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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는 왜 이스라엘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가구약성서가 말하는 종교개혁과 사회개혁 2
박경철 교수(한신대 구약학) | 승인 2018.11.30 20:41

구약성서 시대 이스라엘의 종교제의에 대한 이사야서의 부정과 긍정

이사야서는 그 시작부터 이스라엘의 종교제의 행위에 대한 전면적 거부를 명한다(1:13).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기 위해 마치 법정증인으로 ‘하늘과 땅’을 지목한다(1:2).(1) ‘하늘과 땅’을 이스라엘의 범죄 사실을 폭로하는 증인으로 불러 세우는 것은 범죄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제 그 어디에서도 죄를 감추고 살 수 없음을 단언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같다.

특히 이사야서 가장 처음에 ‘하늘과 땅’을 언급하는 것은 현 이사야서 전체 최종형태의 구성(2)을 특징짓는 매우 중요한 의도이기도 하다. ‘하늘과 땅’에 대한 언급은 현 전체 이사야서 최종형태에서 처음(1:2)과 마지막(66:1)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3) 특히 주목할 것은 이사야서 처음에서 ‘하늘과 땅’(שמים ... ארץ)이 이스라엘의 범죄 사실에 증인이 되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살아갈 수 없는 심판의 종언을 선언했다면, 이사야서 마지막에 가서는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새로운 구원의 희망으로 ‘새 하늘과 새 땅’(שמים חדשים וארץ חדשה)을 보여준다.(4)

이사야서 65장 17절에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는 새로운 선언이다. 아울러 더 이상 이전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임을 약속한다. 그 뿐 아니라 이사야서 처음에서 더 이상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거나 ‘초하루와 안식일 집회’(חדש ושבת קרא מקרא)에 대한 단호한 거절을 선언한 반면(1:13), 이사야서 마지막에 그리는 ‘새 하늘과 새 땅’(66:22)의 종말론적 표상에서는 이제 ‘모든 육체가 초하루와 안식일에 하나님께 경배하러 올 것’(והיה מדי־חדש בחדשו ומדי שבת בשבת ויבוא כל־בשר)이라는 이사야서 처음과는 정반대로 극적인 반전을 보여준다(66:23).

이러한 이사야서의 처음과 마지막의 분명한 연결의 의도는 이사야서 전체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 선언이 어떻게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열방과 ‘모든 혈육’(כל־בשר)에까지 구원의 표상으로 변해가는 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사야서의 결론만 보면 이사야서 처음에서 언급된 이스라엘의 종교 제의에 대한 절대적 거절과 부정이 결코 종교 제의 그 자체의 영원한 금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이사야서가 처음에 이스라엘의 종교제의 행위에 대해 절대적 거부를 선언한 이유가 무엇이었으며 왜, 어떻게 마지막에 가서 모든 종교제의 행위의 영속성을 언급하게 된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다.

이사야의 종교제의 부정 - 이사야서의 시작

이스라엘의 정기적인 종교제의 행위의 상징인 제물(1:11)과 집회(초하루, 안식일)에 대한 절대적 거부(1:13-14)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기도하는 손’(종교적 행위)에 ‘피가 가득 묻어있기’(사회적 불의)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1:15).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종교제의 행위로 보이는 하나님께 아무리 많이 열심히 기도한다 할지라도 이를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1:15).

예언자의 종교제의 비난은 제의 자체가 아니다. 이들의 사회적 악행이 문제다.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제의 행위는 야훼께 무효다. 아니 절대 거부다. 예언자가 외치는 야훼 신앙의 핵심은 종교적 행위와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5)

야훼 경배의 조건이며 우선되어야 할 것은 사회적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는 피 묻은 손을 깨끗이 씻을 것을 명한다(1:16). 씻어야 할 손에 묻은 피는 곧 그쳐야 할 악행이며,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라는 명령이다(1:17). 특히 거론된 그 대상은 고아와 과부(6)이며, 불의한 피의 현장은 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취해지고 있는 불의한 법정이다(1:17, 23;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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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사회 상류층들이 뇌물을 받고 가난한 사회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하소연과 항소를 외면한 것이다(1:23, 참고, 암 5:12).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불의한 법정의 문제는 이사야 59장 3절 이하에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법정에서의 거짓증언으로 인한 불법과 불의를 고발하고 있는 장면이다. 특히 59장 3절은 1장 15절과 동일하게 ‘너희의 손에 피가 묻어’ 있음을 언급한다.

