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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오신 분평화의 왕(마 2:21-23)
이성훈 | 승인 2018.12.23 19:23

오늘은 대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살펴본 마태복음 1-2장의 말씀, 예수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의 마지막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우선 지난주까지 저희가 살펴봤던 내용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의 족보는 불순종과 불신앙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천사를 통해 이루어진 수태고지(受胎告知)는 ‘임마누엘’이라는 이사야 7장의 인용을 통하여,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전해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그저 복과 구원의 소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서 어긋난 길을 걸었을 때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에 마태복음의 ‘임마누엘’은 단지 ‘예수님 오셨으니까 이제 모두다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로 끝날게 아니라 이전까지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서 우리의 잘못을 돌이켜 회개하고, 구원의 임마누엘을 체험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주에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미가의 인용을 통해서 ‘왜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돌이켜 생각하도록 성경이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악한 일로부터의 돌이킴이 필요하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오늘도 이런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마태복음이 보여주는 탄생 이야기 마지막 부분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먼저 생각해볼 점은 마태복음 자체가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저자나 저작집단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런 복음서를 만들었는지 100% 확신 있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고 해석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대략적인, 그나마 저작 의도에 가장 가깝게 보이는 해석을 생각해볼 수는 있을 듯 합니다. 성경에서 마태복음만 떼어내 놓고 본다면, 마태복음 1-2장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구세주이자 참된 왕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다윗 왕조와 연결되어 있고, 천사가 나타나서 그의 탄생 예고와 함께 그의 탄생에 성령, 하나님의 영이 연결되어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거기에 하늘의 별은 왕의 탄생을 예고했고, 헤롯 왕국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 분이 다윗의 정통성을 잇고 있음을 또 한 번 확인해주었습니다. 헤롯과 예수님의 대립 구도는 과거 사울과 다윗의 대립 구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대립 구도 속에서 우리는 누가 참된 왕인가를 쉽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 헤롯대왕의 영아살해 지시를 피해 숨고 있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 ⓒGetty Image

게다가 과거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이 있는 지역인 동방에서 현자 혹은 왕에게 천기를 읽어주던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 앞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값비싼 선물을 바쳤습니다.

오늘 저희가 보고 있는 2장 13-23절의 말씀도 유사한 맥락입니다. 헤롯의 영아 살해사건이 일어나기 전,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은 천사의 경고를 듣게 되고, 온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애굽이라는 지명과 영아살해 사건이라는 두 가지를 통해서 우리는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영아살해 명령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오히려 애굽 공주의 양아들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포로에서 이끌어낸 인도자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보았을 때,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다윗의 정통성을 잇는 참된 왕, 인간의 육신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탄생된 영웅적 존재, 바벨론이나 페르시아의 고관들이 와서 고개를 숙일 정도로 높으신 분, 과거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와 같이 지금 이스라엘을 이끌고 갈 구세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자신의 이런 예수님 이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구약 예언서의 말씀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족보와 ‘임마누엘’의 인용까지는 어느정도 구약 성경의 전반적인 내용과 연결시켜서 해석할 만한 여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에 대한 인용이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인용구들은 구약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인용해 왔다기 보다는 그냥 그 몇몇 구절이 마태복음의 문맥상 적절했기에 따왔다고 보는 편이 훨씬 그럴싸해 보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나 저작집단이 구약성경의 말씀을 약간 억지스럽게 인용할 수 있는 배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인용하고 있는 예언서들의 말씀은 모두 앗수르, 바벨론과 같은 대제국에 의한 핍박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심판 이후에 구원할 자를 보내셔서 다시금 그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앗수르의 침략 다음에는 바벨론의 침략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의 속국이 됩니다. 잠시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때도 있었지만, 다시 마케도니아 군왕들의 속국이 되어버리고,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들은 분명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언, 하나님의 말씀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었다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약 예언서에 나오는 구원을 위해 보냄 받은 자와 관련된 모든 말씀은 모두 예수님을 향한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구원에 관한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고 여겼다면, ‘억지스러운 연결’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구약과 함께 해석되는 마태복음

그런데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완성되어 우리 손에 놓여있는 이 마태복음의 말씀은 단지 인용되어 있는 구약성경의 구절을 그 구절 하나만 읽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미 앞에서 읽었던 구약성경의 전반적인 말씀을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예언서의 말씀들이 ‘구원을 위해 보냄 받은 자’를 설명하기 위해 기록되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바꿔 말해 예언서의 예언들이 구세주인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한 참고서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예언서의 말씀들은 구원 또는 구세주보다는 ‘왜 심판을 받게 되었는가?’라는 주제에 집중합니다.

