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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 실패의 족보예수님의 족보(마 1:1)
이성훈 | 승인 2018.12.02 18:20

오늘부터 4주간 대림절 기간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단지 성탄절, 예수님 탄생 축하 기념일을 기다리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금 이 시대, 이곳에 예수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대림절이고, 우리는 우리 옆에 지금도 숨 쉬고 계신 예수님을 알고 깨닫게 되기를 바라며 기다려야 합니다.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꼭 이런 이유는 아닙니다만, 저희는 이 대림절 4주 동안 마태복음 1장과 2장에 나타난 예수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은 이런 이야기들을 자신의 교회에 전해주면서, 어떤 예수님을 기억하며 바라보았고, 또다시 오시기를 기다렸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족보에서 빠진 인물들

먼저 마태복음 1장 1-17절에 이르는 예수님의 족보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우선 성경 자체에서 찾을 수 있는 기본적인 이야기들부터 드리면서 시작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1장 2절부터 16절은 사실 읽기에는 지루한 ‘누가 누구를 낳고~’하는 내용들로 이어집니다. 저희가 조선 왕들의 이름을 ‘태정태세문단세..’하고 외우는 일도 상당히 어려운데, 예수님의 족보를 외운다거나 자세히 살피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대부분은 이미 구약성경에 등장한 이름들이기 때문에 가볍게 살펴보는 정도는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예수님을 포함하여 총 41명의 남성이 나타납니다. 여성을 포함하면 총 46명이 됩니다. 여기에서 약간 의아함이 생깁니다. 1장 17절에 보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에 잡혀갈 때까지 14대, 바벨론 포로기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라고 말하는데, 14곱하기 3은 42인데, 이름은 41명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겹쳐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셈을 할 때, 아브라함부터 다윗이 14대이고, 다윗을 제외하고 바벨론 포로기가 시작된 요시야 왕까지 세면, 13대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다윗이 다시 들어갑니다. 사실은 포로기의 시작점이 언제냐고 따진다면 이 문제도 애매합니다만,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는 14대가 맞고, 여고냐부터 예수님까지도 14대가 맞기 때문에 포로기의 시작점을 여고냐로 보고, 다윗이 중첩된다고 보는게 맞을 듯합니다.

‘여고냐’라는 이름은 좀 생소하실텐데, 헬라어로 ‘여고니야’인데 성경에서는 ‘여고냐’라고 번역합니다. ‘여고냐’라는 이름은 역대기, 에스더, 예레미야에서 나옵니다. 다만 열왕기하와 에스겔에서는 히브리어로 ‘여호야긴’을 사용합니다.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여호야긴’이라고도 하고, ‘여고냐’라고도 합니다. 이름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연구가 있겠지만, 가볍게 생각해본다면, 왕의 이름들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두 가지 다른 이름으로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고,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이름이 ‘시드기야’로 바뀌게 되는데, 이런 식의 이름 변경 과정에서 ‘여고니야’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족보는 정확한 족보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대는 역대상 2장에 나오는 족보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그나마 구약성경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에서부터 여고냐까지의 족보에는 삭제된 인물들이 있습니다.

우선 8절에 보면, 요람의 아들이 웃시야라고 나오는데, 사실 요람의 아들은 웃시야가 아니고, 웃시야가 요람의 뒤를 이은 왕도 아닙니다. 열왕기하 8장을 보면, 요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람’은 헬라어고, 히브리어로는 ‘여호람’입니다. 열왕기하에 등장하는 여호람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 엘리야와 맞선 일로 악명 높은 그 아합 왕의 딸인 아달랴와 결혼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호람이 죽고 다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여호람과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후가 아합 왕조를 다 쳐 죽일 때, 유다의 왕이었으면서 아합을 도우러 갔던 아하시야와 그의 형제들도 다 죽습니다. 그래서 그의 뒤를 아달랴가 넘겨받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공주였던 아달랴가 유다의 여왕이 된 것입니다. 

