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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교신학이 선교대회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교회청년운동에 투신하다 1
김정택 | 승인 2018.11.02 22:15

알린스키대중조직운동 훈련이 끝나고도 나는 청계천에 머물렀다. 마땅히 갈 때도 없었고 정도 들었다. 김진홍 선배뿐만 아니라 잠자리와 건강을 챙겨주는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준 김종길 집사 부부랑, 나하고 나이가 같은 김영준이랑 다 식구 같았다. 혼자 떠돌이 인생이 되어버린 나에게는 정말 귀한 식구가 생긴 것이다.

1972년 3월이 되어, 2학년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바로 군대입대 영장이 나왔다. 기숙사 비용이나 납부금 마련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생각에 별 고민 없이 군대를 갔다. 내가 1사단 629포대 관측병으로 OP를 올라 다니며 비무장지대를 관측하고 농가의 배추를 뽑아 기막히게 시원한 배추국을 끓여먹던 시기에 사회에서는 엄청난 사건들이 터지고 있었다.

72년 12월 유신헌법이 발표되고, 74년 4월에는 긴급조치 4호로 민청학년사건이 터져 많은 민주인사와 대학생들이 투옥되었다. 감신 출신으로는 김동완, 정명기가 붙잡혀 갔다. 그러면 나는 군대 간 덕분에 빠진 걸까?

75년 군대를 제대하고 2학년에 복학했을 때 민청학년 구속자들이 2월에 거의 다 석방된 것을 알았다. 75년 5월초에는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되면서 대학에서는 일체의 비판적인 정치적 발언, 모임, 집회, 시위는 금지되었다. 기독학생들은 대학에서의 활동은 접고 서서히 교회활동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김동완 선배, 정명기를 다시 만났다. 71년 입학동기인 박영천, 이상윤 동생들도 같이 만났다. 졸업자들은 교회를 개척하는 방식을 택했든, 직접 현장에 들어가는 방식을 택했든 당시 풍미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따라 우리보다, 교회보다 앞서서 현장에서 하나님은 활동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현장사역에 임하였다.

나는 학생이지만 가난한 자와 함께 하겠다는 청계천의 강한 신앙체험이 나를 잠실의 구두닦이, 넝마주의 막사로 이끌었다. 장의균이라고 나와 동갑인 서강대학교를 다니는 친구가 태권도 고단자인 동생과 함께 숙소를 만들고 젊은 친구, 어린 친구 등 다들 이유가 있어 집을 나온 후배들을 모아 같이 합숙하고 일거리로는 고물 줍는 일, 구두 닦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아파트들이 지어지던 시기이기에 고물도 많고 출퇴근 직장인들은 다 구두를 구두닦이에게 맡겨 닦고 있었다. 이제윤이라는 감신대 1학년 후배는 풍기는 모습이나 노는 행태도 넉마주의, 구두닦이 그 자체였다.

▲ 1970년대 남양만 활빈교회 전경 ⓒhttp://photohs.co.kr/xe/1455

이때부터는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고 감신대를 다녔다. 그리고 나는 한편으로는 감리교청년연합회-MYF-활동에 투신했다. 75년에는 감리교연합회 전국회장을 맡으면서 여름선교대회를 최병천 등과 함께 기획하고 준비했다. 감리교본부인 총리원 교육국총무 라사행 선교국 총무와 김준영 목사를 빈번히 찾아가 협조요청을 하였다.

그런데 결국은 교육국에서 개최를 막고 나섰다. 이때 처음 성화니 호헌이니 하는 감리교의 계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라사행 총무는 성화파이고, 성화파의 거두는 서형선 목사라는 것을 알았다.

선교대회준비자들은 서 목사를 만났다. 임원들이 어떤 각오로 임했고 어떻게 단판을 졌는지 지금은 세세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결국은 연합회는 동의를 얻어냈다.

후에 어느 누군가가 서 목사가 자네를 감독감이라고 하더라고 전해준 이야기는 기억에 있다. 그런데 감독감이란 작자가 계속 제도권과는 멀어지는 길을 걸었으니. 유신정권도 딱이 훌륭한 통제정책을 수립하기는 어려웠었던 것 같다.

소수의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합류하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그야말로 순박한 교회생활에 충실한 유신정권의 지지자들이라고 착각할만한 청년들의 집합체가 연합회였으니까. 집회 불허도 못하고, 허용은 할 수 밖에 없고 집회현장인 교회밖으로는 나오지 않도록 형사들은 뻔질나게 총리원 교육국을 드나들었고 연합회 임원들도 만났다. 희한한 것이 그럴수록 준비자들은 신앙심이 강해져갔고 감리교 특유의 통성기도는 연합회구성원의 열정이 터져나오는 출구가 되었다.

선교대회 강사들은 민중신학자, 목사들로 채워졌고 하나님의 선교신학은 선교대회 참가 청년회중들의 뜨거운 신앙에 방향으로 마음을 사로잡아 가는 것이었다. 이제 선교대회 참가자들은 선교대회라는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빈민, 노동, 농촌의 운동가로 거듭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김정택  kjt94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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