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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단지회 배후 지도자, 항일투사 김치보 연보이름없이 조국을 위해 살았던 사람
이이소 | 승인 2018.12.01 20:31

고향 기억은 꽃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꽃밭은 봄의 매화부터 시작하여 가을 국화에 이르기까지 각종 꽃으로 아름다웠다. 우리 동네 대부둑과 들길 또한 크고 작은 꽃이 연이어 피고 지었다. 나는 꽃을 좋아하였고 꽃씨 받는 것을 좋아하였다. 또한 어디를 가든지 꽃씨를 받아서 소중히 간직하였다.

장미와 찔레

봉숭아와 채송화, 매화나 국화는 누구나 다 좋아하고 가까이 하지만 들판에서 제 멋대로 자라는 개망초와 기생초, 씀바귀와 쑥부쟁이, 냉이와 개쑥, 우슬초와 명아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둠벙에서 자라는 부레옥잠, 개구리밥, 마름, 개수련를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던 못 하던 간에 꽃은 모두 고향의 일부였으며 그 이름조차 모르는 꽃이라 할지라도 분명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다.

사람은 자기의 취향이나 시각, 가치관으로 평가하며 특정한 꽃을 애호하지만 꽃은 인간의 선호와 이해타산을 넘어서 스스로 존재하며 거대한 생태환경을 말없이 쉼 없이 이루어 간다. 자연이 생태환경을 형성하며 보전하고 이어 가는데 있어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꽃이란 없다. 어느 꽃이나 다 같이 소중하고 귀하다. 꽃들은 타고난 대로 자기 몫을 묵묵히 감당한다.

항일투사 김치보, 화려한 꽃에 숨겨진 아름다운 꽃

독립투사도 마찬가지다. 안중근 의사를 태두로 하여 홍범도, 윤봉길, 이봉창, 강우규, 김상옥, 김원봉, 김구, 안창호 등등 큰 별들이 독립운동 역사 생태계 속에서 찬연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 찬연한 빛에 눈이 부셔서 다른 별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별들이 있다. 숨겨져서, 가려져서, 묻히어져서, 망가져서 제대로 빛이 나지 않는 별들이다. 항일투사 김치보도 바로 그런 인물 중의 한 분이시다.

▲ 독립운동가에 노인들의 의열투쟁을 이끈 독립운동 지도자 김치보 선생. ⓒ국가보훈처

우리는 1909년 연추 하리에서 12명의 독립지사들이 모여 손가락을 단지한 후에 피로 「대한독립」이라고 쓴 혈서를 기억한다. 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을 발하고 있는 혈서와 단지동의회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어 준다. 거의 모든 한국인들은 그 혈서를 남긴 그 단지 동맹의 주도자를 추호도 의심 없이 그대로 안중근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그가 주도자가 아니라 한 명의 애국 열혈 청년으로 적극 참여한 자라고 볼 수도 있다. 후대의 기록들이 안중근의 주도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조금은 개연성이 있는 흔적들은 찾아 볼 수 있다.

안중근은 성당의 일과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접고 망명을 일찍 결심하게 된 동기를 『안응칠 역사』에서 기술하며 “김진사”를 언급하고 있다.

어느 날 한 분이 나를 찾아 왔다. 그의 기상을 살펴보니 위풍이 당당하여 자못 도인의 풍모가 있었다. 성명을 통해 보니 그는 김진사였는데 그는 다짜고짜 나를 충고하려드는 말투였다.

“나는 본시 그대 부친과 친교가 두터운 사람이라 특별히 찾아온 걸세”
“멀리서 오셨는데 어서 여기 앉으셔서 좋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나는 자리를 권하면서 정중히 여쭈었다.

“그대의 기개를 가지고 지금 이같이 나라 정세가 위태롭게 될 때에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려하는가?”

사뭇 나무라는 말투였다. 예사 분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무슨 계책이 있겠습니까?”

나는 간절한 심정으로 물었다.

