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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2018년 교회 여․남 평등주간 말씀
NCCK | 승인 2018.12.10 01:48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여성위원회는 2000년부터 UN 세계인권선언일(12월 10일)이 있는 주간을 교회여․남평등주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주간에는 한 해 중 뜨거웠던 이슈, 교회여성들이 직면했던 과제 혹은 함께 풀어내야 할 주제를 정해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특별히 2016년부터는 교회 성폭력 근절과 성정의 회복을 위해서 소책자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교회와 사회 내 만연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Me too, #With you 운동」에 기독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라면서 “교회 성폭력, 이제 그만”이라는 주제를 선정하였습니다. 사회 풍토 전반에 만연한 성희롱과 성폭력 문제를 개선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또 다른 2차, 3차 가해를 막기 위한 용기 있는 외침에 함께 하자는 취지입니다.
이 소책자에는 교회와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도전하고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오랫동안 세계교회가 전개하고 있는 “흑색 목요일 (Thursdays in Black) 캠페인” 소개문, 매일 함께 기도할 수 있는 6편의 기도문과 설교문 1편을 수록하였습니다.

* 집필진: 한국염 목사, 이은주 목사, 남궁희수 목사, 이영미 목사 
/ 마음을 모아주셨습니다.
* 올해 교회여·남평등주간은 2018년 12월 9일(일)~15일(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다말이라는 한 여성이 겪은 고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말은 다윗의 딸로 공주였으나 이복 오라비 암논에게 성폭력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일생을 비참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다말 이야기는 왜 성폭력이라는 것이 일어나는지,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주변에서 어떻게 사건을 처리하는지, 성폭력으로 고통 받은 여성들이 얼마만큼 참담한 삶을 사는지 잘 보여줍니다.

왜 성서는 다말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을까요? 다말 사건이 성서에 기록된 것은 성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음을 고발하고, 성정의를 실현하도록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성폭력에는 강간이라고 불리는 성폭행, 몸을 더듬는 성추행, 말로 음담패설을 하거나 상대 몸과 성을 비하하고 희롱하는 성희롱 등이 해당됩니다. 성폭력은 다말 경우에서 보듯이 사랑이라는 말로 은폐되지만, 욕정을 채우려는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이복 오라비 암논이 아름다운 다말을 보고 욕정을 품고, 꾀를 내어 꾀병을 알았고, 다말이 병문안을 오자 강간을 합니다. 다말이 암논에게 사정합니다. “오라버니, 이스라엘에는 이런 법이 없습니다. 제발 나에게 욕을 보이지 마십시오. 오라버니가 내게 이런 일을 하면 내가 수치를 당하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처녀를 욕보여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기어코 다말을 욕보입니다.

성폭력은 근본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성을 지배하려는 성 지배욕이 원인입니다. 암논 경우에서 보듯이 성폭력가해자들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합니다. 아동에게는 대부분 사탕을 주고 꾀거나 유인해서, 청소년에게는 돈과 물질 공세로, 여성에게 함정을 파서 힘으로 정복합니다. 암논에게서 보듯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폭력을 했다는 것도 핑계일 뿐 욕정을 채우려는 욕망이 컸고 그 욕망을 채우는데 권모술수와 힘을 뒷받침합니다. 암논이 다말을 욕망의 대상으로 보았듯, 성폭력은 사람을 인간이 아니라 성적 욕망의 도구로 보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가하는 범죄행위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성폭력 피해자가 그 사실을 알려도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가 침묵을 강요당하는 현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말은 자신이 무고하게 성폭력을 당했음을 율법에 따라 알립니다. 이스라엘 율법에서는 본질적으로 어떠한 형태의 성폭력도 금하고 있으며, 특히 근친에 의한 성폭력을 금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율법(신명기 22장 25절-27)은 “소리를 질러도 구하여 줄 사람이 없었을 경우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죄가 없고 가해자를 살인죄인으로 규정하고 반드시 책임을 묻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소리칠 수 없는 상황이란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저항할 힘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저항할 힘이 없어,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폭력을 당할 경우 피해자 잘못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성폭력을 당하면 당한 피해자가 문제가 있고, 잘못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성서에 의하면 성폭력 피해를 당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성폭력을 가한 사람의 범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까지도 성폭력이 발생하면 피해자 편에 서서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 입장을 두둔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Alexandre Gabanel, “Thamar”, 1875. ⓒWikipedia