그걸 제사장 여호야다를 비롯한 몇몇이 반역을 일으켜서 아하시야의 아들인 요아스가 왕위를 잇게 됩니다. 그 다음 왕은 아마샤이고 아마샤의 아들이 웃시야입니다. 히브리어로 ‘아짜랴’이고 헬라어로 ‘욱시아스’, ‘웃사야’입니다.

또 이름만 줄줄이 나와서 복잡해 보입니다만, 결론적으로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우선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가 빠져있습니다. 참고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북왕국 왕 아합의 딸과 결혼한 왕으로부터 그 손자까지가 삭제되었습니다.

빠진 인물은 또 있습니다. 11절에 요시야의 아들이 나오는데, 사실 열왕기나 역대기에 따르면 요시야 시대에 바벨론 포로기가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실제 요시야의 아들은 ‘여호아하스’입니다. 또 ‘여호아하스’의 아들이 ‘여호야김’입니다. 열왕기하 23장을 보면, ‘여호아하스’는 이집트에 의해 석 달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 갇히는 신세가 되고, 이집트, 성경에는 애굽왕 바로 느고가 ‘여호야김’을 강제로 왕위에 앉힙니다. 이렇게 이집트와 연결된 두 사람도 족보에서 제거됩니다.

포로기 이후의 족보 내용은 스룹바벨 이후로는 그냥 창작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대상 3장에 포로기 이후의 족보가 나옵니다만, 역대기와 마태복음의 족보는 전혀 다릅니다. 사실 역대상에서 스룹바벨도 스알디엘의 아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기는 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그리고 외경인 에스드라스 1서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이라고 나오기 때문에 이런 점에 있어서 역대기의 족보가 더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는지, 마태복음의 족보가 더 많은 오류를 가졌는지는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Getty Image

여기에서 우리는 족보에서 빠진 인물들이 왜 빠졌는가를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열왕기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등장하는 아합의 집안과 연결되어 있는 인물들과 이집트에 의해서 왕위를 상실하거나 얻게 된 인물들이 족보에서 빠져있습니다.

너무 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이들을 뺀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오히려 이런 삭제가 이스라엘 역사를 대략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설마 마태복음의 저자 또는 저작 집단이 “어차피 우리 선교 대상은 이방인들이고, 걔들은 우리 역사 자세히 모르니까 대충 빼자” 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14대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차라리 중간에 다윗부터 요시야까지 14대로 계산하는 방식의, 다윗을 중첩시키는 방식을 쓰지 않으려면, 여호야김이던지 다른 누군가가 한 명 더 들어가는 편이 좋았을 것입니다. 왜 이들은 생략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다음의 이야기로 넘어가보려고 합니다.

족보에 들어간 인물들

이쯤에서 우리는 족보에 포함된 사람들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는 조금 이상합니다만, 과거의 족보라는 것은 다분히 남성들의 역사이기 때문에 남성의 이름만 들어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잘 알다시피 예수님의 족보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포함하여 다섯 명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마리아를 제외하면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이렇게 네 명이 나옵니다. 우리는 보통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은혜롭고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우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게 됩니다. 또한 이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간 강인한 여성들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밧세바의 경우도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이 족보에서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라고 쓰고 있는 점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열왕기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었던 밧세바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그녀가 임신하자 남편인 우리야를 전장에 내보내 죽게 했다는, 우리야의 아내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서열에 따라 왕이 되려고 했을 때, 선지자 나단과 결탁해서 자신의 아들인 솔로몬을 왕으로 만든 밧세바의 이야기입니다. 밧세바의 이야기는 뒷얘기가 또 있습니다. 왕이 되지 못한 아도니야가 후에 다윗의 마지막 후궁인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고 했을 때, 좋다고 찬성하며 이를 솔로몬에게 제시했다가 솔로몬에게 꾸지람을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밧세바는 솔로몬을 왕으로 만든 현명하면서 또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일개 장군의 아내였다가 왕의 후궁이 되고, 왕의 어머니가 된 뛰어난 여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렇게까지 훌륭하고 뛰어난 여성의 이야기로 읽을 수만은 없다고 봅니다. 게다가 마태복음이 굳이 ‘우리야의 아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에 있어서 공통점은 남성들의 범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굳이 ‘남성들’의 범죄라고 할 필요가 있느냐? 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굳이 그렇게 말하는 편이 맞습니다.