“지금 백두산 뒤에 있는 간도와 러시아 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조선인 백여만 명이 살고 있네. 그러니 그대 재주로 그곳에 가면 뒷날 반드시 큰 사업을 이룰 것일세.”

선생의 사업이란 말 속에는 나라를 위해 할 일을 함축하고 있었다.

안중근의 “김 진사”는 누구였을까

박환은 그의 저서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망명을 제시한 김 진사를 최재형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안중근 의사가 그가 이끄는 동의회 발기회에 참여했고 동의회와 창의회가 연합해 국내진공작전을 벌일 때 우영장으로 참여했다는 것을 꼽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항일 운동가들이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이동한 후에 대표적인 자산가였던 그의 신세를 졌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또한 거사 후에 「대동공보」에 최재형이 쓴 글과 그의 딸이 안중근의 어머니가 자주 자기 집에 왔다고 한 말을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동의회와 창의회가 연합의병부대를 창설하고 총독 김두성, 대장 이범윤을 세운 것을 주목하며 김두성이 다름 아닌 김 진사, 바로 김치보일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리광인은 『겨레항일지사들 1』 김치보 편에서 안중근 거사의 배후로 김치보와 단지동맹을 주목한다.

김치보와 그의 동지들인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 황병길 등이 신한촌 덕창약국에 모여 이또 히로부미를 암살할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어 김치보를 총지도로 하는 이또 히로부미 암살지휘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또 히로부미의 할빈행이 어느 길인지가 밝혀지지 않아 그들은 3개 소조로 나뉘여 할빈, 장춘, 심양, 수분하 쪽으로 가서 대기하기로 결의하였다. …

사실 알고보면 “단지혈맹”도 의문점이 없지 않다. 김치보의 집에서 그의 “한민회” 수하에서 활동을 벌린 안중근은 김치보와 19년 격차를 두고 있지만 안중근이 사전 토의도 없이 조막도끼로 먼저 외손 무명지를 자르고 “대한독립” 네 글자를 서명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박환이 김진사를 최재형으로 지목하며 안중근 대부로 보는 것보다 리광인이 김치보를 거사의 배후세력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첫째, 안중근의 최재형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다. 그는 최재형을 ‘러시아에 입적한 인사로 한국을 생각하는 지성은 한국인과 다르고 엄인섭처럼 친하지 않으며 우리를 경시하고 상담에 불응하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먼 길을 찾아 와서 다짜고짜 안중근에게 망명을 권한 김진사와 면모가 아주 다르다.

둘째, 얀치혜 군대의 어용 상인으로서 사업에 분주한 그가 1906과 1907년 전후에 무명의 청년 안중근의 망명을 촉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셋째, 9살에 러시아로 이주한 최재형을 도인의 풍모가 있는 김 진사로 칭하기는 어렵다.

넷째, 안중근 거사 당시 최재형은 최봉준, 김병학 등과 함께 「대동공보」를 지원해주었지만 실제적인 사장은 유진율이었다. 또한 안중근은 회령전투 패배 후 최재형의 신뢰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이 말하는 김진사가 김치보일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첫째, 안중근의 고향 해주와 김치보의 고향 평양은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김성준(김치보의 본명)은 같은 서북인사로서 안중근의 부친과 아는 사이일 가능성이 높다.

둘째, 김치보가 1905년 을사늑약 후, 관직을 버리고 망명을 결심하며 안중근의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망명을 권했을 수 있다.

셋째, 안중근 의사가 김 진사를 만난 것을 1906년에서 1907년 사이의 일일 것이다. 아무리 그가 옥중에 있다할지라도 겨우 4, 5년 전에 만난 사람의 이름을 잊었을 리 없다. 그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과 옥중에서 인물을 평가할 때 김치보의 이름을 빠트린 것은 그가 동지이기 때문이며 그를 비롯하여 여러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한 안중근 나름의 최선의 안배였을 것이다.

