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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올 문학, 릿쿄대학 윤동주 추도회의 10년시인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을 맞으며
유시경 성공회 사제 | 승인 2018.11.20 20:10
이 글을 기고해 주신 유시경 성공회 사제님은 현 릿쿄대학 한국사무소장이자 전 릿쿄대학 교목(2000-2010)으로 재직하셨습니다. 또한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회 사무국장 역임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성공회 교무원장을 맡고 계십니다. 윤동주 시인의 탄생일인 11월23일을 앞두고 귀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유시경 사제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나는 소위 386세대이다. 대학 시절에 읽었던 일본에 관한 책 가운데 마루야마 마사오 씨의 번역서 앞표지 뒤를 보니 “반일反日, 승일勝日, 극일克日”이라고 써 놓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러운 생각이지만, 한창 때의 혈기어린 치기로는 그럴만했다.

광주 민주화운동 강제진압으로 시작한 살벌한 1980년대를 주로 교회와 학교에서 지냈고, 그 이상의 시간만큼이나 거리와 내 나름의 현장에서 지내면서, 교과서 문제, 재일외국인(주로 재일동포) 지문날인 철폐 운동을 통해 ‘재일’의 존재를 만나고, 한국과 일본의 성공회가 교류를 나누는 중에 청년대표로, 성직자로 일본의 친구들과 선후배 지인들, 특히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음으로 양으로 돕던 일본인들을 만났다.

윤동주와의 인연의 시작

▲ 유시경 성공회 사제 ⓒCBS방송 캡쳐

1986년 서울에서 열린 일본 청년들과의 모임을 통해 평생 지기 일본 친구를 만나면서, 일본의 ‘느낌’이 바뀌었다. ‘원수의 나라’에서 ‘친구가 사는 나라’가 되었다. 한국의 일상과 교과서와 여론 속에는 ‘쪽발이’가 있었지만, ‘민나 도로보’라고 느꼈던 일본인들 가운데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들이 있고, 천황제의 유산이 짙게 드리운 일본 사회 속에서 신앙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일본 교회와 신앙인’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일본 국내에는 여전히 한일간의 관계에서 또 하나의 변수여야 할 수많은 ‘조센징’이, 일본 땅에서도 ‘민단’과 ‘총련’으로 갈라진 채 살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1995년 한국에서 열릴 예정이던 한일청년캠프는, 이해 1월 17일 발생한 한신아와지(코베) 대지진으로 인해 중지될 뻔 하였으나, 협의 끝에 한국 청년들이 재해  부흥을 조금이나마 거들자는 뜻으로 워크캠프로 제1회를 시작했고, 청년 23명과 함께 인솔로 동행했던 나에게도 일본의 여러가지 얼굴을 만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캠퍼로 참가했던 한국 청년들 중 6명이 중 3명은 현재 나가노, 센다이, 오키나와 등지에서 일본 교회를 위해 일하고 있다.

1980년대 이래로 일본의 지인들이 많았고 평생지기 친구가 움직인 것이 배경이라 보인다. 1999년 뉴밀레니엄을 1년 앞두고 일본성공회를 통해 릿쿄대학의 교목 사역 초청을 받았다. 37세라는 묘한 나이여서 고민이 많았지만, 도일을 결심했다. 시인 윤동주와 같은 창씨개명까지야 하지 않았지만, 쉬운 결심은 아니었다. 말도 글도, 생활도 문화도 다 몸으로 부대끼며 익히고 배워야 하는 새 삶이 시작되는 일이었다. 지내놓고 보니 추억이요 교훈이지만, 비싼 수업료를 치른 제2의 인생준비 수업이었다.

릿쿄대학 재직 중, 리버럴 아츠 교육의 역사 속에서 이 대학이 인력과 예산을 지원해 온 유서깊은 학생 캠프 프로그램의 하나로, 내전 때문에 캠프개최가 어렵게 된 스리랑카를 대신하여 한국을 개최지로 하는 한일대학생 합동캠프를 시작했다. 매년 양국 15명씩 30여명의 한일 대학생들이 한일간의 역사적 관계를 중심으로 교류를 가지면서, 다음 세대를 위한 기초를 쌓았다. 캠프 멤버 중에 4쌍이 결혼했고, 그 중 국제결혼이 2건이다.

