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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단순한 지식하나님을 아는 지식(호 4:1-2)
이성훈 | 승인 2018.10.21 21:39

오늘은 말씀은 왠지 무섭고 심각한 심판의 말씀이 담긴 본문입니다. 하지만 특정한 사회 현상이라던가 교회들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우리 신앙의 기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세워보고자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지식이 없음

오늘 저희가 읽은 말씀은 호세아가 선포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을 세 가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절을 보면, 진실,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말합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르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진실은 히브리어 에메트(אֱמֶת)로 ‘진리’를 뜻하고, 인애는 헤세드(חֶסֶד)이고 ‘사랑’을 뜻합니다. 이 두 단어는 사실 너무나 어려운 단어입니다. 추상적인 표현이기도 하며, 하나님께 속해있는 속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지금 생각해보려는 점은 인생 전체를 다 바쳐도 도달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는 경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저 우리 신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또한 호세아는 4장 6절에서 지식에 대해 한 번 더 강조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렇기에 저희가 오늘 생각해보려는 것은 마지막 항목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보고, 정확하게 무엇이 없었기에 그들은 멸망하게 되었는지, 반대로 어떤 지식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는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개역개정 성경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본래는 ‘다아트 엘로힘’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의 지식’이라고 해도 됩니다. 무언가 하나님에 관련된 지식임은 분명합니다.

다아트(דַּעַת)는 말 그대로 지식을 의미합니다. 지식은 쉽게 표현하자면 ‘알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식과 지혜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혜라고 할 때는 우리가 잘 아는 ‘호크마(חָכְמָה)’가 사용됩니다. 그럼 우리가 찾아가야 할 것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입니다. 지혜라고 부를 만큼 익숙하고 깊이 있게 아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알고 있어야 하는 점’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보려고 합니다.

예언서들을 쭉 읽다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정의, 공의와 연결되어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법도, 사람이 지켜야 할 법도를 알지 못했고 지키지 않았기에 멸망에 이른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은 우상숭배 문제와 연결되어서 ‘하나님이 유일신임을 아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임을 알지 못하고 다른 신을 섬겼기에 멸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우리가 한 번 다시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창세기에서부터 쭉 읽어왔습니다. 성경을 읽어 내려오면서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미 봤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 하나님의 법, 율법을 완벽하게, 완전하게 지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간혹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에서 어긋나 있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다윗은 창 넘어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그녀에게 반해 동침하고 임신시키기까지 합니다. 그리고는 임신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계략을 꾸밉니다. 결국에는 그녀의 남편을 전장에서 죽게 만듭니다. 지혜의 왕이라 불리는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갖은 노역을 시켰고, 그 노역의 결과로 화려할 뿐인 성전과 성전보다 더욱 화려한 자신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분명 율법적이지 않은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율법 준수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언서보다 먼저 읽었던 성경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그렇게 알게 된다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일까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바를 가장 쉽게 보여줄 수 있는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

저는 모세가 믿음이 깊은 사람,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 떠나서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율법도 없었으니까 지킬 법도 없었습니다.

그런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우리 성경에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했고, ‘나는 나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나는 존재하는 자이다’, ‘나는 있다’로 번역합니다.

모세와 만난 하나님은 자신을 ‘있는 존재’로 소개하셨습니다. 자신의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보았고, 하나님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울부짖음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그들 옆에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존재’의 확인 다음에 모세가 알게 된 점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사야 7장 14절의 말씀 ‘임마누엘’을 그 순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집트로 돌아갔습니다.

이집트에서 바로 앞에 선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야기를 전했으나 오히려 실패를 경험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재앙을 경험하면서도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쉽게 내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연이은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모세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우시며’ 인도하신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 미국 어느 한 교회에서 열린 찬양집회 ⓒGetty Image

모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율법을 잘 지킨다라던가, 하나님의 뜻에 잘 따른다는 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 그가 흔들림 없이 간직했던 지식은 하나님께서 분명 ‘존재’하시며, 그들 ‘곁에’ 계시고, ‘도우신다’는 점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지식, 앎이 있었고 그랬기에 목이 굳은 바로 앞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조금 설명이 불친절한 느낌도 있습니다만, 친절하게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질 듯 하여서 이정도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길어지면 지루해지니까요.

우리가 가져야 할 지식

어떻게 보면 이는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바꿔써도 이상하지 않아 보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 일.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요 믿음이라고 말해도 괜찮아 보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이는 믿음의 단계로도 보입니다.

하지만 앞서 지식이란 그저 ‘아는 것’ 이상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아트’는 그냥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쓰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런 무거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알고만 있다면, 그곳에는 분명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굳건한 신앙, 뜨거운 믿음, 열정적인 복음 전파의 생활, 이런 게 없더라도 그저 이 세 가지만 알고 계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십니다. 저는 이게 신앙의 근본이며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기초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십계명의 첫 계명을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로 시작한다면, 유대인들은 그 바로 앞 절인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를 십계명의 첫 계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함께하심과 도우심이 담긴 이 문장이 이들의 첫 번째 계명이고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계명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가?

요즘 교회는 점점 교인이 줄어가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점점 교회에서 빠져나갑니다. 이제는 젊은 세대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층 모두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목회하는 친구가 한국에 와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빠져나가는데, 이상하게 극보수나 이단에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북미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신비주의적인 의식들을 교회에서 상당히 많이 가져와서 사용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가 교회가 우리의 삶에 큰 유익을 주지 못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만으로는 젊은이들이 극보수 교회나 이단에 유입되는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이 지금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가 어렵지만, 신비주의나 영성 중심의 보수 교회에서는 뭔가 있어 보이니까, 뭔가 신비체험을 하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같으니까 이쪽으로 사람들이 옮겨간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라고 하면, 솔직히 전 설명 못 합니다. 그저 우리의 현대과학이라 할지라도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이야기 외에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각자의 체험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는 있는 점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체험이라고 부르는 행위들, 기도 중에 뜨거워졌다던가, 갑자기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던가, 방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던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던가 하는 일들은 ‘하나님 체험’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 체험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체험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아는 지식은 사람의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호세아가 오늘 본문 2절에서 말했습니다. 이 땅에는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뿐이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을 행합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기에,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모르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모르기에, 자신의 처지에서 조금이라도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하는 행동들 아닙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살기에 이런 행동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도우심을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점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시리라는 사실까지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한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내 옆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지 못하기에, 악한 일을 행하면서도 괜찮다, 괜찮다,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강단에 서면서 딱 한 번 성도님들을 향해서 “여러분 하나님 믿는 거 맞습니까?” 하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아니고 다른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였는데, 교회에 약간의 다툼과 분열이 일어났던 때입니다. 제가 하나님 믿냐고 질문했던 분들은 분열을 일으킨 분들, 다툼을 일으킨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펑펑 울고 계신 권사님들에게 이 질문을 드렸습니다. 솔직히 저도 모르게 말씀을 전하다가 이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안다면 왜 울고 계시냐고, 왜 근심하고 걱정하고 계시냐고, 그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눈물 닦으시고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고 일어서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미래에 대해서 계획을 세울 수는 있을지라도 막연한 미래에 대해서 걱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분명하게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살아 숨쉬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도 아시게 되길 바랍니다. 알고 복 받는 삶을 사시길 원합니다.

저는 열심히 성경의 말씀을 해석해서 전하는 사람이지만, 여러분들께서는 오직 한 가지만 마음에 품으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하시며 도우신다.” 이 지식만 아시면 됩니다. 이 말씀만 믿으시면 됩니다. 이 지식을 품으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악한 길이 아니라 오직 선한 길만 걸으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게 되시는 성도님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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