넷째, 김치보는 여러 개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현재 밝혀진 바로는 김성준(본명), 김치보(러시아), 김감령(중국 훈춘) 등이 있다. 동의회와 창의회 연합의병부대 대장으로 선출된 김두성도 그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다섯째, 김치보가 안중근 거사의 배후세력이라고 말하는 중국 측의 자료가 있다는 것은 최재형을 배후세력으로 보는 시각과 안중근의 법정 구술과 자료를 근거로 해서 단독 영웅적인 거사로 보고 있는 한국측의 자료를 보다 더 심도 있게 검증해야 한다는 말일 수 있다. 김치보가 안중근 거사의 배후세력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김치보의 연보를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

항일투사 김치보(1860-1941년) 연보 재구성

1. 러시아 연해주의 “한민회” 회장이었으며 “노인단” 단장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2. 1860년 음력 9월 17일 평양에서 출생했으며 조선에서는 “김성준”, 만주와 러시아에서는 “김감령”으로 불렸다.
3. 조선 말기에 평양군수와 종성군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4.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군수직을 사임하고 러시아 연해주 신한촌으로 가서 “한민회”를 만들고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한민회” 본부는 그가 독립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개업한 “덕창약국”에 두었고, 그는 “한민회” 재무, 행정, 무기 공급을 담당했다. 당시 주요 회원은 안중근, 우덕수,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등이었다.
5. 1906년 4월, 이상설과 이준의 헤이그 행을 위하여 경비를 지출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역을 떠날 때 환송을 하였다.
6. 1909년 1월 1일, 김치보를 비롯한 11명의 회원이 연해주 연추 인근에 있는 카리란 마을(일설은 신한촌)에 모였다. 그들은 1908년의 자신들의 국내진공활동을 평가하고 1909년 항일무력투쟁을 위하여 결사대 조직, 군자금 모금하기로 결의했다. 그 자리에 모인 12명은 전원이 호응했고 그 결과로 그 유명한 단지동맹이 결성된다.

김삼웅의 『안중근 평전』에는 회원 명단에 김기룡,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백규삼, 황영길, 조웅순, 김천화, 강창두 등이 나온다. 같은 책 211쪽에서는 우덕순도 단지동맹원이라고 밝힌다. 모든 안중근전이 안중근이 먼저 왼손의 무명지 손마디를 자르고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썼고 그 후에 다른 11명도 함께 단지를 하였다고 한다.

동의단지회 취지문

동의단지회 취지문은 문장이 아주 잘 가다듬어져 있다. 내용도 술 한 잔 마시고 시를 읊듯이 그렇게 쓸 수 있는 내용이 결코 아니다. 충분히 고민하며 마음과 생각을 나눈 사람들의 비장한 결심과 결단이 합해진 것이다. 아무리 애국애족의 호소라 할지라도 누가 감히 말 한 마디에 손가락을 자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취지문은 대충, 초반부에서는 국가의 위급과 생민의 생활이 멸망지경에 이르렀음을 토로하며 국가 회복의 방법이 없다, 좋은 때가 올 것이다. “외국이 도와 줄 것이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한다. 이어서 이천만 동포의 일심단결만이 살길이니 생사를 걸고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하라고 권한다.

후반부에서는 말로만 애국하고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힌다. 진정으로 애국할 단체를 만들기 위해서 이름을 동의단지회를 만든다는 것을 천명했다. 또한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며, 일심단체라는 표시를 위하여 손가락을 잘라서 피로 맹세를 하며 마음 변치 말고 목적에 도달하도록 분투하자는 내용이다.