2002년의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와 2004년의 후유소나 붐(후유노 소나타 = 겨울 연가)을 계기로 달아오른 한류 붐 속에서 유학생 이수현의 살신성인, 한국어 붐을 겪었다. 2003년 이래 7년간은 한국어 강좌를 운영하면서, ‘용사마(배용준)’ 열기의 세례를 받았다. 릿쿄대학을 위시하여 여러 곳에서 한국어 교실을 담당하며 일본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경험을 했다.

한편, 재일한국조선인들의 우려섞인 반응도 여러차례 확인했었다. 지금까지 일본 사회 속에 이미 존재했던, 그들의 아주 가까운 곳에 존재해왔던 한국은? 소위 한류 붐인데, 이 고비가 지나고 나면 다음에 올 것은? 그들의 경험적 육감은 거의 예언에 가까왔다. 실제로 지금 한일관계는 앞이 안보일만치 바닥이고, 일본내 외국인들, 무엇보다 재일한국 조선인들에 대한 반인권적이고 차별적인 폭력과 압박이 가중되어, 그들의 사회적 심리적 불안은 전후 어느 때보다도 높은 때이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비록 작게나마 동주의 족적과 겹쳐지는 경험들이 있다. 아주 잠깐 소위 사상범으로 체포와 취조를 받고, 독방 옥살이와 재판을 겪었다. 외국 생활 중에 비내리는 창가에서 향수에 젖기도 했다.

절대 배울 리 없으리라 여겼던 일본어로 10년을 살았고, 지금도 쓰고 있다. 원수의 언어로만 여겼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평화를 일구기 위해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늦게야 알았다. 우물을 파도 10년은 같은  우물을 파야한다며 6년차에 귀국을 생각하던 나를 눌러앉혀 10년을 있게끔 만든 한 일본인 원로의 마음도 기억한다. 그렇게 “새로운 길, 새로운 삶”이 다가왔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 /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오늘도…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5.10)

윤동주를 기리는 일본인들과의 만남

한국에서는 대표작 “서시”와 함께 누구나 아는 국민적 저항시인 윤동주의 존재가, 릿쿄대학에서는, 그리고 일본 사회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져 있었다. 2000년 릿쿄대학에 부임한 이래, 나는 줄곧 이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던 가운데, 시인 윤동주를 다시 만났다. 아니, 윤동주를 기리는 일본인들을 먼저 만났다. 재직했던 곳이 시인의 첫 유학지인 릿쿄대학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보다 앞서 일본에서 시인을 만났던 특별한 일본인들을 만났던 것이 계기였다. 현재 일본에서는 첫 유학지인 동경, 두번째 유학지인 쿄토, 마지막 생을 보낸 후쿠오카 등 3지역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추도행사와 기념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윤동주와 한국, 한일관계 등 특별하지만 불편한 우물을 파고 있는 일본인들과 만난 것이다.

▲ 1995년 일본 교토 도시샤(同志社) 대학 교정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Getty Image

2004년 윤동주 기념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본교 졸업생 야나기하라 야스코 씨의 간절한 편지로 인연이 닿았다. 야스코씨는 “릿쿄가 윤동주에게 냉담해서 야속하다.”고 느꼈던 경험을 전해주셨다. 사실은 릿쿄대학에 ‘윤동주’의 역사에 대한 인식도 기억이 없었고, 야스코씨의 안타까운 심정과 달리, 본고사 제도를 위한 2월의 입시 시즌과도 겹쳐, 2월 16일의 윤동주 기일은 ‘냉담과 외면’의 대상이었다.

대학의 관계자들에게 윤동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러차례 대화와 보고와 기획을 통해 짧게나마 재학생이었던 윤동주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었다. 실제로 한국을 다니러 왔던 한 관계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윤동주에 대해 물었고, ‘누구나’ 알고 있고, ‘서시’ 정도는 암송할 정도로 국민적 시인임을 확인하고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이 시기는 릿쿄대학 자체의 장기적 정책상으로도 유럽 미국 중심의 시각을 아시아로 넓혀가는 시점이기도 했다.

2007년 2월, 이케부쿠로 캠퍼스의 대학 채플에서 첫 기념 집회를 열었다. 시인이 학교에 입학한 때로부터 60년이 넘어 처음으로 학교로 돌아온 셈이다. 강당이나 대교실이나 다른 넓은 장소가 아니라 대학 채플에서 추도식을 거행한 이유는, 크리스찬 윤동주가 재학중에 분명 이 곳에 있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 채플의 어딘가에 앉아, 때로 무릎꿇고 인생과 조국을 기도했으리라.