3 너희의 손이 피로, 너희의 손가락이 죄악으로 더러워졌고, 너희의 입술이 거짓을, 너희 혀는 악독한 말을 하기 때문이다.
4 누구도 정의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아무도 진실한 재판을 하지 않는다. 헛된 것을 믿고 거짓을 말하며, 악한 생각을 품고 죄를 짓는다.(사 59:3-4 사역)

이스라엘의 범죄의 구체적 정황을 당시 법정에서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대한 불법과 불의의 문제라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은 이사야서 곳곳에 나타난다. 이사야 3장 13절에서 15절에는 야훼는 직접 법정에서 불의한 사회의 권력층과 지도층들을 판결하시는 재판관의 모습이다. 이들에 대한 공소사실은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재산을 늘린 것이다.(7) 이는 곧 야훼의 ‘포도원’을 망친 것이며, 이사야 5장의 이른바 ‘포도원의 노래’(8)에서 유사한 발음을 빗대어 적나라하게 그 참상을 고발한다.

ויקו למשפט והנה משפח לצדקה והנה צעקה׃
“공의(미쉬파트)를 기대했지만, 보라, 포악(미쉬파흐)이다
정의(쩨데카)를 (기대했지만), 보라, 울부짖음(쩨아카)이다.”(사 5:7, 사역)

피의자로 지목된 야훼의 심판의 대상자인 사회 지배층인 이들은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하는 자들이다. 어둠을 빛이라 하고, 빛을 어둠이라 하는 자들이다.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자들이다(5:20). 이사야서 제일 처음에 거론된 종교제의에 대한 절대적 거부의 이유로 들었던 ‘너희 손에 묻은 피’의 문제가 고아와 과부들에게 법정에서 행한 이들의 불법과 불의의 문제였던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또 있다. 1장 23절에서 사회 지배층들이 ‘뇌물’(שחד)를 받고 사회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를 변호하지 않고 그들의 송사와 항변을 거짓으로 외면하고 불의한 판결로 내 몰았던 것이다.(9) 이사야 5장 23절에서는 바로 이들이 ‘뇌물’(שחד)을 받고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의 정의를 빼앗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사야 10장 1절 이하에서는 다시 한 번 사회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에게 행한 사회 지배층인 불의한 법정의 문제를 거론하다.

1 화 있으라! 불의한 법령을 공포하고, 제정하는 자들아
2 빈궁한 자들을 불공평하게 판결하고,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들을 약탈한 자들아(10:1-2 사역)

10장 1절의 첫 외마디, ‘화 있으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호이’(הוי)는 심판의 징조를 이끄는 말이다. 임박한 야훼의 심판의 표상으로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거두지 않고 심판의 ‘손을 펴셨다’(ידו נטויה)(미주 10)는 이사야 5장 25절은 그 앞에 ‘호이’라는 말을 무려 6번이나 반복하며 강조한다(5:8,11,18,20,21,22)(11). 심판받을 ‘호이’에 해당하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자들이다. 가난한 이들을 약탈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더욱 더 채워나가는 자들(8절), 거짓으로 불법을 자행하는 자들, 곧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하는 자들(18-20절)이다. 이들은 뇌물을 받고 악인을 의롭다 하고, 정의를 짓밟는 자들이다(23절). 보다 더 구체적으로 여기 10장 1절 이하에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이다(10:1-2).