그렇기에 마태복음이 인용하고 있는 예언서의 말씀들을 보면서 우리는 당연히 ‘구세주’에 대한 설명을 넘어서 예언자들이 무엇을 경고했고, 어떻게 할 때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선포했는지까지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말씀도 그렇게 해석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마태복음의 저자나 저작집단이 원하던 해석 방식은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경전 속에 들어오게 되면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잇는, 신약성경의 첫 번째 자리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태복음을 구약성경과의 연결고리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이 경전으로 우리 손에 놓인 성경책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바입니다.

이런 의미 속에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은 1-2장에서 예언서의 말씀을 다섯 번 인용합니다. 그 중 네 번은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말이 붙어서 과거 예언자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루시기 위해 지금 예수님에게 이런 사건들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나머지 한 번은 지난주에 보았던 ‘베들레헴’ 인용구인데, 이 구절의 경우는 헤롯 왕국의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찾아서 읽은 구절이기 때문에 나머지 인용들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인용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마태복음은 구약과 신약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족보를 통해서 이미 구약성경 전체를 훑어주고 있기는 합니다만, 탄생 이야기의 스토리 속에서 다윗과 사울의 이야기, 모세 이야기와 같은 구약성경의 중심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고, 예언자들의 글을 인용함으로써 예언서의 핵심 또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태복음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서 두 가지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구약성경과의 연관성과 인용된 예언서의 말씀들이 보여주는 연관성입니다.

스토리가 보여주는 연관성은 앞선 마태복음의 의도에서 말씀드린 내용과 거의 맞닿아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참된 왕, 하나님께서 보내신 가장 높으신 왕이라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구약과 비교하며 읽었을 때, 약간의 차이야 있겠지만, 굳이 하나하나 따질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좀 더 생각할 내용은 예언서의 인용입니다. 이사야 7장과 미가 5장의 인용에 대한 설명은 지난 말씀에서 드렸습니다. ‘임마누엘’은 심판과 구원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는 이스라엘의 목자’는 앗수르로부터 멸망당한 이스라엘을 다시 재건할 존재를 의미하고, 미가는 이제 죄에서 벗어나 온전히 하나님 앞에 서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새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개의 인용이 더 나옵니다. 먼저 15절에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은 호세아 11장 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인용된 구절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제 구원하신다는 내용의 말씀 같지만, 사실 호세아 11장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온갖 죄를 다 지었다는 말씀입니다.

호세아 11장 7절의 말씀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마지막에 호세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버리지 못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인용은 18절에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입니다. 이는 예레미야 31장 15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예레미야 31장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만, 저희가 조금은 알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40장에 따르면 ‘라마’라는 지역은 바벨론으로 포로들이 끌려가다가 잠시 쉬었던 지점입니다. 예레미야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 일부는 여기에서 해방됩니다.

즉 당시의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의해 죽거나 사로잡힙니다. 그 사로잡힌 사람들 중에서 일부는 선별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일부는 이스라엘 땅에 남겨지게 됩니다. 이런 선별 작업이 이루어진 지역이 라마입니다. 그렇기에 라마는 슬픔과 애통의 길목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라헬은 벧엘을 떠나 이동하는 중에 베냐민을 낳다가 죽음을 맞습니다. 이동 중에 자식을 낳다가 죽은 라헬의 이미지가 죽임당하고 끌려가는 이스라엘의 길과 연결되어 예레미야 31장 15절의 말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슬픔, 애통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1장 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끊임없는 이스라엘의 범죄와 악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끝내 놓지 못하시고, 끝내 버리지 못하시고, 그들의 손을 붙들어주신다는 내용이 두 예언서에 흐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

