습니다. 어머니는 몸살이 걸리신 모양이라고 약방에 달려가서 몸살 약을 사오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몸살 약을 잡수시고는 온 몸에 열꽃이 피고 고열이 되고 견딜 수 없으셨는지 당장 의사를 불러오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화천에서 유일한 의원(원장이 장로였던 것으로 기억함)원장께 왕진을 부탁해 원장과 사무장이 달려왔는데 진찰을 하시더니 우리 보고 “너희들 학교에서 ‘장티푸스’ 예방 주사 맞았냐?”고 하시며 아버지 병명이 한겨울에 ‘장티푸스’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날부터 장티푸스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꼬박 한 달 동안 아버지는 장티푸스 치료를 받으셨는데 무슨 처방을 하고 무슨 약을 썼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버지는 한 달 만에 기사지경(幾死之境), 죽음 직전까지 가셨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약국에서 면허가 있는 약사가 약을 조제한 것이 아니고, 약사가 잠시 외출한 사이 그 부인이 약을 조제했고, 그 약을 잡수신 아버지는 약물 중독에다 장티푸스(그 당시 염병이라고 함) 주사를 한 달 동안 맞았으니 성한 몸인들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는 체력을 완전히 소진하게 되었고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세월이 3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나중에 서울대학병원에서 약물중독과 오진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 많던 친구들도 다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병이 전염된다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인심이 다 그런 것이라며 체념하셨습니다.

다만 어머니가 다니시던 화천제일교회 김구철 목사님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심방을 오셨습니다. 제가 너무 어린 시절이라 잘 기억은 없지만, 김구철 목사님은 심방을 오셔서 “예수 사랑하심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시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약물중독으로 폐인이 되기 직전까지 어머니가 교회엘 다니시는 걸 결사반대하셨는데 당신의 죽음 앞에 김구철 목사님의 돌연한 방문은 아버지로선 큰 충격이었습니다.

김구철 목사님은 고향이 서울이셨고, 독신(獨身)이셨고,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 한쪽이 가늘고 짧아 다리를 심하게 저셨습니다. 그런 장애의 몸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하느님의 소명을 받아 감리교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신 분입니다. 늘 까만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으시고 자그마한 체구지만 목소리가 카랑카랑 하셨습니다. 성품도 활달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늘 자애로운 눈길로 우리 4남매를 측은하게 생각하셨던지 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강퍅하고 철옹성 같았던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김구철 목사님이 심방을 오시면 아버지는 이따금 ‘끙끙’ 신음소리를 낼뿐 인사도 안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눈을 꼭 감고 계셨습니다. 어느날 목사님이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찬송을 나지막이 부르시는데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지켜보던 어머니도 목사님도 같이 우셨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 사남매는 왜 어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병환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피부껍질이 비듬처럼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 새빨간 살갗이 드러나고 어머니가 빗자루 질을 하실 때마다 쓰레받기가 가득 찰 정도로 아버지의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셨습니다. 숨을 거두시기 직전까지의 숱한 고비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김구철 목사님이 아버지 곁에 계셨습니다.

우리 식구들의 유일한 위로와 희망은 김구철 목사님이 저녁 무렵 우리 집을 방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찬송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았습니다. 황해도가 고향인 우리 아버지, 자존심과 오기로 똘똘 뭉친 우리 아버지가 김구철 목사님께 완전히 무장해제를 하시고 목사님 앞에서 눈물을 쏟으시고 회개를 하시는데 온 식구가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어느날 우리 아버지가 김구철 목사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나 같은 죄인도 하느님이 용서해 주실까요? 나 같은 죄인도 회개하면 하느님이 받아 주실까요?”

“문숙이 아버지, 하느님은 그 어떤 죄인도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시는 분이야. 그럼. 하느님은 이미 문숙이 아버지를 용서 하셨어요. 그러니 어떻게 하든 힘내고 병을 이겨야해. 어린 자식들 생각해서라도 병을 이겨야 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매달려봐...”

아버지의 유일한 은신처는 다름 아닌 김구철 목사님 한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유일한 우리집 의 방문객이었습니다. 3년 동안 아버지는 거의 숨이 멎을 상태가 되고, 죽음 직전까지 가신 적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막 우시면서 “철아 교회 가서 목사님 모시고와!” 그러면 나는 내처 달려가 “목사님 우리 아버지 죽을 라고 그래요!” 그러면 목사님은 성경가방을 챙겨 황급하게 나를 따라 오십니다. 어린 내가 막 달리면 목사님은 불편한 다리를 절둑 거리면서 따라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집에 당도하자마자 찬송을 힘차게 부르십니다. 그러면 신기해서 또 숨이 돌아오고 정신이 돌아오곤 하셨습니다.

▲ 김구철 목사님과 어머니 장옥선 권사. 1968년 화천제일교회 구예배당 ⓒ박철 목사

아버지는 그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면서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온 예수님 이야기처럼 철저하게 망가지고 부서져서 하느님께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고통 중에서도 평온의 시간이 찾아오면 김구철 목사님의 은혜를 그 사랑을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냐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소리 없이 찾아오셔서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우리들에게
한없는 위로와 평화의 고운 선물을 한아름 안겨주고
소리 없이 조용히 떠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으셨다는 그 분은
짧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외로운 사슴처럼
찾아오셔서 아버지의 병든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십 월의 맨드라미처럼
보라 빛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으시고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우리들에게
한없는 고요와 평안을 안겨주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가식도 위엄도 없이
병들어 죽어 가는 자의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 분의 방문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 박철, “어느 목사님의 방문”

그렇게 3년 동안 약물 중독과 오진으로 중병을 앓으면서 마지막 아버지의 선택이 당신의 삶의 뿌리가 있는 강원도 철원 장흥교회, 장흥교회에서 세운 철원 대한수도원에 가서 이제 마지막으로 “기도나 실컷 하다가, 살면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겠다.”며 기도의 담판을 짓겠다고 입산을 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철원 대한수도원에 40일 동안 하느님께 매달려 기도를 하시는 동안 집회시간이면 기도원 출입문 신발장 밑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신발장 툇마루에 앉아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도 감사하다.”며 막무가내로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40여일 후에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머리칼이 다시 나고 눈썹이 다시 나고 새빨간 피부에 새살이 돋는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시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셨습니다.

30여 년 전, 김구철 목사님이 서울 동대문 장위동 어느 교회에서인가 목회를 하셨는데 그때까지 독신으로 사셨고, 무슨 암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시는 중에 교우들에게 “내가 마지막 유언이 있으니 집에 가서 안 믿는 남편들을 다 데리고 오라”고 하자 불신 남편들이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 다는데 죽어가는 사람 소원 못 들어 주겠냐” 며 다 목사님 댁에 모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김 목사님이 “여보시오. 내가 마지막으로 부탁하는데 당신들 예수 믿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다 구원받기 바라고, 가정이 다 예수의 가정이 되기 바랍니다. 하느님 잘 믿고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이외다.”고 말씀을 하시고 사흘 후에 부름을 받으셨다는 이야길 인편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김구철 목사님의 자애로운 모습이 이 글을 쓰면서 자꾸 눈에 아른거립니다. 그 분이 우리 아버지에게 우리 가정에 쏟으셨던 크나큰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빚 진자의 심정으로 3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내가 되갚고 하느님 나라 가는 게 바로 나의 몫이기도 합니다. 새삼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김구철 목사님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박철  pakcho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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