이사야 3장에서 야훼가 직접 가난한 자들을 짓밟는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재판관의 모습으로 비추어졌다면, 이사야 11장에서는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모습 역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정의로운 재판을 하러 오시는 모습이다. 이는 바로 앞 장인 이사야 10장에서 불의한 법제정과 법정의 불의에 대한 고발의 결과인 셈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상징인 ‘이새의 뿌리에서 새 싹’(11;1), 그에게 ‘야훼의 영’(רוח יהוה 11:2)이 내릴 것이며, 그가 오는 목적은 재판을 위한 것이다(11:3-4). 그의 재판은 단지 거짓 증언으로 인해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는 그런 불의한 외식적인 판결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의 판결이다(11:4). 이사야 61장은 ‘야훼의 영’과 메시야(기름부음) 그리고 사회적 약자(12)를 위한 정의 실현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1 주 야훼의 영(רוח אדני יהוה)이 내 위에 임했다. 야훼가 나에게 기름(משח)을 부으셨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려고 나를 보내셨다.
마음이 상한 자를 싸매어 주려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려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려고,
2 야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61:1-2 사역)

이른바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13)에서도 이상에서 언급한 메시야적 사명이 야훼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것임이 동일하게 나타난다. 첫 번째 ‘종의 노래’인 이사야 42장에서 ‘야훼의 종’은 ‘나(야훼)의 영이 그에게’(רוחי עליז) 내리고(1절), 이는 ‘민족에게 공의’(משפט לגוים)를 전하기 위함이다(1, 3, 4절). 이는 6절의 익명의 야훼께 부름 받은 자와 동일하다.(14) ‘민족의 빛’(לאור גוים)(미주 15)이 된다는 것은 그가 곧 야훼의 정의를 세우기 위함이다(6절 אני יהוה קראתיר בצדק). ‘야훼의 종’을 ‘백성의 계약’(לברית עם)(16)과 ‘민족의 빛’(לאור גוים)으로 표현하고 있는 42장 6절 이하는 49장 3절에서 9절까지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백성의 계약’(42:6; 49:8b)과 ‘민족의 빛’(42:6; 49:6)이 함께 짝을 이루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42장 7절과 49장 9절에서 ‘야훼의 종’은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을 이끌어내는 안내자로서의 역할(17)을 담당한다. 이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야훼의 영’과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야의 역할을 말하는 이사야 61장의 모습과 동일하다. 이사야서 전체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선포와 함께 ‘빛’(אור) 모티브는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18)

‘야훼의 종’으로 하여금 온 민족에게 야훼의 ‘정의’를 행사하는 것은 종국에 온 민족들로 하여금 야훼께 찬양을 돌리고 그의 영광을 찬송케 하는 것이다(42:10-12). 42장의 종의 노래와 연관되는 49장의 종의 노래에서도 그 마지막은 온 열방이 몰려오는 이미지이다(49:22). 이는 이사야서 마지막에서 온 열방 나아가 모든 혈육이 매월 초하루와 안식일에 야훼께 경배하러 올 것임을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66:23).

미주

(미주 1) ‘하늘과 땅’은 이사야서 전체에서 야훼가 곧 ‘하늘과 땅’의 창조주임을 증언하는 것과 관계한다(37:16; 42:5; 44:24: 45:8,12,18; 51:13,16). 창조주 야훼는 ‘하늘과 땅’에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44:23; 45:8; 48:13; 49:13). 구약성서 내에서 야훼 하나님과 ‘하늘과 땅’의 관계는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그의 창조세계 전체를 관활 하신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참고, 신 3:24; 4:39; 왕상 8:23; 사 49:13; 66:1; 렘 23:24; 시 96:11; 113:6; 대상 29:11).