강간을 당한 다말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고발하는 당시 법에 따라 머리에 재를 뿌리고 입고 있던 색동옷 소매를 찢고 목을 놓아 울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율법에 정한 바에 따라 성폭력 피해를 입은 것을 호소했습니다만, 다말을 보고 사태를 짐작한 오라버니 압살놈은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합니다. 비록 율법에서는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다말이 정조를 잃어버린 여성으로 비난받거나 암논을 유혹한 ‘꽃뱀’으로 간주되어 기피되는 현실을 압살롬이 알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율법이 정한 바에 따라 암논을 심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암논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말에게 돌아온 것은 침묵하라는 강요와 외면뿐이었습니다. 다말은 침묵을 강요당한 채 한 많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성서는 다말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말은 오라버니 압살롬 집에서 처량하게 지냈다.” “처량하게”라는 말 속에 엄청난 고통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다윗 역시 딸 다말이 암논에게 강간당한 것을 듣고서 몹시 분개했지만, 암논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자신이 밧세바를 성폭행한 경험 때문이었을까요? 그 후에 압살롬이 동생 다말에게 한 보복으로 암논을 죽였을 때는 입고 있는 옷을 찢으며 누워버립니다.

만일 다윗이 율법이 정한 바에 따라 암논을 처벌했다면 형제살인이라는 참사는 밀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권력으로 악을 덮으려 했기 때문에 더 큰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딸이 강간당했음에도 암논을 심판하지 않는 다윗의 태도, 암논이 다말에 대한 보복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애통해 하는 다윗 모습은 피해자 편에 서지 않고 가해자 편에 서서 사건을 바라보는, 가부장 사회의 단면을 여지없이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다말 이야기에서 우리는 한 희망을 봅니다. 다말 사건은 강간당하고 침묵당한 고난의 사건으로만 끝내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자기 딸 이름을 희생당한 고모 다말의 이름을 따서 ‘다말’이라고 지음으로써 억울한 다말의 고통을 기억하고 위로합니다. 성서는 성폭행당한 여성들의 고난을 묻어두지 않고 고발합니다.

다말뿐만 아니라 성서 속에 억울하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몇 차례 더 나옵니다. 들판에 놀러나갔다가 세겜에게 강간당한 야곱의 딸 디나, 집단강간당하고 죽은 레위인의 첩, 다윗에게 강간당한 우리아의 처 밧세바 등, 이렇게 성폭력으로 고통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성서가 전승하도록 한 것은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 법은 성폭력을 악이라 규정하고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악의 뿌리를 뽑기 위함이라고 증언합니다.

다말 사건은 이렇게 성폭력 범죄자를 처벌하지 않고 은폐하는 가부장사회의 잘못된 태도를 고발하고, 우리가 무엇을 경계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여인들의 한과 고난을 기억하고 전승하고, 이를 통해서 성폭력 없는 사회를 일구도록 촉구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말 이야기를 다시 상기하는 것은, 다말, 디나, 레위인의 첩, 밧세바 등 남성들에 의해 성폭행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 현장에서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동성폭력, 집단강간, 근친강간, 납치강간, 일본군성노예제가 보여주듯 전쟁 중에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 권력에 의한 성폭력 등, 성서에서 고발한 여성들에 가해지는 성폭력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찰조사에 의하면 살인, 강도 등의 범죄는 줄어드는데 유독 성폭력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동에 대한 성폭력과 청소년 성폭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학교폭력에서도 성폭력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어 6년 사이에 3배가 폭증했고, 카메라 등을 이용한 ‘몰카’나 온라인상에서 사진을 합성하는 등 비접촉형 성폭력이 늘어났다는 분석입니다. 데이트폭력 역시 급증해 주요 치안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성인 여성에 가해지는 성폭력도 심각한 수준에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폭력)범죄율이 현재 전쟁과 내전을 겪고 있는 나라들을 제외하고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높다고 합니다.