더우기, 영화 ‘동주’에 등장하는 동주의 멘토 역인 영문과 교수는, 릿쿄대학의 설립 모체인 성공회의 ‘타카마츠 타카하루’ 신부로 당시 교목이었다. 그가 죽은 후 대학은 채플 오른쪽 벽에 추도동판을 제작하여 부착하였다. 이어 2008년 2월 26일, 63주기 기일에는 윤동주가 재적했던 영문과(현 영미문학 전수)의 창립 백주년 기념행사로 추도예배와 기념강연을 개최하면서 동시에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회”가 발족했다.

사실 릿쿄대학을 거점으로 윤동주를 기념하기 이전에 윤동주의 시와 삶을 알고 알려온 선각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고대사 시절의 불교와 한자 문화 전래가 제1 한류라면,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었던 조선붐이 제2 한류에 해당하고, 월드컵 공동 개최 이래의 붐은 제3의 파도에 해당하는데, 나는 이 분들의 기초적인 발굴과 연구와 기념을 위한 노력들이 최근 일본 사회 제 3한류의 원류라고 생각한다. 특별고등경찰의 취조기록과(1977) 쿄토재판소 기록을 확인(1982)한 우치고 츠요시 씨, 윤동주 시 전집을 번역 출판한 이부키 고 씨(1984), 한중 외교가 막혀있던 시절에 윤동주의 북간도 고향에서 묘를 찾아내고(1985) 시작품을 연구한 오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 자신의 수필에 윤동주를 소개했고(1986) 그 작품이 교과서에 실림으로 많은 영향을 남긴 이바라키 노리코 씨, 윤동주의 2번째 유학지인 쿄토의 도시샤대 교정에 첫 시비를 건립한(1992) 도시샤대 코리아클럽 등등. 당시 시비 건립에 참여한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이렇게 기원했다. 

“창립120주년을 맞는 도시샤에서는 구름과 같이 인재를 배출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시민지 유학생이며 그것도 고작 1년이 채 못되는 재학기간으로 졸업생 명단에조차 없는, 학생으로 취급할바조차 없는 윤동주의 시비 건립은 실로 니지마의 정신이 오늘도 줄기차게 살아 이어져온 증거라 믿어 이 도시야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윤동주와 함께 감사드립니다. 전후 50년의 길목에서 이 시비가 모퉁이돌로서 한국과 조선, 중국과 러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 일본이 무엇을 해왔는가를 돌아볼 수 있게 하고 일본의 양심을 더욱 길러서 새로운 미래를 펼칠 도시샤의 하나의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 1995.2.16 시비 건립에 부쳐

이같은 뭇 선각자들의 노력 위에,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회의 활동이 더해지게 되었다. 관동 지역에서 보다 대중적으로 널리 윤동주를 기념하고자 목표했던 창립 당시의 멤버들이 지녔던 생각의 일단을 살펴보자.

“시인 윤동주의 희생과 삶 자체가,앞으로 릿쿄대학이 계속 소중히 간직해 나가야 할 역사적, 정신적 재산의 하나입니다. (중략)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는 거울로서, 오늘의 역사를 생각하는 잣대로서, 시인의 문학과 고결한 정신을 기념하는 이 모임이 계속해 나가길 바랍니다.”
- 오오하시 히데이츠 총장(당시), 2016.2.16 추도행사 축사 중)

“윤동주의 평화의 메시지를 배워, 우리 각자가 시대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생각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찾아내어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소중히 하고 싶습니다.”
- 야나기하라 야스코 수필가, 윤동주 고향방문 모임(1994 발족) 대표, 릿쿄 졸업생

“윤은 서시에서 <바람>, 즉 전시체제 아래 흉폭화된 식민지 지배의 폭압에 마음 아파했음을 말한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은, 그 폭압에 의해 문화를 박탈당해 민족으로서의 죽음을 강요당한 조선인을 가리킨다. 그러한 상황 아래 조선 민족을 사랑하는 길을 걷고, 하늘 즉 하느님 앞에 ‘한 점의 부끄럼도 없기를’ 서약한 것이다.”
- 야마다 쇼지 릿쿄대학 교수, 관동대지진의 국가책임을 묻는 시민모임 대표, 저서 : 카네코 후미코(박열의 부인) 외, 2007년 <릿쿄학원과 전쟁> 제14강 ‘전시체제하의 릿쿄대학과 조선인유학생들의 민족적 고뇌 및 수난’ 중

그 밖에 릿쿄 졸업생으로 한국어 전문강사인 한도 치즈코 씨, 역시 릿쿄 졸업생으로 2009년에 윤동주 시낭송 CD를 제작한 아마누마 리츠코 씨, 창립식 전후 홍보에 도움을 주어썬 아사히신문 사쿠라이 이즈미 기자, 전NHK PD 재직시절이던 1995년에 KBS와 윤동주 다큐멘터리 공동 제작한 타고 키치로  작가 등과, 한국에서 창립 축하차 오셨던 분들도 당부의 말씀을 남겼다.