(미주 2) 이에 대해서는 Park Kyung Chul, Die Gerechtigkeit Israels und das Heil der Völker: Israel und die Völker im bezug auf die Themen, "Kultus-Tempel-Eschatologie und soziale Gerechtigkeit" in der Endgestalt des Jesajabuches, BEAT vol. 52, Peter Lang: Frankfurt a.M., 2003, 한글로 요약 정리된 것으로는 박경철, “이사야서 최종형태 구성의 신학“이스라엘의 정의와 민족들의 구원: 이사야서 최종형태에 나타난 제의, 성전, 종말론, 사회정의 주제들과의 관련 속에서 살펴 본 이스라엘과 민족들”, Hermeneia today Vol. 31, 2005, 4-14를 참고하라.

(미주 3) 특히 이사야서 제일 첫 장과 마지막 장은 단지 이 두 단어 ‘하늘과 땅’만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두 곳 모두 동일한 단어와 주제로 책의 처음과 끝을 연결 짓고 있다. 처음(1장)에 시온의 회복과 야훼의 ‘적대자들’에 대한 심판 언급은 책의 마지막 장(66장)에 동일하게 나타난다(1:28; 66:24).

(미주 4) 이사야서에 나타난 ‘새 하늘 새 땅’이 이사야서 전체 신학과 관련해서는 특히 박경철, “제2종교개혁을 지향하며 바라보는 새 하늘과 새 땅”, 『한 권으로 읽는 구약성서』, 135-152 및 박동현,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니: 이사야 65장 17-25절”, 「성서마당」 40 (한국성서학연구소, 2000) 33-36; 민영진, “새 하늘과 새 땅 이사야 65:17-25”, 「성경연구」 41 (한국성경연구원, 1998) 73-83를 참고하라.

(미주 5) 이사야서 13장부터는 ‘경고’로 시작하는 열방신탁 본문으로 이사야서의 큰 첫 단락은 1장에서부터  12장까지이다. 이 단락에서의 이스라엘의 ‘정의’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김래용, “이사야1-12장에 나타난 거룩과 정의”, 「구약논단」 60 (한국구약학회, 2016) 38-65을 참고하라.

(미주 6) 고아와 과부는 구약성서에서 경제적으론 극빈자들이며, 정치,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로 언제나 가장 우선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특별 대상이다(출 22:22; 신 10:18; 14:29; 16:11; 24:17-21; 26:12f.; 27:19; 시 68:5; 146:9; 렘 7:6; 22:3; 겔 22:7; 슥 7:10; 말 3:5). 참고, Thomas Krapf, “Traditionsgeschichtliches zum deuteronomischen Fremdling-Waise-Witwe-Gebot”, VT 34(1984), 87-91;  R. Kessler, “Die Rolle des Armen für die Gerechtigkeit und Sünde des Reichen. Hintergrund und Bedeutung von Dtn 15,9; 24,13.15”, in: F. Crüsemann u.a.(Hg.), Was ist der Mensch ...? Beiträge zur Anthropologie des Alten Testaments(Festschrift Wolff), Kaiser Vgl.: München, 1992, 153-163.

(미주 7)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가난한 자들을 짓밟고 그들의 얼굴에 맷돌질을 한 자들이다(참고, 암 2:6-7; 8:4). 이사야 5장 8절은 이들의 불의한 탈취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미주 8) 참고, Willy Schottroff, “Das Weinberglied Jesajas, Jes 5:1-7: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r Parabel”, ZAW 82(1970), 68-91. 문학적 양식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Rüdiger Bartelmus, “Beobachtung zur literarischen Struktur des sog. Weinberglieds(Jes 5,1-7): Möglichkeiten und Grenzen der formgeschichtlichen Methode bei der Interpretation von Texten aus dem corpus propheticum”, ZAW 110(1998), 50-66.

