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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2:1-4 롬13:8-14 마25:1-13)대림절 둘째주일
최병학 목사(부산노회, 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8.12.14 01:11

1. 밤에 우리 영혼은

『밤에 우리 영혼은』 (뮤진트리, 2016)은 감리교 목사의 아들이자, 노련한 이야기꾼인 켄트 하루프의 은밀하고도 위풍당당한 유언과 같은 작품입니다. 저자가 2014년 71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 탈고한 소설로, 가상의 작은 마을 홀트를 배경으로 칠십대의 두 주인공이 교감하는 믿음과 우정, 나이 듦에 대한 생각들을 특유의 잔잔하면서도 절제된 문체로 묘사하고 있는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영화로도 상영되었는데, 소설은 70살의 주인공 애디 무어(영화에서는 제인 폰다 분)가 오랜 이웃인 비슷한 나이인 루이스 워터스(로버트 레드포드 분)를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두 사람 다 배우자와 사별했는데, 애디는 루이스의 집 현관에 서서 마음에 담고 온 생각을 바로 말합니다.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와줄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당황한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뭐라고요? 무슨 뜻인지?”
그러자 애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둘 다 혼자잖아요. 혼자 된 지도 너무 오래됐어요. 벌써 몇 년째예요. 난 외로워요. 당신도 그러지 않을까 싶고요. 그래서 밤에 나를 찾아와 함께 자줄 수 있을까 하는 거죠. 이야기도 하고요.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걸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그렇죠?”

섹스 없이 함께 잠을 자자는 것, 어둠 속에서 대화하고, 함께 누워있음으로써 밤이면 더욱 생생히 다가오는 외로움을 달래보자는 말, 놀랍고 오해받기 십상인 제안이지만 루이스는 에디의 뜻을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함께 노년의 새로운 모험을 시작합니다. 외롭고 두려운 밤을 두 사람은 지난 추억을 이야기하며 따뜻하고 행복하게 보냅니다. 그러나 애디의 집을 밤마다 드나드는 루이스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오해하고 애디의 자녀에게 알립니다. 결국 애디의 아들, 진의 반대로 이 모험은 끝납니다. 소설 페이지 한 장 한 장 마다 잔잔한 울림이 남아 있고, 재미와 슬픔, 경쾌함과 사색이 웃프게 교차합니다. 단순하지만 심오한 주제에 층위를 변주함으로 노년의 아름다운 두 영혼의 품위와 용감한 모험을 더없이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은 밤의 무서움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아들 진의 반대로 루이스와 헤어져 아들네 집에 있게 된 애디가 창밖을 내다봅니다. 그때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너머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습니다. 불안에 떨던 애디는 루이스에게 전화로 이렇게 말하며 소설은 끝이 납니다. “당신, 거기 지금 추워요?”

어둠과 밤은 죽음과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죽음은 세상의 끝, 곧 종말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시간의 끝인 종말론에 관해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어둠과 밤, 죽음 등과 같은 언어들에 내포된 절망을 희망의 기대로 바꾸어 버립니다. 따라서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 밤에, 우리의 영혼은 두렵지만 함께 있음으로, 기다림으로, 사랑함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해준 것입니다.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2)의 공로도 있지만, 사실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 됩니다. 몰트만 이전까지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의 마지막 부록이나 역사의 먼 미래의 일로 간주되어 중요하게 다루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몰트만은 종말론이야말로 기독교 신학의 근거이자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몰트만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새 창조 등의 종말론 주제들이 기독교 전체가 말하는 신앙의 전부하고 생각했습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1967년 미국에서 출간됐을 때 「뉴욕타임스」는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 곧 ‘사신(死神)신학’은 ‘희망의 신학’ 때문에 기반을 잃어버렸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 기독교의 종말론은 다가올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지금, 내 삶에 대한 성찰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간과하고 ‘미래의 어느 때’인지, 혹은 ‘몇 명이 구원 받는가’에 대한 관심과 해명은 사이비 이단이자 기독교 신앙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잘 말했듯,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론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다른 세상의 시작입니다. 그 종말을 미리 맛보는 것이 ‘아기 예수의 오심(대림)’입니다. 그렇다면 아기 예수께서 오시는 이 인류의 절망적인 밤과, 동시에 기다림과 소망의 밤에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슬기 있는 자

