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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창조 이야기, 추방이 죽음이었다구약성서에 대한 문학적 이해 6
이정훈 | 승인 2018.11.25 19:30

둘째 창조 이야기는 훨씬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첫째 것보다 약 400여 년이 앞선 솔로몬 시대의 작품이라고 학자들은 이야기 한다.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의 저자인 야웨 기자는 전자에 비해 더 자의적이며, 생생하게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학자들은 그의 작품은 “가장 아름다운 전원시”니 또는 “창세기의 진주”와 같다는 등의 찬사를 보낸다.

정교하게 짜여진 둘째 창조 이야기

첫째 창조 이야기는 행동도 줄거리 전개도 없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이야기가 아니다. 첫째 창조 이야기는 이 이야기 속에 드러나는 가르침을 요약할 수 있지만, 둘째 창조 이야기는 요약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이야기의 흐름과 보조를 맞추어 가야 한다.

둘째 창조 이야기의 편집자 혹은 수집자인 야웨 기자는 작중 인물과 사건을 생명력이 넘치도록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독자로 하여금 동정을 금치 못하여 사건 전말의 비애에 공감하게 만든다. 야웨 기자는 또한 대화를 많이 사용함으로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와와 뱀, 하나님과 아담, 그리고 하나님과 하와 사이의 대화는 간결하면서도 실감나게 극적인 대화이다.

즉 이 둘째 창조 이야기는 매우 정밀한 구조를 가지고 짜여져 있다. 미국 구약학자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미주 1)과 제롬 월쉬(Jerome Walsh)(미주 2)는 그들의 책과 논문에서 자세히 분석해 논증했다. 이들의 분석에 의하면 둘째 창조 이야기는 네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I.   2:4b-17 사람을 에덴 동산에 살게 하심
II.  2:18-25  “돕는 베필”을 창조하심
III. 3:1-7.     동산에 들어온 훼방
IV. 3:8-24.    심판과 추방

이 네 장면들 중에서 장면 I과 장면 IV는 동산에 들어오고 나간다는 점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장면 II와 III 역시 공동체의 형성과 공동체의 파괴라는 점에서 또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본다면 에덴 동산(장면 I)은 공동체(장면 II)를 위해 존재하며 공동체가 파괴됨으로써(장면 III) 에덴 동산의 선함은 사라지는 것이다(장면 IV).

하나님을 닮은 사람, 사람을 닮은 하나님

야웨 기자가 그리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인간과 무척 닮아 있다. 야웨 기자는 동산을 만들고, 저녁에 산책을 하며, 손가락 사이사이에 진흙을  묻히며, 인간을 빚어 물에 빠졌던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하듯 그 코에 입김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시며,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를 떼어 만들고, 자녀들이 말을 안 들을 때는 화를 내기도 하며, 슬퍼하기도 하고, 또 불쌍히 여겨 옷을 만들어 주시기도 한다. 이것을 학자들은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이라고 부른다.

야웨 기자의 창조기사는 창조를 모두 하루 아침에 마친다. 창조는 물을 갈라놓는 것이 아니다. 마른 땅에 비를 내려 촉촉히 해주는 것이다. 창조 순서도 P기자의 것과 다르다. 야웨 기사에는 남자가 맨 먼저 창조되고 그 다음 식물과 동물, 그리고 맨 끝에 여자가 창조된다.

사람이 땅에서부터 창조되었다는 개념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도 많이 나온다. 히브리어 ādām(사람)과 ādāmā (땅)는 비슷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 쉽게 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ish(남자)와 ishshā(여자). 이 두 낱말을 보아서도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도록 만든 언어유희에 가깝다. 여자 창조의 이야기는 히브리 문화에서 남자와 여자, 즉 한 가정의 단합성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그런데 왜 하필 갈빗대를 사용했다고 표현했을까? 최근 추측으로는 수메르어(Sumerian) 말에 갈빗대(Rippe)라는 말과 하와(hwa)란 말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히브리 기자는 수메르 전승을 참고로 결혼을 통해 남녀가 한 육체가 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 아니겠냐고 한다.

하나님은 처음에 동물들로 하여금 아담의 반려자가 되도록 했으나 그들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친교를 제공할 수 없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Es ist nicht gut, daß der Mensch allein sei, 창세기 2:18). 이것은 가족 중심인 히브리 문화의 중심적인 사상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사회구성의 일원으로 그의 동료들과 같이 지내도록 태어났다고 믿기 때문에, 가족의 친교와 보호에서 단절된다는 것이 무척 불행한 일로 여겼다고 한다.

야웨 기자는 아담이 하와를 처음 봤을 때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담은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다.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창세기 2:23)

아담은 동물들과 자기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 준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무척 중요하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름이 곧 그 사람이나 물건의 성격을 나타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대인은 무지의 경지도 그 이름만 알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고, 또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같이 씨름하던 천사의 이름을 굳이 물었던 이유도 그와 같다. 야웨 기자는 아담이 자기 주위의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지어 줌으로써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물의 통제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추방이 곧 죽음이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모든 과실을 다 먹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세기 2:17)의 열매만은 먹지 못하도록 되었다. 이 점에 대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그 열매를 따 먹음으로 인해 성적 지식이 생겼다고 본다. 그러나 창세기 2장 22-25절에는 이미 남자와 여자가 성적 쾌락을 알고 있는 것으로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P기자도 1장 28절에 “자식을 낳고 번성하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 열매가 성적 지식을 주었다고 보기 힘들다. 창세기 3장 5절과 22절에는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는데, 구약성서에는 신의 성적 매혹은 부인한다.