(미주 9) 사회 약자들에 대한 가진 자들의 뇌물에 대한 이사야의 고발과 비판은 누구도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회 약자들을 위한 보호 장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크뤼제만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온 법에 대한 연구에서, 보복보다는 서로 화해할 수 있는 장치들을 가지고 있는 계약법전(출 20:22-23:33)안에 탈리온법이 들어오게 된 삽입 시기를 주전 8세기 이스라엘의 위기 상황과 연관시킨다. 특히 8세기 예언자들의 사회 비판과의 비교를 통해, 본래 화해를 목적으로 했던 미쉬파팀 법전이 권력자들에 의해 오용되었음을 밝힌다. 가진 자들, 돈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위법에 대해 돈으로 해결 할 수 있었다면, 반면, 힘없는 자들에게는 그런 법조항들은 오히려 옥쇄가 되어갔다는 것이다. 이를 예언자들이 비판했고, 그런 불의와 오용을 막고 힘없는 자들을 돌보아야 하는 법의 필요가 바로 탈리온법이 삽입되게 된 결정적 이유라는 것이다. Frank Crüsemann, “Auge um Auge...”(Ex 21,24f). Zum sozialgeschichtlichen Sinn des Talionsgesetzes im Bundesbuch, in: EvTh 47(1987), 411-426; 프랑크 크뤼제만, “계약법전에 나타난 탈리온법의 사회사적 의미”, 박경철 역, 「신학사상」 2001/겨울호, 특집: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대화, 115호, 한국신학연구소, 2001, 12, 127-154.

(미주 10) 이는 5장에서 10장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반복구를 사용하는 것은 이 본문이 같은 주제로 한 단락으로 묶여 있음을 보여준다. 5:25; 9:11, 16,20; 10:4 לא־שב אפו ועוד ידו נטויה

(미주 11) 5장의 포도원의 노래‘는 27장 2-6절에 다시 한 번 ‘포도원의 노래’가 나오고 이어지는 28-33장의 ‘호이’ 단락에도 5장과 같이 ‘호이’가 6번 나온다(28:1; 29:1,15; 30:1; 31:1; 33:1). 첫 번째 5장의 ‘포도원의 노래’는 포도원인 이스라엘의 범죄와 심판을 그리고 있다면, 두 번째 ‘포도원의 노래’(27장)는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과 구원을 약속하는 장면이다.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쓰인 열방에 대한 심판 암시(27:4-5)와 함께,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려 했던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며, 그 안에 심판을 면한 남은 자들이 있다(27:7, 참고 1:9; 6:13)고 언급한다. 아울러 이스라엘의 심판의 목적이 그들의 죄악이 사함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내비친다(27:8-9).

(미주 12) 사 61:1-4에 언급된 이들의 출신(전쟁포로, 노예, 도망자, 빚으로 노예된 자, 또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는 Klaus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im Tritojesajabuch, WMANT 62,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90, 108이하를 참고하라.

(미주 13) 일반적으로 ‘종의 노래’에 속하는 본문은 42:1-4; 49:1-6; 50:4-9; 52:13-53:12 라고 본다. Werlitz는 ‘종의 노래’라는 분류의 근거가 그 ‘양식개념’(Gattungsbegriff)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데 모아놓은 ‘수집개념’(Sammelbegriff)이라고 말한다. J. Werlitz, “Vom Knecht der Lieder zum Knecht des Buches. Ein Versuch über die Ergänzung zu den Gottesknechtstexten des Deuterojesajabuches”, ZAW 109(1997), 30-43, 30 주 1. ‘종의 노래’에 대한 논의들과 가설들에 대해서는 위의 논문 30-34, 그리고 같은 이, Redaktion und Komposition, Zur Rückfrage hinter die Endgestalt von Jesaja 40-55, BBB 122, Philo: Berlin, 1999, 특히 26-39를 참고하라.