교회라고 해서 성폭력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경찰자료에 의하면 지난 5년(2011- 2015)간 전문직 성폭력 범죄 검거자 1,258명 중 종교인이 450명(35.7%)으로 가장 많은 수를 기록하고 그중에서도 개신교 목회자들에 의한 성폭력이 계속 증가추세를 보임에 따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합니다.

오늘도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 앞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성폭력 범죄자를 살인죄와 같은 중벌로 처벌하도록 정해져 있음에도 다윗 왕이 이 법을 무시했던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에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성폭력특별법이 엄연히 있지만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피해자 여성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성폭력 피해에 대한 고통도 문제지만, 성폭력 피해를 드러냈을 때 가해지는 2차 폭력이라고 합니다. 성폭력을 폭로해도 그 조직 안에 있는 자들이 조직 보호 차원에서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하고, 냉담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충격을 받고 입을 닫게 되며, 설령 드러낼 경우 되레 가해자가 부인하면 입증을 해야 하고, 무고나 명예훼손으로 고발되어 벌금형 받거나, 법정에 가도 피해자가 목숨을 걸고 저항한 증거가 없을 경우, 가해자가 처벌되는 사례가 드뭅니다.

최근 서지현이라는 여검사가 8년 전 동기 부친 상가집에서 고위상사에게 당한 성폭력을 고발했습니다. 성추행을 당하는 현장에 법무부 관계자들이 있었는데, 아무도 성추행을 말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성폭력 피해로 아이 유산, 발작, 극단적인 생각 등 여러 가지 고통을 겪었고 성폭력을 자기 잘못이라고 탓했다고 합니다.

서 검사는 인터뷰에서 “제가 범죄 피해를 입었고 또 성폭력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거의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닌가, 굉장히 내가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했구나 하는 자책감에 굉장히 괴로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와서 피해자분들께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제가 그것을 깨닫는데 8년 걸렸습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비단 서 검사만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를 입은 많은 여성들이 겪는 일입니다. 검찰 뿐만 아니라 상명하복이 중시되고 위계질서가 강한 폐쇄적인 조직문화에서는 문제가 일어나면 꽃뱀으로 몰리거나 가해자뿐만 아니라 피해자까지 함께 찍혀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이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도 용기를 내어 고발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경우가 많고 급기야는 자기 잘못으로 돌려버립니다.

교회 내 성폭력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반 성폭력피해 여성들이 겪는 고통에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 신고해서 주의 종을 해롭게 하면 벌 받을 텐데…. 내가 죄가 많아서…. 하나님이 계시기는 한 건가?”등등 신앙적인 면에서 위기까지 겪게 됩니다. 더욱 성폭력피해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네 탓’이라며 피해자 잘못으로 돌려버리는 주위 시선입니다.

지금 한국사회를 달구고 있는 뜨거운 성범죄 중에 문제가 되는 것이 ‘그루밍 성폭력’(grooming)입니다. 그루밍 성범죄란 피해자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이 피해자와 신분을 쌓고 피해자들이 심리적으로 의존할 수 있도록 세뇌하거나 호감을 주면서 지배관계를 만든 뒤 성적으로 가해행위를 하는 성범죄를 말합니다. 특히 어린이나 청소년을 정신적으로 길들인 뒤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근 인천 새소망교회 청년사역을 하는 김 목사가 여성신도들을 대상으로 그루밍 성폭력을 저질러서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미성년자들이었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목사를 신뢰하게 만들어 성희롱과 성추행은 물론 성폭행을 행했습니다. 전체 피해자는 26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제가 노출되자 김 목사는 목사직을 내려놓고 성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을 것, 피해자들에게 절대 연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각서를 썼지만 이행하지 않고 도피해버렸습니다. 피해자들은 김 목사의 목사직 사임과 공개사과, 교단의 헌법에 성폭력 처벌규정 명시, 피해자들에 해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성범죄는 대부분 이 분야의 성폭력에 속합니다. 목회자가 목회자에게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여성교인들에게 친밀감을 형성하고, 성서를 인용해서 신앙의 이름으로 저항할 수 없게 만들어 자행하는 성폭력은 그루밍 성범죄의 전형입니다.