다말의 경우, 그녀의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고 자식을 낳은 여성입니다. 이때 다말이 잘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 유다의 잘못이 먼저이고 다말은 자신의 생존권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남편을 잃은 자신의 며느리에게 셋째 아들인 셀라를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형사취수제는 남편을 잃은 여성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입니다. 유다는 이 법을 지키지 않았고, 그렇기에 다말은 그런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라합의 경우 여호수아에 나오는 여성인데, 여호수아 2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정탐꾼 두 사람을 보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정탐꾼들은 여리고에 들어가서 정탐에 힘쓴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기생의 집, 즉 창녀 집에 가서 지냅니다. 물론 저희가 스파이가 나오는 영화나 소설을 보면, 이런 뒷골목에 몸을 숨기고 첩보활동을 하는 얘기들을 보게 됩니다만, 어떤 학자들은 이 정탐꾼들은 제대로 정탐 활동을 한 게 아니라, 그저 창녀의 집에 머물며 시간을 허비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런 뒷골목에서 몸을 제대로 숨기고 있던 것도 아니고 여리고 왕에게 들키기까지 합니다. 이들의 이런 행동은 결국 진멸해야 하는 여리고성의 사람들 중에서 라합의 집안을 살려두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룻의 이야기가 형사취수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를 받아준 보아스가 무슨 잘못이 있냐고 물을 수는 있습니다. 룻과 관련되어서 잘못을 범한 건 보아스가 아닙니다. 룻기 4장을 보면, 보아스가 룻의 기업 무를 자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실 룻에게는 보아스가 아니라 형사취수제에 따라 룻의 기업을 무를 사람이 따로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보아스가 그 책임을 가져가겠다고 하자 두말하지 않고 보아스에게 그 책임을 넘깁니다. 룻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 법이 얼마나 지켜지지 않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보아스 역시도 자신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이유로 룻에 대해서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기에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좋을 듯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야기를 그저 아름답고 은혜로운 이야기로만 본다면,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다윗의 실수와 회개라는 주제로 읽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잘못했을 때에 회개하면 된다는 식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만 말씀을 읽게 되면, 사무엘하 12장에 다윗이 받은 벌, 밧세바와 낳은 첫 번째 아이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지나쳐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잘못, 그들의 죄악은 아무런 죄가 없던 한 아이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들의 잘못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그들의 죄악 문제를 단순히 다윗이 회개하고 용서받았다는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범죄와 실수의 역사

저는 마태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이 족보에 담긴 역사, 족보가 담고 있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행한 지난날의 실수와 범죄의 역사라고 봅니다. 초대 교부인 어거스틴은 이 족보가 41대로 기록된 이유가 예수님 직전인 요셉까지 40대를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40이라는 숫자는 광야 고난의 기간을 의미하는 숫자이며, 예수님을 통해 고난이 끝났음을 선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40은 그저 고난을 의미하는 숫자가 아닙니다. 40은 ‘온전해짐을 위한 고난’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공생애에 앞서 40일간 금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만, 온전해진다는 의미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은 완전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광야 40년을 다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왜 40년 광야생활을 했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가나안 정탐 40일로 인해서 40년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즉 광야 40년은 불신으로부터 온전하여져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갖기 위한 40년입니다.

저는 마태복음이 시작에 왜 족보를 넣고 있으며, 그 족보 내용을 수정하거나 첨가하면서 40, 혹은 41이라는 숫자를 맞추고 있는가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불신과 불순종의 역사를 깨뜨리고 예수님 안에서 믿음과 순종의 역사를 써내려가자”는 마태복음 저자 또는 저작집단의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은 그저 우리가 생일잔치를 기다리듯이 기쁜 날을 기다리는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기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림절 기간, 우리의 지난 모습을 떠올리면서, 때때로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우리의 모든 것을 회개하고 참된 신앙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기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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