마태복음 25장은 메시야가 오시는 세상의 종말에 관해 세 가지 비유를 들려줍니다. 따라서 ‘천국장’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 첫 번째 비유로 ‘열 처녀의 비유’를 들려주는데, 대림절에 어떻게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결혼식은 사막 지역이기 때문에 낮에는 뜨거워서 공식적으로 행하지 못하고, 해가 지고 시원해지는 밤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혼인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친구들이 순백색의 옷을 입고 들러리로 신랑 행렬이 올 어두운 길목을 등잔불(실제로는 헝겊뭉치에 기름을 묻혀 장대에 단 것으로 ‘횃불’에 가깝습니다)로 밝혔습니다. 이는 신랑을 신부의 집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이며 밤에 이루어지는 혼인식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혼인식의 비유를 통해 종말 때의 천국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마 25:1-10)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은 있으나 기름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랑이 왔을 때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집의 문을 열어달라는 이 다섯 처녀에게 “그런즉 깨어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기에 미리 준비된 이 다섯 처녀는 마침내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육신은 연약하여 미련한 다섯 처녀와 함께 잠을 잤지만, 기름을 준비한 것입니다. 천국은 비록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졸며 잠잘지라도, 기름을 준비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기름은(식물성 기름뿐만 아니라 동물의 기름도) 많은 정제과정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노동력이 가장 집약된 상품이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일은 어쩌면 결혼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등과 같은 겉모양은 있으나 그 등을 밝혀줄 기름이 없는 모습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더딜지라도 기다리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3.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신학사상 최고의 문화신학자인 폴 틸리히는 그의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 (대한기독교서회, 2001) ‘기다림’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둘이 다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여 있는 인간 실존을 기다림이라는 말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갈망하는 기다림을 그리고 있고 사도의 서신은 참을성 있는 기다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가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직 가지고 있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의 말을 빌린다면,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소원할진대 우리들은 그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감추어져 있고 자유롭고 측량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가장 절대적이요, 근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틸리히에게 있어서 기다림이란 ‘아직은 현실이 되지 못한 것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린다면, 기다리는 분의 능력이 우리 안에 이미 실현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좀 더 틸리히의 설교를 들어볼까요?

“우리들의 시대는 기다림의 시대입니다. 실로 기다림이란 현대의 특수한 운명인 것입니다. 모든 시간이 다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영원의 침입’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온 시간은 전진하고 있습니다. 온 시간은, 역사에 있어서나 개인의 생명에 있어서나 모두 기대(期待)입니다. 시간 자체가 바로 기다림입니다. 또 한 토막의 시간에의 기다림이 아니요, ‘영원한 자의 임재’에의 기다림인 것입니다.”

구약 본문의 선지자 하박국은 유다가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회개하기를 촉구했으나, 백성들은 완악하여 죄악을 길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박국은 이 상황이 얼마나 계속되어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 유다를 징벌하는 회초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박국은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1:13)”라며 따지듯이 묻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2:1)” 아주 작정을 한 모습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2-4)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유예하신 것이지, 그만 두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속히 이를 것입니다. 거짓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때에 교만한 자, 정직하지 못한 자는 심판받을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심판받았듯이, 교만한 바벨론이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게 멸망당했듯이. 그러나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정직한 자, 곧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4. 빛의 갑옷을 입자

따라서 사도 바울은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에 관해 오늘 서신서의 본문 로마서 13장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 그렇다면 빛의 갑옷은 무엇일까요? 먼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8).’입니다. 십계명의 사람에 관한 모든 계명은 바로 이 사랑의 계명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한다(14)’는 것입니다.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도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갑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함으로 그리스도의 옷, 곧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빛의 갑옷은 사랑으로 만든 옷입니다. 갑옷이지만 사랑으로 만들었기에 부드럽습니다. 따스합니다. 애디와 루이스는 이 갑옷을 덮고, 그 무수한 불면의 외로운 밤을 함께 의지하며 보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아기 예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시기 바랍니다. 늘 깨어 준비하여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갈망하는 그리움으로, 참을성 있는 기다림으로, 아직 현실이 되지 못한 희망을 예측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의 침입을 기다리며 영원한 자의 임재를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이렇게 우리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고 있습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편27:14)

최병학 목사(부산노회, 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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