서 검사는 자신이 고발하게 된 이유를 말했습니다. “피해자가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절대 스스로 개혁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또 “범죄 피해자나 성폭력 피해자는 절대 피해를 입은 본인 잘못이 아니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가해자가 최근에 종교에 귀의해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가해자는 서울 강남 모교회에서 회개하고 구원을 얻었다는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이 간증 때문에 서검사가 증언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서 검사의 말처럼 회개는 일차적으로 피해당사자에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에 귀의만 하면 모든 잘못이 다 용서받는 게 아닙니다. 잘못된 교회 가르침이 그런 파렴치한을 만들어냈습니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벌을 받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값싼 회개는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성폭력을 수사해야 할 검찰에서 동료를 상대로 성폭력이 발생했다는 서검사 증언은 검사와 같은 전문직 신분에서도 이렇게 성폭력이 발생하는데 일반에서는 얼마나 심하겠느냐?” 하고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고,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은 피해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 “Me Too!”운동과 “With You!” 운동을 촉발했습니다.

왜 이렇게 여아들과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이 끊이지 않을까요? 그것은 우리사회가 성차별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차별 사회는 자기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계층에 대해 무시하고 함부로 합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성폭력입니다. 힘 중심인 사회에서 남성들이 자기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힘을 무기로 힘없는 여성과 아동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는 인식,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성폭력은 여성을, 아동을 차별해서 생기는 잘못된 범죄이며 악임을 깨닫는 사회질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성폭력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유엔인권선언 1조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주창은 창세기 1장 26절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천부인권론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형상으로서 존엄한 존재임을,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엄한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어느 한 성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 형상을 차별하는 매우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기반으로 한 교회에서 성폭력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성정의와 더불어 우리가 신앙인으로 생각할 것 하나는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교회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만난 사람을 돕고 함께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성폭력피해자와 강도만난 사람으로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성폭력 가해자는 강도며, 피해자는 강도만난 사람입니다. 이제 성폭력피해자를 강도만난 사람으로 인식하고 위드유를 해야 합니다. 강도만난 자를 두고 피해간 바리새인이나 레위인처럼, 한국교회는 성폭력피해자를 외면하고 그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가 강도만난 이의 이웃이냐고 물은 초점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마리아인 비유의 핵심은 강도 만난 사람 편에 서는 것이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국제인권기준이 피해자 중심주의이듯이, 피해자의 편에 서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폭력 문제가 발생할 경우 피해자 중심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성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교단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성폭력 피해자의 편에 서기 보다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그 자리를 피해가려고만 합니다.

굳이 최후의 심판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강도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용납이 안 되며, 더더욱 강도의 편에 서서 성폭력 피해자를 외면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강도 만난 이를 여관에 데려다주고 회복할 때까지 보호토록 한 사마리아인처럼, 교회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회복하고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마리아인이 되고 여관이 되어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당신은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함께 하겠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할 ‘위드유’입니다.

▲ 한국염 목사

성서는 성폭력이 욕정을 해소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어떤 경우도 합리화될 수 없으며, 성폭력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잘못이 있고, 성폭력은 악으로서 가해자를 처벌해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폭력 가해자의 욕망을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성폭력피해자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편에 서서 지지하고 격려하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교회내 성폭력 문제는 비단 목회자나 종교지도자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없습니다. 성폭력 문제에서 우리 모두는 가해자이거나 피해자, 방조자이거나 방관자라는 점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말의 편에 서서 다말들에게 격려해야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Me Too!”에 한국교회가 “With You!, 응답해야 합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예요. 힘내세요, 함께 하겠습니다!” 이런 격려와 함께 성희롱과 성폭력이 만연한 문화풍토를 바꾸고 성폭력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합니다. 교회를 성평등교회로 만들고, 교회 안에 있는 성폭력을 추방하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교회가 자정될 때 그 힘으로 사회를 자정시킬 수 있고, 이 땅에서 다말의 울음소리가 그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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