“일본에는 국적이 다른 조선인이 살고 있다. 그들이 한국인이건 조선인이건, 차별하지 않고 시인 윤동주를 사랑하듯이 대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오늘 윤동주를 기리는 목적이고, 윤동주도 바라는 것이리라.”
- 임헌영 민족문학연구회 대표, 계간 서시 편집위원, 창립 축사

“윤동주의 시는 북한에서도 읽혀진다고 한다. ‘윤동주의 시는 남북한을 넘는 민족의 재산, 통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라고, 윤의 시가 말하는 <부끄럽지 않은 삶>이란 무엇인지, 일본에 와서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동주의 초등(소학)교 동창인 문익환 목사는 1990년 3월 평양 방문 때에, 공항에서 열린 첫 연설에서 <서시>를 인용하였다 한다.
- 유시경 릿쿄대학 교목(릿쿄회를 설립한 한국인 사제, 2008 당시 아사히신문 인터뷰)

2008년 창립 이래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10년 전 출범시의 꿈을 돌이켜 본다. 무엇보다 매년 릿쿄의 채플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신앙인이었던 윤동주 시인에게 가장 적절한 추도 방법이라 생각되었다. 시인의 애창성가도 부르고, 짧게 기도로 추도하기로 했다.

이어 한글과 일본어, 때로 다른 언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시 낭독 시간을 꼭 갖기로 했다. 제3부로 윤동주 연구가와 활동가 등을 초대해서 강연으로 이해를 넓히고, 간혹 자료 전시회 등 부대행사도 가졌다. 올해는 시와 음악으로 엮는 음악극 형태로 추도했다.

▲ 한·일 여중생들이 지난 19일 일본 도쿄 릿쿄대 채플에서 열린 윤동주 탄생 100주년 추모 행사에서 시를 낭독하고 있다. 왼편에 연희전문학교 졸업식 때 학사모를 쓰고 찍은 윤동주의 사진이 보인다. ⓒ유시경 성공회 사제 제공

또 하나의 꿈은 장학금이었다. 릿쿄대학의 깊은 이해와 논의를 통해 2010년부터 “윤동주 국제교류장학금”으로 시행되고 있다. 매년 10개 학부에서 각 1명씩 한국인 유학생에게 1인당 50만엔을 지급한다.

과거 이 대학이 유학생 윤동주의 학업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던 역사에 대한 반성과 다짐이 담긴 장학금 제도이다. 윤동주의 후배들을 돕는 것으로 그 책임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2009년도부터 준비, 제작, 발매한 시낭송 CD(니노미야 사토시, 유시경 녹음) <하나>의 판매금도 장학금 출범의 마중물이 되었다. 음악CD조차 시장이 좁아진 상황이었지만, 최초 발매분 1,000장은 걱정과 달리 발매 3개월만에 완판되었다.

이루지 못한 꿈의 하나가, 졸업증서 수여이다. 올해 10주년 추도식 예배에서 나는 설교 중에 졸업증서 수여 캠페인을 제안했다. 대학의 관계자가 의사 결정을 해서 주는 방식보다는,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일 수 있도록 서명 운동을 거쳐 대학에 요청하는 방식이면 좋겠다. 동경에도 ‘윤동주 시비’가 있으면 좋겠다는 소리도 있다. 만일 세운다면 일본인들이 앞장서서 세우게 되면 좋겠다.

또 한 명의 동주를 위해

사랑스런 추억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조그만 정차장에서 /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 나는 플래트홈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 담배를 피웠다 /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 나래속을 속, 속, 해빛에 비춰 날았다 (1942.5.13)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 봄은 다 가고 동경 교외의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차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동주는 도항증명서 발급을 위해 히라누마 토쥬(平沼東柱)로 일본의 식민지 압제에 의한 원치않는 개명을 강요당했다. 문학을 향한 일념으로 일본으로 건너온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쟁 훈련과 전시 총동원 체제의 압박, 나아가 체포와 투옥, 그리고 옥중의 의문의 죽음이라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1942년 4월, 윤동주는 릿쿄대학 영문과에서 선과생(選科生)으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선과생은 전시하에 임시로 개설된 과정이다. 결국 내선일체는 허울일 뿐, 대학 입시와 캠퍼스 라이프에서도 차별이 당연시되었다. 황군 배속 장교의 통솔하에 놓여, 대학생 군사교육이 강화되고 학도병을 모집, 전쟁터로 보냈다.