(미주 14) Haag 역시 1-4절과 6절을 연결해서 보고, 6절의 익명의 부름 받은 자와 1절 야훼의 종을 동일인물로 본다. 그러나 그는 이 모두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또한 야훼의 종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라고 보는 K. Elliger의 견해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E. Haag, “Bund des Volkes, Licht der Heiden(Jes 42,6)”, in: J. Blank u. G. Hasenhüttl(Hg.), Glaube an Jesu Christus. Neue Beiträge zur Christologie, Patmos-Verlag: Düsseldorf 1980, 31. 크뤼제만은 이스라엘중 하나가 종이 되는 것 자체가 바로 이 백성을 위해 베리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바로 그 종안에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하나님의 계약이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화육)(verkörpert)이라고 본다. F. Crüsemann, “Ihnen gehören ... die Bundesschlüsse(Röm 9,4). Die alttestamentliche Bundestheologie und der christlich-jüdische Dialog”, in: KuI 9(1994), 21-38.

(미주 15) 이사야서 전체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선포와 함께 “빛” 모티브는 자주 등장한다. 2:2-5; 5:30; 8:20; 9:2; 13:10; 30:10.26; 42:6; 45:7; 49:6; 51:4; 58:8; 59:9; 60:1.3.19-20; 62:1. 42:6; 58:8 그리고 59:9에서는 ‘빛’이 ‘정의’라는 용어와 함께 쓰이고 있다(cf. 49:6: ‘빛과 구원’; 51:4: ‘빛과 공의‘; 59:9: '빛’, ‘공의’, ‘정의’).

(미주 16) 이사야서에 나타난 ‘계약’의 의미에 대해서는 박경철, “이사야서에 나타난 베리트의 신학적 의미 1”(Theological Meaning of berIt in the Book of Isaiah (I), 「구약신학저널」, (The Journal of Old Testament Theology) 제6호, 서울: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1, 352-372; “이사야서에 나타난 베리트의 신학적 의미 2”(Theological Meaning of berIt in the Book of Isaiah (II), 「구약신학저널」(The Journal of Old Testament Theology) 제7호, 서울: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2, 53-86를 참고하라.

(미주 17) 42장 7절에 쓰인 ‘이끌어내다’(להוציא)라는 용어 때문에 본문에서 포로지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낸다는 출애굽 모티브를 보여준다는 논의들이 있었다. Lohfink는 이것이 ‘출애굽유형론’(Exodustypologie)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지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엑소더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N. Lohfink, “Bund und Tora bei der Völkerwallfahrt. Jesajabuch und Psalm 25”, N. Lohfink u. E. Zenger, Der Gott Israels und die Völker. Untersuchungen zum Jesajabuch und zu den Psalmen. SBS 154, Katholisches Bibelwerk GmbH: Stuttgart, 1994, 37-83, 50. 그러나 Ruppert는 종의 사명은 분명 정치적인 것이라고 보고, 이는 어떤 집단(kollektiv, 이스라엘)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가진 자가 좁은 의미에서든지 아니면 보다 큰 어떤 의미의 정치적 해방을 이끄는 것이라고 본다. L. Ruppert, “Das Heil der Völker(Heilsuniversalismus) in Deutero- und »Trito«- Jesaja”, MThZ 45(1994), 137-159, 143. 그러나 62장 2절과의 관련성에서 비추어 볼 때,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이 표상은 포로기 이후시대 사회적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이 견지에서 현 본문 스스로 언급하는 그대로 아주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시 말해 본문에 언급된 그대로 읽으면, 부정과 불의에 의해 감옥에 갇힌 자들이 야훼의 종을 통해 공의와 정의로 감옥으로부터 풀려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미주 18) 2:2-5; 5:30; 8:20; 9:2; 13:10; 30:10.26; 42:6; 45:7; 49:6; 51:4; 58:8; 59:9; 60:1.3.19-20; 62:1. 42:6; 58:8 그리고 59:9에서는 ‘빛’이 ‘정의’라는 용어와 함께 쓰이고 있다(cf. 49:6: ‘빛’ 과 ‘구원’; 51:4: ‘빛’과 ‘공의’; 59:9: ‘빛’, ‘공의’, ‘정의’).

박경철 교수(한신대 구약학)  otrek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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