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인간의 불완전함, 하나님 때문 아닌가?말씀을 주신 이유(시 19:7-10)
이성훈 | 승인 2018.10.28 18:50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오늘 드리는 말씀은 저의 한 가지 질문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본래는 처음에 했던 생각은 ‘우리는 왜 지금의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돈이라는 물질에 의존하면서, 그 돈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하는가?’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조금 달라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말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 또 다른 질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부러워하고, 나도 그와 같이 살고 싶다며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그 결과는 돈이 많아야 한다는 결과로 연결됩니다.

과거에는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의 시대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어떠한 지점이 생겨났습니다. 지금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삼성의 이재용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이재용 부사장은 너무 먼 존재이기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참 아래로 기준을 잡고 생각한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점이 분명히 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도달할 수 없는 꿈에 의해서 낙담하고 실망하고 어려워합니다. 또 힘들어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들에 대해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많은 교회들에서는 우리가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대답을 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가능성을 주셨고, 우리에게 많은 희망을 주시고 우리에게 많은 복, 특히나 내 삶에 지장이 가지 않는 정도의 풍요를 주신다고 말씀드려왔습니다.

이렇게 따지자면 결국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한 사람의 목사로서는 하나님께 대한 불경스러운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감정, 우리의 생각, 어찌보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런 우리의 모습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만드셨기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셨다면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세상을 살아가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중에 오늘 시편 19편의 말씀을 보게 되었고 이를 통해 얻은 은혜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시편 19편은 창조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절에서 6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쉽게 창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창세기 1장,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가장 처음에 보게 되는 책의 페이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 다윗이 시편 19편을 쓰고 있는 모습을 그린 성화 ⓒGetty Image

시편 19편은 이와 같은 이미지로 시작됩니다. 3절에서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고 말하지만 4절에서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끝까지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원어에는 ‘그의 소리’가 아니라 개역개정 성경 각주에도 나와 있다시피 히브리어 ‘까브(קָו)’, ‘줄’이 이어져있고, 그 줄에서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어지고, 그곳에 해의 장막이 놓인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세상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놓이게 되고, 그 말씀으로부터 해의 시작점이 놓이게 됩니다. 5절과 6절은 그 해가 운행함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과학적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창조 신앙의 문제이고 시적 허용이라고 넘어가죠. 굳이 이를 과학 상식이나 지식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한 믿고 있습니다. 시편 19편도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지 않으신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물론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사람 창조 기사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꼭 사람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장의 사람 창조에서도 다른 창조와는 다르게 말로 명령하시는 구절이 나오지 않고, 사람만은 예외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2장에서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은 스스로를 보완하는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1장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를 2장이 보완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먼저 말씀드렸다시피 사람은 왜 이렇게 불완전하게 만들어졌는가가 문제입니다. 어쩌면 시편 기자의 칭송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큰 능력이 있지만, 하나님의 손재주는 말씀의 능력만큼이나 좋지 않으셨던 걸까요?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손으로 사람을 직접 만드셨으니까, 사람은 다른 창조물들보다 더 특별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생각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말씀의 능력이 손재주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셨던 건 아닐까요? 그래서 손으로 만드신 사람이 그냥 말씀으로 만드신 존재들보다 더 불완전해진 것은 아닐까요?

이 불완전한 인간은 처음부터 뭔가를 갈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갈망했기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었습니다. 어쩌면 지혜를 갈망했다기보다 그저 더 맛있어 보이는 열매, 하나님만이 먹을 수 있다는 그 열매를 갈망했는지도 모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이 받은 은총을 갈망했고 그 은총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 동생을 살인하게 됩니다.

이런 인간의 불완전함이 우리 스스로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애시당초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문제이지는 않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

시편 19편의 기자가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시를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해 하나님의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점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시편의 기자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시편의 기자는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점에서 저와 생각을 같이 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이 불완전한 인간을 위해서 무엇을 주셨는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7절부터 10절까지는 말씀에 대한 예찬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그 ‘말씀’을 지금 우리에게도 주셨음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찬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점에 있어서는 조금 다른 생각입니다. 이는 말씀은 뛰어나다는, 훌륭하다는 그런 생각으로 읽어야 한다기보다, 오히려 책임을 다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읽어야 한다고 봅니다. 불완전한 인간을 만들어버리신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책임을 다하시기 위해 우리를 완전케 하시려고 ‘말씀’을 주셨다고 읽습니다.

저자가 그런 의도 쓰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읽어도 되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문학 작품이 아니라 경전입니다. 우리 종교의 경전입니다. 저자의 의도도 중요하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전해지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미 이 시가 성경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성경이라는 큰 경전 안에서 시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변한다고 봅니다.

시인은 7-9절까지 여섯 가지 단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합니다. 토라, 에두트(עֵדוּת), 피쿠딤(פִּקִּוּדִים), 미츠바(מִצְוָה), 이르아(יִרְאָה), 미쉬파트(מִשְׁפָּט), 우리말로 바꿔보면, 율법, 증거, 규범, 계명, 두려움, 정의 이렇게 여섯 가지입니다.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여기에 또한 말씀이 어떠한지 표현하는 문구들도 여섯 가지 덧붙여 있습니다. 굳이 히브리어로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완전하고, 확실하고, 바르고, 순수하고, 깨끗하고, 진실하다.’ 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받게 된 우리는 시편 기자의 표현에 따르자면, 7절에서 ‘영혼이 되살아나고, 밝히 지혜를 얻게 되고,’ 8절에서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눈에 빛이 비춰줍니다.’

선물로써의 율법

11절부터 13절의 말씀은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말씀간의 관계에 대해서 말합니다. 앞서 시인이 말씀을 표현하고 있는 단어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 법과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잘못을 드러내주는, 그리고 잘못을 고치고 회개할 수 있는 척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법이라고 말하면 상당히 무겁게 다가옵니다. 꼭 지켜야만 하는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고 안 지키면 벌을 받게 되는 무시무시한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저도 많은 말씀을 통해서 벌주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의 위안, 두려워할 법이라는 인식에서 조금의 전환을 드리려고 합니다.

앞서 우리의 불완전함이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불완전한 존재를 위해 주신 말씀이 우리에게 무조건 지키라는 명령,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지키지 않으면 벌 받는다는 명령이라면 그 또한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인식을 바꿔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강압적인, 어쩌면 이 시대에 걸맞지 않은 옛날 법이 아니라 불완전한 우리를 완전하게 채워주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시하고 체벌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법률 체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완전하기에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지려고 갈망하고 이 갈망을 채우기 위해서 악을 행하기까지 하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갈망을 채워주셔서 완전케 하시고, 오직 선한 길로만 나아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책임을 다하신 은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완전하여지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아무런 근심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심으로 오직 기쁨을 누리시게 되는 성도님들 되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책임을 다하시기 위해서, 창조하신 책임을 다하시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의 귓가에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당신의 말씀을 채우셔서 완전케 하시는 분이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시게 될 줄 믿습니다. 또한 그 안에서 충만한 은혜를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충정로 2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생명의집 204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8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