ⓒGetty Image

그렇다면 그 나무는 열매가 사람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알  수 있는 도덕적 의식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까? 사람은 처음부터 그같은 도덕적 의식이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그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구약성서를 전체적으로 볼 때 “선과 악”은 도덕적 선과 도덕적 악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생활에 관련된 모든 것, 지상선(至上善)으로부터 최악의 악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체험적 지식을 얻게 되며, 그것을 통해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어 하나님께 절대 의존해야 될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인 것이다.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창 2:25)는 말은 수치를 모르는 어린아이의 순진성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

야웨 기자가 그린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은 걸작품이다. 저자는 유혹 장면을 기술하면서 뱀이 어떻게 말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지금은 여우가 동물 중에 가장 간교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고대 근동 문화에서는 뱀이 그렇다고 보았던 것 같다.

먼저 뱀은 하나님께서 모든 나무 열매를 다 못 먹게 하셨냐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비튼다. 하와는 하나님을 옹호하면서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만 못 먹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러자 뱀은 하나님이 그것을 못 먹게 하신 동기를 공공연하게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하와는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 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3:6) 그 열매를 따 먹고, 또 아담에게도 권한다.

영국의 대문호 존 밀턴(John Milton)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Thou canst, who art sole Wonder, much less arm
Thy looks, the Heav’n of mildness, with disdain.
Displeas’d that I approach thee thus, and gaze
Insatiate, I thus single, nor have fear’d
Thy awful brow, more awful thus retir’d.
Fairest resemblance of thy Maker fair,
Thee all things living gaze on, all the nags thine
By gift, and thy Celestial Beauty adore
With ravishment beheld, there best beheld
Where universally admir’d: but here
In this enclosure wild, these Beasts among,
Beholders rude, and shallow to discern
Half what in thee is fair, one man except,
Who sees thee? (And what is one?) who shouldest be seen
A Goddess among Gods, ador’d and serv’d
By Angels numberless, thy daily Train.

Indeed? hath God then said that of the Fruit
Of all these Garden Trees ye shall not eat,
Yet Lords declar’d of all in Earth or Air?
Shall that be shut to Man, which to the Beast
Is open? or will God incense his ire
For such a petty Trespass, and not praise
Rather your dauntless virtue, whom the pain
Of Death denounc’t, whatever thing Death lead
To happier life, knowledge of Good and Evil.
- Paradise Lost, Book IX

그 다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들통이 나는 장면도 훌륭한 묘사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에게 죄 자백을 받도록 살살 달래는 지혜로운 부모처럼 묘사된다. “너 어디 있느냐?”(창 3:9) 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은 사람의 속을 낱낱이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사람은 그 물음 앞에 자신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담이 먼저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자백한다. 야웨 지가는 여기서 벌거벗었다는 것이 죄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이제는 순진한 어린아이가 아리나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어주더냐? 내가 따 먹지 말라고 일러둔 나무의 열매를 네가 따 먹었구나!”(3:11) 하고 오히려 반문을 하신다.

영원을 상실한 사람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신다. 생명나무에서 쫓겨났으니 그 댓가는 죽임이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Zeus) 신이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에게 형벌을 내린 것과 마찬가지로 최조의 인간은 신의 명을 어긴 것으로 인해 형벌을 받는다.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낱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 3:19)

“흙에서 흙으로, 먼지에서 먼지로”라는 구절은 결국 영원을 상실한 사람의 자리가 “먼지에서 먼지”라고 하는 유한성의 한계로 좁혀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삶의 현상의 기원을 더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 사태, 존재의 근원, 즉 남자와 여자는 왜 다르며, 결혼은 왜 하며, 세상의 죄악은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으며, 옷은 왜 입고, 뱀은 왜 기어 다니며, 뱀과 사람은 왜 서로 미워하며, 해산에는 왜 고통이 따르고, 농사에는 왜 땀을 흘려야 하는가 등의 기원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야웨 기자는 여기서 이같은 인간적인 흥미는 물론이지만 보다 심오한 종교적인 감정을 유발시킨다. 야웨 기자는 사람의 고통에 대한 문제가 왜 생겼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사람이 비록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여 눈이 열리게 되었지만, 그 대신 고통과 슬픔의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아담과 하와의 비극은 결국 시간과 장소의 구별 없이 모든 인류가 겪는 비극을 보여 주는 것이다.

미주

(미주 1) Phyllis Trible, 『God and the Rhetoric of Sexualit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6), 특히 제4장, 72-143 참조.
(미주 2) Jerome Walsh, “Genesis 2:4b-3:24 : A Synchronic Approach”, JBL 96:161-177, 1977.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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