마태복음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인용을 덧붙입니다. 23절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입니다. 여기에서 ‘나사렛’이라는 말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런 본문이 구약성경에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사렛’이라는 지명 역시도 구약, 신약을 통틀어 4복음서와 사도행전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합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채용되는 학설은 이사야 11장에 나타난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에서 ‘가지’를 뜻하는 히브리어 ‘네째르(נֵצֶר)’의 변형이라는 것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이 학설을 채용했기 때문에 각주에 이사야 11장 1절을 적고 있습니다.

둘째는 칼뱅이 마태복음 주석에서 말했던 내용인데, 나사렛이 ‘나실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나찌르(נָזִיר)’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예수님께서 성별된 분이었기 때문에 ‘나실인’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조금 의외로 이런 해석은 가톨릭에서 채용되어서 공동번역 성경에는 23절 각주에 사사기 13장 5,7절을 참고하라고 되어 있습니다.(좀 더 정확하게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판관기입니다.)

셋째는 마태복음의 저자 또는 저작집단이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지 않은 알 수 없는 예언서 단편을 참고했다는 것인데, 물론 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학설은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고, 두 번째 칼뱅의 학설은 마태복음 저자 또는 저작집단의 의도에는 부합해 보이지만, 구약성경과 연결되는 흐름을 깨뜨려버립니다. 그렇기에 저는 첫 번째 학설을 지지합니다. ‘나사렛’이라는 명칭은 ‘이새의 가지’를 말한 이사야 11장 1절의 인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11장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라는 유명한 복음성가의 후렴구가 바로 이사야 11장 8절의 말씀입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참고로 도입부의 ‘사막에 샘이 넘쳐...’는 이사야 35장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11장 뿐만 아니라 예언서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참 평화’라는 주제는 어떻게 생각하면 참 특이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가해졌던 폭력, 이웃의 강대국에 의한 폭력은 죄악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모든 폭력이 사라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도 심판의 도구를 버리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날이 되면 사람이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폭력이 필요 없다는 의미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읽은 구약성경은 끝없는 사람의 죄악 이야기이고, 끝없는 심판의 이야기입니다. 심판 받아도 또다시 죄를 범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그 연쇄가 끊어짐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폭력에 의한 심판을 행하지 않으시리라 선포하시는 것이고 그 약속의 징표가 예수님입니다. 완전한 평화의 왕,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하실 왕을 보내신 것이 징표가 됩니다.

이는 창세기 7장에서 홍수를 통해 이 땅을 심판 하신 하나님께서 9장에서 자신의 심판 방식을 버리겠다고 선포하시는 것과 동일하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증거가 무지개였다면, 이제 우리에게 주신 증거는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이고 예수님의 탄생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 이 땅에 가득한 죄를 대하는 방식을 변경하신 커다란 사건이고, 더 이상 폭력이라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놀라운 은혜의 사건입니다. 이사야 11장 9절의 말씀입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행하셨던 폭력적 심판 행위를 버리십니다. 오히려 비폭력으로, 오직 정의와 공의만을 가지고 이 땅의 죄를 심판하겠다고 이사야 11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탄의 날에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누구를 만나야 할까요?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야 할까요? 마리아의 품에서 결코 울지 않으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야 할까요? 저는 마태복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이 땅의 모든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오신 분, 사람의 마음에 가득 찬 폭력성을 제거하시고 온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오신 분, 우리는 그 분을 만나야 합니다.

2018년의 마지막 주간, 우리는 아직도 세상에서 수많은 폭력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너무 쉽게 말할 수 있는 노사 문제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어떤 사람이던지 자신이 조금이라도 높은 위치에 있다고 여기면,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세상입니다.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서 벌어진 햄버거 투척에 의한 폭력 사건들은 이를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탄 되었으면 합니다. 로마의 폭력 앞에서도 끝까지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성탄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이 땅에 전하셨으면 합니다. 그곳에 참된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을 줄 믿습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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