7. 1909년 7월, 이상설이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마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을 때 환영하였다.
8. 1909년 10월 20일, 이또 히로부미의 하얼빈 행 소식들은 단지동맹 회원들은 신한촌 덕창약국에 모여서 거사를 의넌하였다. 김치보,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 황병길 등. 그들은 3개의 조로 나누어서 할빈, 장춘, 심양, 수분하 쪽으로 가서 대기하기로 했다.
9.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거사 소식을 들은 김치보는 누구보다 기뻐했다. 안중근에게 망명을 권했고 단지동맹이 결성되도록 권면한 그로서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10. 1910년 8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항일투사들이 “성명회” 결성해 한일병탄의 부당성을 각국 정부에 호소하면서 한일병탄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의 선두에 유인석, 이범윤, 이상설, 김학만, 차석보, 김좌두, 김치보 등이 있었으며 김치보는 명실공히 성명회의 중심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힘을 합하여 “대동공부”에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했으며 각국 정부와 동포들에게 일본의 만행에 속지 말라고 호소했다. 병탄이후에도 김치보는 성명회 동지들과 함께 격문을 써서 러시아와 북간도에 배포했다.
11. 1919년 3월, 연해주에서 독립만세시위 운동에 열심히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2. 1919년 3월 이후, 김치보는 “노인단”을 결성하여 단장으로서 활동했다. 일본 정부에 독립권 환부를 요청하며, 이발, 정치윤, 윤여옥, 차대유, 안태수 등을 보내서 조선총독부에 독립요구서를 제출하고 종로에서 독립연설을 하게 했다.
13. 1919년 9월, 노인단원인 강우규를 파송하여 남대문역에서 사이또 총독을 저격하게 하였다.
14. 1922년 11월 15일, 극동공화국(원동정부)이 레닌의 소련정권에 통합되고 연해주의 항일투사들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15. 1923년, 소련공산당과 정부는 조선인 무장활동 금지령을 내렸고 항일투사들을 감금했다. 김치보도 감옥에 갇혔고 풀려나왔다. 김치보는 소련체제하에서 항일무장독립운동이나 독립운동단체들의 독자적인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64세의 노구를 이끌고 동지인 엄인섭과 함께 중소국경을 넘어 중국의 훈춘현 동흥진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이름을 “김감령”으로 바꾸었고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16. 1941년 11월 18일 사망했다. 그는 임종 시 아내와 자녀들에게 소련에서 가지고 온 종성군수 임명장, 혈서, 시, 여러 문건 등 50여점을 주면서 조선이 독립될 때 나라에 바치라고 당부했다.

에필로그

훈춘현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20여년 이상 조선과 연해주에서 독립투사로서 살아온 김치보 항일투사에 대한 자료가 참으로 빈곤하다. 기록이 없기 때문에 구전되는 이야기와 몇 개의 팩트 만으로 평전이나 위인전을 쓰게 될 때 한 인물에 대한 묘사가 저자의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김치보 항일투사를 통해서 여실하게 보았다.

실체는 분명하게 있었는데 남겨진 글이나 쓰여진 글이 없으므로 희미해졌고 희미하므로 보이지 않아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고 그러다 잊어지고 마는 항일투사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독립운동이라는 역사생태계를 만들어서 한국독립투쟁을 추동했던 유명무명의 모든 지사들이 오늘 한국의 뿌리임을 기억하며 꽃을 보듯이 몇 페이지 글로 남은 님들의 삶을 묵상하며 행간을 읽는다.

김삼웅, 박환, 리광인의 단지동맹과 안중근 배후 세력에 대한 글이 다 다르게 나오는 것이 참 안타깝다. 사실은 하나일 텐데 분명한 증거 자료가 없으므로 저자들마다 자기 자료에 작가적 상상을 발휘해서 글을 쓰게 되니 정신의 문제가 아닌 실제 사건도 다르게 기술되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김치보 항일투사가 소중하게 간직한 50여점의 독립운동 자료들이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잿더미가 된 사실이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조선이 독립되거든 나라에 바치라”고 유언하고 숨을 거둔 노 지사의 마음이 눈동자에 어린다. 그 소중한 자료와 유물들을 자녀들이 1968년 말 투쟁이 무서워서 불을 태워버렸다고 하니 참으로 가슴 아프고 면목이 없다.

참고서적

김삼웅, 『안중근 평전』, 시대의 창
이창호, 『보재 이상설 평전』, 빛나래 
리광인, 『겨레항일지사들 1』, 민족출판사
리정결 편저, 『안중근 연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 독립 운동사 강의』, 한울
박환,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이이소  yiso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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