이런 릿쿄대학의 분위기에서 한 한기를 지낸 윤동주는, 그 해 7월에 일시 귀향한 후, 10월에 쿄토의 동지사(同志社) 대학으로 전학한다. 릿쿄대학과 같은 영문과, 같은 기독교대학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크리스찬이던 윤동주에게 기독교 대학인 릿쿄대학은 과연 어떤 곳이었던가 묻고 싶어진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 진상을 알 방법은 없고, 그가 릿쿄대학 재학중에 동경 하늘 아래, 하숙집 창가에서 눈물로 써내려간 시를 통해 그의 심경을 미루어 짐작해볼 따름이다.

 

바빌론 강가에서 수금타며 고향을 그리던 이스라엘의 심경이 이와 같았을까 싶다.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시편 137:4)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프 천명인 줄 알면서도 / 한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풍긴 /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들 /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삼는 최초의 악수
(1942.6.3)

동지사대학 재학 중이던 1943년 7월, 시인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구 후쿠오카 구치소에 수감, 조선독립을 반년 남긴 1945년 2월, 원인불명의 병으로 짧은 인생의 막을 내린다. 사인에 대해서는 식염수 제조를 위한 인체실험설 등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다. 체포 당시 증거품으로 압수된 작품들의 행방은 알 길이 없고, 그가 일본 체재 중에 남긴 5편의 시는, 따라서 모두 릿쿄대학 시절에 쓴 것이다.

그는 릿쿄대학의 편지지에, 당시 금지였던 조선어(한글)로 시를 엮어, 서울의 친구에게 보냈다. 친구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남겨진 5편의 시가 후일 발견되면서 윤동주의 존재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앞의 “쉽게 씌여진 시”는, 다름아닌 1947년 경향신문 지상에 정지용 주필의 추천으로 신문에 실리면서 윤동주가 시인으로 부활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이다. 정지용은 동주가 남긴 127편 가량의 작품 가운데, 처음 소개할 작품으로 바로 이 시를 골랐다.

“젊음이 오래 남아있기를” 바랬던 윤동주였지만,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기 반년 전인 1945(쇼와20)년 2월 16일, 일본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현재의 모모치공원)에서 27세의 짧은 인생을 접었다. 제국주의의 광풍 아래에서 식민지지배와 모국어 사용금지 등, 시대의 비극 가운데 한 청년의 인생은 막을 내렸다.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아보세”(흐르는 거리 1942.5.12)라고 다짐하고 유학과 독립의 꿈을 꾸었던 동주는, 특별고등경찰의 감시와 체포(1943.7.16), 취조와 판결, 옥살이 끝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백골이 되어서야 현해탄을 되짚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가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5.31)

동주의 이 시는 어쩌면 다가올 운명의 예언이었던가 싶다.

지금 우리가 윤동주를 기념하는 것은, 젊은 나이에 죽은 한 명의 시인만이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왜곡된 시대 속에서 인생과 생명을 빼앗긴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고, 또 한명의 윤동주를 낳지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異国)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본에 건너와 꿈을 펼치려 했던 윤동주의 강요당한 국제성과 방황을 생각할 때, 진정한 국제화를 지향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금 윤동주를 기념하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별의 시인 윤동주

보통 숫자는 ‘센다’고 하지만 밤하늘의 별은 ‘헨다’고 한다. 맞춤법상으로는 틀리지만 한국 사람들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음은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별헤는 밤” 덕분이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동주의 시를 뇌리에 새기고 사는 때문이리라.

▲ 윤동주 시인의 시 ‘별 헤는 밤’의 육필 원고. 윤인석 교수가 2013년 연세대에 영구 기증한 유품 중 하나다. ⓒGetty Image

몇 년 전 시인의 고향 용정 명동촌에서 밤하늘의 찬란한 은하수를 보며 그가 왜 “별의 시인”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광년의 시차를 거쳐 우리에게 도달하는 빛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별빛’이듯이, 한 세기 전의 동주라는 별이 우리와 우리 시대를 비추이고 있다. 그가 가슴에 품었을 성서의 말씀으로 맺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신약성서 요한복음 12:24)

유시경 성공회 사제  08sky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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